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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강농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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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함금식(32회) 작성일 2013-08-10 13:50 댓글 0건 조회 3,09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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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벌써 70살이 넘었다.  그러고 보니 모교를 졸업하고 떠난지도 50년이 넘었다. 그러니 모교를 이별한지가 반백년이 넘었다는 말이다. 그동안 나이를 먹었을 뿐 아니라, 나에게는 변한것이 많이있다. 그중에서 몇가지  에를 들어보면,  첯째로 내가 모국을 떠나서 미국에서 살아온지가 벌써 45년이 넘었다. 세월이 많이 변했다.둘째로는 그 동안에 젊어서 꾸어 오던 꿈을 거의 이루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만하면 되었지 하는 마음이다. 셋째로는 한국의 문화를 떠나서 미국 문화속에 살면서  살아가는 양식이라든가 생각하는 사고의 형태라든가하는 문화적인 면에서 많이 변했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오랜 세월속에서 변한것들이 많지만,  내가 철들기 시직하여 떠난, 모교로부터 받은 나의 정신적인 자부심(Pride)는 바꾸어 지지 않았다.

언제 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제껏 살아오는 동안 주저할일에 접하거나, 어려운 일을 성공적으로 해 냈거나,  혼자 외로울때는 언제든지 우리 모교의 교가를 부르는것이 나의 습관이 되었다. 나는 어디에 가더라도 나에게는 "나는 강농인" 이라는것을 자랑 스럽게 여긴다.이십 중반을 갇넘은 나이로 가슴을 뿌듯이 채우는 희망을 안고 미국으로 떠난지가 50년이 가까워 온다.  그 때에 나의 마음속에는 미국에가서 좀더 새로운 그리고 획기적인 학문의 이론을 배워가지고 돌아와서 가난한 한국의 사회 발전에 기여 해 보고싶은 젊은 꿈이였다. 그당시 한국에서는 대학을 졸럽하고도 직장이 없어서 젊은이들이 고심하는 시대였다. 그런데, 동료들이 부러워했던 관료직을 차지하게 되었었다. 물론 시험을 보아서 함격이 되었섯다. 몇몇 친구들이 그만하면 되었지 무었때문에 미국으로 가서 고생하려고 하느냐고 말렸지만, “아니다, 가야지” 하는 일념으로 한국을 떠났다.  “산”은 넘어 보아야 산넘어의 세상이 보이는 법이다.

50불을  주머니에 넣고 떠났다. 나를 받아준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았고, 여름 방학에 일을하여 돈을 벌면 생활을 충분히 할수있다는 승산이였다.  그러나, 짐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보니 슬그머니 마음속에 걱정이 생겼다. 그것은 비행기 속에서 맏난 몇분의 한국 유학생들 때문이였다. 첯째로 나를 제외한 유학생들은 학교 배경이나 가정적인 배경에서 내가 비교를 할수없는 사람들이였다.모두들 서울에서 일류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였고  그들의 아버지는 당시 한국사회에서 알려진 분들이였다. 나는 이들과 어룰리기 심들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조심 스럼게 대해 주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 속에는 “나는 강릉농고 출신이다.”라는 자부심으로 마음을 메웠다. 미국에 도착하여  내가 입학된 학교로갔다. 장학금을 유지 하기위해서는 좋은 학점을 유지 하여야하니 쉬운일이 않일 뿐더러 일년 후에는 학위 자격시험(Doctoral candidate qualifying examination)에 통과를 해야 계속 학업을 할수가있스니, 웬만한 어려움이 아니였다.  대학원에 동기로 입학된 학생들이 한 15명이 되었다. 이들중에서 외국인은 나와 인도에서 유학온 두사람이였다. 그중에서 학위를 성공적으로 마친 학생들은 4명 뿐이였다. 밤새워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간추리고 읽은 내용을  비판하고 종합하여 내가 보는 나름대로의 관점을 뫃아서  Paper를 쓰느라고 밤을 새워 도서관을 나서노라면 교정의 숲을 넘어 해가뜬는때가 많았다. 그러나, “ 해내었다.” 라는 자부심을 안고 교정을 걸을 때면, 나는 “강농인”이라는 자부심을 느끼며 이런것 쭘이야 다 해낼수있다는 자부심을 느꼇다.

어는 한해 봄이엿다. North Carolina 에서 뻐스를타고 뉴욕으로 가는 질이였다.  버스 운전석 바로 뒤에 자리를 하고 Virginia를 통과하고있었다. 버스는 미국의 동부와 중부를 갈라 놓는 아팔라치아 산맥 정상을 넘고있었다. 버스 앞을 달리는 한 고급 승용차가 가고있었다,  그 차의 뒤 차창에는 미국의 두 명문대학교 시티커(Sticker) 가 붙어있었다.  참으로 부러웠다. 나도 앞으로 자녀들을 갖게 되면 그들도 이러한 학교에 갈수가있으면 하는 생각에 잡혀있었었다. 그러한 대학의 이름에 인상을 받은것이 아니라, 그러한 대학을 들어 갈수있는 자질을 가지고있는 자녀들이 부러웠다.그때도 그랫지만, 요즘도 미국에서는  명문대학을 나온 자녀들이  대학을 졸업한지 10여년후에 그들이 차지하게 되는 사회 계층을 보면, 그들의 직업이나 년 수입이 그렇지 않은  자녀들 보다 훨씬 높다.

