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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자국 선명한 선죽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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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규전 작성일 2018-08-09 10:27 댓글 0건 조회 58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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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핏자국 선명한 선죽교 1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이 세상에 태어났다 죽은 사람들이 무릇 몇 명이겠는가만 그 중에서 후세에 이름이 남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역사를 고려 말로 돌려보자.

타이머신을 타지 않는다 하여도 그 시절이 어땠다는 것은 역사책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오랜 시간 원나라에 지배와 간섭을 받으면서 고려 말은 혼돈과 불안정의 시대였다고 한다.

물론 외세에 영향도 있었다고 하지만 고려 내에서도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싸움질이나 하면서 자신의 밥그릇 챙기기에 바빴다고 본다.

덕분에 나라는 개판이 되고 민초들의 삶은 바닥을 헤매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강대국 주변의 틈바구니에서 조그만 나라가 살아가기에는 힘들었다고 본다.

물론 걸출한 정치가가 나와서 확고하게 나라를 운영한 경우야 다르겠지만 맨날 정권투쟁이나 했던 당시를 보았을 때 나라가 쫄딱 망하지 않은 것만 해도 천운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지정학적으로 강대국 틈바구니에 낀 것에 대해서 어디 가서 하소연 할 일은 아닌 것 같고, 우리 것을 최대한 잘 활용하여 주변 국가가 우리를 무시 못 하도록 정치를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 말의 수도는 현재의 서울이 아니라 개성이라는 곳이었다.

고려 초 왕건이 도읍지를 처음 세웠던 곳을 중심으로 고려왕조는 죽 이어왔다.

지금도 개성에 가면 고려의 유적이 무수히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찌 보면 고려의 역사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귀중한 지역이 개성이 아닐까 생각된다.

북한에서 얼마나 잘 보존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도 인간인 이상 함부로 훼손시키거나 없애버리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개성을 가장 개성답게 해 주는 것이 바로 고려시대의 유적이 아닐까 생각된다.

조선의 왕궁처럼 개성에는 고려의 왕궁이 그대로 남아 있을 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불타지 않은 우리 조상들의 유산들은 그대로 남아 있으리라 본다.

그 중 상징적으로 유명한 곳이 선죽교가 아닐까 생각된다.

개성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명소 중 하나가 선죽교라 본다.

물론 이 다리가 건축학적으로 유명하다거나 고려인이 만든 어떤 걸작품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라 본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 무수히 많았던 다리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선죽교가 아닐까 생각된다.

북한과 관계가 정상화되어 마음대로 그쪽으로 갈 수 있다면 그곳을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이 먼저 찾을 곳이 바로 선죽교가 아닐까 싶다.

세월이 지난 후에도 과거 고려시대의 맛을 볼 수 있다는게 얼마나 신기한 일이겠는가?

 

선죽교가 유명한 것은 고려 말 충신 중에 충신이었던 정몽주가 조선 초 철권을 휘두르던 이방원의 자객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던 장소였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정몽주가 이성계를 문병하고 오던 차에 조영규 등 일당에게 철퇴를 맞고 쓰러졌던 곳이다.

지금도 선죽교에는 그의 핏자국이 남아 있다고 하니 그 비감함이 얼마나 컸던지를 알려주는 증좌가 아닐까 생각된다.

현대사와 비유한다면 이00 정권에서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와 남북간 통합을 외쳤던 김구선생을 총으로 저격한 안**의 암살사건과 진배없으리라 본다.

그런 좋지 못한 역사의 선례가 지금에도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는데서 더욱더 통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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