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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문상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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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규전 작성일 2018-02-06 08:42 댓글 1건 조회 80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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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문상집


   이승에서 저승으로 간다는 것은 우리 인간사회에서 생각보다 훨씬 큰 변고라 본다. 10여 년 전에 돌아가신 모 대통령이 한 말씀 중에서 삶과 죽음은 한 조각이거늘을 연상한다면 이승과 저승의 차이는 연속성 상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 대통령의 생각을 빌린다면 이승과 저승은 한 통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승의 결과가 저승으로 귀착이 된다는 것이다. 죽음을 아름답게 미화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 정서적 영역에서는 용이한 일이 아니라 본다.

 

   우리는 이승과 저승을 연결시켜 주는 과정을 장례문화를 통한다고 본다. 지금처럼 장례문화가 변화되지 않았던 시절에는 모든 장례를 집에서 치렀다. 어떤 곳에서는 마을에서 중심이 되어 또 어떤 경우에는 집안에서 중심이 되어 이런 의식을 주관하고 치렀다. 필자가 기억하는 장례과정도 많은 부침이 있었다. 사오십년 전 까지만 하여도 상여가 저승으로 가는 운반체의 역할을 하였는데 어느 날 차량을 통하여 저승문턱까지 운송하는 방식으로 바뀌어 졌다. 과거 사람들이 생각으로는 상상을 못 할 일이 현실화 되었던 것이다. 지금에 누가 상여를 메고 저승 문턱까지 가자고 하면 그 또한 이 시대와 맞지 않는 처사라고 비난을 받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관혼상제의 의식에서 정답이 없다는 것을 우리 시대가 바로 보여준다고 본다. 과거에는 매장 문화가 주가 되었음으로 화장을 한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치부되어 졌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매장을 하는 것이 오히려 현실에 맞지 않는 처사로 변해 버린 것이다. 필자가 기억하는 화장 문화의 큰 변혁을 가져온 것은 옛날 선경(지금에 SK 전신)직물에 최** 회장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분이 돌아가신 후 화장으로 장례를 치르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돈 있는 사람도 매장이 아니라 화장으로 장례를 치를 수 있다는 것을 모범적으로 보여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 노**대통령도 수원에 모 화장장에서 화장으로 장례를 치루면서 장례문화가 매장에서 화장으로 변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준 것으로 기억이 된다. 민초들에게 화장을 하라고 외치는 것보다 윗사람들이 솔선수범하는 것이 훨씬 더 파급효과가 크다는 것을 보여준 결정적인 사례가 아닐까 생각된다.

 

   장례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 중에 하나가 문상이 아닐까 생각된다. 옛 말에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정승이 죽으면 썰렁하다는 말이 실감나는 것은 인간 세계에서 충분히 있을 법 한 이야기라 본다. 문상객이 많아서 망자가 저승에 잘 가는 것도 아니고 적어서 잘 못 가는 것도 아니라 본다. 이승에서 어떤 족적을 남기고 가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 많은 자식을 나은 사람은 죽어서 많은 문상객이 오는 것은 자명한 일일 것이다. 많은 자식을 낳았다는 것은 그만큼 자식들을 위해서 고생을 많이 했음으로 저승 가는 길에 문상객이 많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승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준 사람이 저승에 갈 경우도 많은 문상객이 오리라 본다. 이 또한 이승에 삶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 될 수 도 있을 것이다.

 

   문상이 스타일도 시대에 따라 많이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여의 시대가 끝나고 영안실 시대가 오면서 문상은 초상집이 아니라 병원의 영안실로 옮겨지게 된다. 초기에 문상은 밤새 상주를 지켜주는 것이 도리라 생각되었다. 친분이 좀 있는 집에 초상이 발생되면 밤새도록 망자와 같이 슬픔을 나누어야 도리인 것으로 생각되던 시절이었다. 한 여름 밤이면 모르지만 동지섣달 긴긴밤을 새운다는 것은 용이한 문제가 아니라 본다. 그러다 보니 문상객들이 밤새우면서 할 일은 술 마시는 것과 화투나 카드놀이를 하는 방법으로 분화를 하게 된다. 어느 정도 되어서 문상이 끝나면 정예멤버들은 술상을 받거나 화투, 카드놀이를 하기 위한 장이 펼쳐진다. 숙연하던 초상집이 자정을 넘기면서 시끌벅적해 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이다.