나는 지난주에 Atlanta에 사는 딸집에가서 한 보름 머물며 둘째 외손자 첯돌을 보고 외 손자들과 놀아 주고왔다.  Atlanta에서  내가 사는 Harrisburg 까지는 약 1,200 Km나 되는 먼 거리이다. 그래서 Georgia 를 떠나서 South Carolina 를 통과하고 North Carolina에 들어오면 하룻밤을 여관에서 쉬고  아침 일찌기 Appalachian 산맥을 넘어야 한다. 이 길이 바로 40여년전에 뻐스를 타고 뉴욕으로 가던 바로 그 고속도로이다. 산맥의 구비 구비를 돌아 운전을 하면서 지나간 옛날 빈손의 유학생으로 New York으로 가는 버스에서 보던 그 승용차가 문득 생각에 떠 올랏다. 그리고는 내 차의 Back Mirror 뒤를 보았다.  이 두 학교의 시티커(sticker)가 내 차의 뒷창에도 붙어있었다. 그때 그 승용차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나도 이만하면 되었다 하는 자부심으로 대관령을 상징하는 우리 모교의 교가를 부르면서 Virginia주를 통과 하고있었다.

나는 미국에 살면서, 친분이 두터운 한국분들이 별로 없다. 이유로는 직업이 이곳 정부와 대학에서 35년이넘게 보내고 은퇴를 하엿고, 아직도 가르치고있스니, 나의 취향에 맛는 한국분들을 만나기가 어렵다. 그럴뿐 아니라 나의 위치에서 만나는 한국인들은 아직도 자기들이 나온 고등학교를 중심으로 만난다. 그런데다가, 나는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Golf를 치지 않는다. Golf장에 나가면 이렇게 하루를 보내는것 보다 다른 일을하면 생산성이 더 높을텐데하는 계산성이 앞서기 때문에 취미를 붙일수가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만나는 사람들과 몇마디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살아오고 살아가는 배경의 상당한 이질적인 차이를 느끼게 된다. 서로의 공통적인 대화의 기반을 찾기가 어렵다. 나는 호미로 밭을 매는 모교의 영향을 받아서 꾸준히 일을 하고 무었인가 생산적인 일을 하여야 일하고 살아가는 즐거움을 느낀다.  

나는 요즘도  미국 친구들과 더 속마음을 비우면서 얘기를 나누고 산다.  그들과 같이 학교도 다녔고 직장 생활도 같이했고 또 가까운 동네에 사니까 서로들 주고 받고하는 대화의 내용이 풍부할뿐더러 서로들의 입장을 이해하기도 쉽다. 이렇게 살다 보니 어떤때로는 스스로가 더 미국사람이 된것 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에게 그동안 많은것이 변하였다고 하더라도, 내가 강농인이라는 자부심은 내 마음속에 깊히 자리잡고있고,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며 산다. 우리 강농의 교가를 부르면 힘이 생긴다.나를 알게 한다. 그래서 내 입에서는 교가를 언제나 담고 다닌다. 도리켜 보면, 나는 때로 나를 지탱하고 어려움을  도전하고 극복하는 “힘” 은 어디에서 왔을까 생각 해 본다. 그것은 “나는 나다.”라는 자부심이였다. 내가 나를 정의 하는데는 내가 다녔던 모교 “우리 강농교”를 빼어 놓을수가 없다. 

한 집단의  응집의 기본적인  요소는 그 집단이 가지고있는 이념적인 특성이라고 한다. 내가 나를 정의하는 이념의 큰 부분이 우리 강농의 교가에서 왔다고 느껴진다. 우리 강농인들은 말없이 늠늠하게 미래를 도전하는 정신이있다.  대관령을 닮은 기상이다.  높이 웅장하게 줄지어서있는  동해의 울타리다. 경포대의 잔잔하고 아름다운 호수를 내려다 보며 늠늠히 마음 다지게 해 주는 산이다. 이 기상을 닮고 배운 젊은이 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시 푸른 장엄한 대관령을 본받아  늠늠하고 믿을 만한 자태의 정기를 가지고있는 젊은이들이였다. 이러한 정기를 가지고 자라나는 새나라의 일꾼들이였다.  희망에 부풀어 동해 바다 돋는해로 마음을 끄리는 젊은이들이였다.우리는 도전을 무서워 하지않는다.  호미낮으로 마음 다지고  뜨거운 햇살 아래서도 쉬지앟고 심신을 단련하며 자라온 건아들이다. 오유월 여름 한철에 밭에 나가서 잡초를 뽑아 작물을 가꾸어 가을의 수확을 휘해 어려움을 무서워하지않고 미래를 개척하는 정신을 가지고 젊음을 다짐한 사람들이였다. 이러한 면에서 나는 한국을 떠난후에 내 스스로 쓸쓸 해 질때나, 어려운 일을 만나거나, 기뿐일이 일어나면 언제나 우리 강농의 교가를 부르는것이 습관화 되었다. 누가 듣거나 말거나 혼자 마음속으로 “우리 강농고” 교가를 부른다. 이제 뒤돌아 보면,  대관령을 넘으면서 가지고 떠난 젊음의 꿈을 이곳에서 이루었다고 생각이 들때가있다. 그러나 나는 요즘도 비록 나이를 먹어 가며 백발을 날리지만 우리 모교의 교가를 부르면서 나 자신을 돌아 보고 꿈을 세운다.

장엄하다 대관령은 사시 프르고,
경포대를 굽어 보는 우리 강농교 
새나라의 일꾼들이 자라 나는곳,
동해 바다 돋는 해에 맘도 끓는다.

언제나 푸르게 젊은 마음으로 살아야지, 젊음은 새론운것들을 배우고 뜻있는 일을 하는 삶이지. 그러니 꾸준히 배우고 부지런히 일을하며 나를 가꿔야겠지......

주: 철자법들이 틀린것들 양해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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