 

   그러던 것이 점점 변하면서 문상객들의 문상시간이 점점 짧아지게 된다. 상주도 숨을 좀 쉴 수 있는 여유를 주자는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몸과 마음이 지칠만큼 지친 상주에게 숨 쉴 여유조차 주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밤새도록 지지고 볶다보면 정작 장례식을 치루는 것 자체가 정신없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망자와 상주가 마지막 헤어지는 순간 만큼이라도 제 정신으로 의식을 치르자는 것도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문상도 현실적으로 맞게끔 진화를 하는 것이다.

 

   문상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곡이 었다. “아이고, 아이고를 얼마나 구슬프게 하느냐가 그 문상집에 분위기를 달리할 수 있는 관건이라 믿었다. 어떤 초상집에 가 보면 짓궂은 친구들이 곡을 제대로 하지 않는 다고 상주에게 핀잔을 주는 경우도 보았다. 그렇게 핀잔을 주는 사람은 자신에게 발생된 초상에서 어떻게 곡을 하는지 좀 보고 싶지만 그 또한 현실적으로 마주치기 쉽지 않으리라 본다. 곡은 망자의 영혼을 달래주는 의식으로 과거로 회상해 보면 지금의 곡 없는 초상의례는 상상을 못할 일일 것이다. 하지만 세월은 사정없이 변하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고리타분한 도시의 대명사였던 강릉과 안동에서는 이런 의식이 남아 있다고 했었는데 안동은 모르겠으나 강릉의 요즘의 초상집 풍경에서 곡소리는 거의 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곡소리 없으면 문상이 안 되던 시절에 살았던 사람들이 보았을 때 몰상식하기 그지없는 현상이 현실에서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과거 문상이나 초상을 치르는 의례는 좋게 말하면 가까이에 있는 사람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죽음에서 무덤을 완성하고 마지막 술 따르는 순간까지 집안이나 친구, 마을 사람들의 손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되던 시절이었다. 장례의 모든 순간을 상주와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장례식 날 영안실에서 관을 빼내어 운구차에 싣는 순간까지도 친구들 아니면 집안에 건장한 사람들이 수행을 했다. 물론 묘를 쓸 경우도 집안이나 마을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시절이 엊그제 같았었는데 이제는 장례의 모든 과정이 외주로 넘어가게 된다. 사람이 죽는 과정에서부터 묘를 쓰거나 납골당에 안치되기까지 모든 과정을 전문업자의 손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문상객들에게 제공되는 밥 한 공기, 국 한 그릇도 상주가 직접 만들어 제공하는 것은 옛날이야기가 된 것이다. 이렇게 변한 것이 상주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엄청 편리하게 된 것이고 장례 대행 업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는 전문적인 기법을 통해서 망자나 상주 모두에게 만족을 시켜 주면서 하나의 훌륭한 장례 문화 사업으로도 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30~40년 전에 장례의식과 현재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울리지 않은 일일 수 있으나 이런 문화가 급격하게 변천해 오는 과정도 하나의 장례문화 변천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조선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조선 초의 시대나 조선말의 시대의 장례 문화나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조선 500년 동안에 큰 변화 없이 치러졌던 장례문화가 최근의 몇 십년동안 경천동지의 변화를 초래한 것이다. 모든 문화는 그 시대상에 따라 변할 수 밖에 없는 속성을 가졌다고 본다. 하지만 이렇게 급격하게 변하는 것도 특이한 일일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 장례문화에 가장 큰 변화는 곡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대목이 과거의 문상문화와 현재의 문상문화의 획을 그어주는 하나의 단면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제 곡소리는 옛날 드라마에서나 들을 법한 이야기가 되어버리지 않을까 싶다. 급격한 문화의 변화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영역이 바로 이 장례 문화라 생각된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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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철님의 댓글

김남철 작성일

한참 과거를 생각하게 해주는 글이었습니다.
관혼상제 문화... 많이 변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세상은 변하고 또 변해 왔는데...,
모교는 왜 능동적으로 변하지 못하였을까?

16. 동문들은 과거의 영화속에서 행복해 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다른 학교의 변화를 동문들이 보지를 못하니 너무나 답답합니다.
(-세양님의 6년 전 학부모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