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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특정 다수와 특정 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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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규전 작성일 2018-05-02 18:11 댓글 0건 조회 71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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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특정 다수와 특정 소수


  이 글을 읽는 독자님들은 위 제목에서 어떤 대상을 타킷으로 밥을 벌어먹고 사시나요. 이 글을 접하기 전까지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필자의 제목을 읽고 밥 벌어 먹는 틀도 대상과 윤곽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런 저런 생각 없이 그냥 일하고 그 대가를 가지고 밥 벌어 먹는다면 위 같은 제목에 대한 글은 한 낫 쓰잘데기 없는 공론으로 치부 되리라 본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좀 더 세세하게 이해를 한다면 삶 자체도 좀 더 깊이 있게 엮어갈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 우리 조상들이 많이 입었던 옷 중에서 베옷이 있다. 이 베를 짤 때 실을 가늘게 뽑으면 뽑을수록 삼베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올라가게 되어있다. 굵게 삼실을 삼아서 베를 짜면 짜기 쉽고 한정된 시간에 많은 량을 짤 수는 있지만 그 값어치는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맨날 삼베옷만 입던 사람이 누에 실로 직조한 비단을 본다면 눈이 뒤집히는 것은 자명한 일일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의 인생은 어찌 보면 날실과 들실을 가지고 엮어가는 직조물과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실을 가지고 어떻게 짜느냐에 따라서 명품이 될 수 도 있을 것이고 그냥 그렇고 그런 직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내 인생을 짜는데 그 기본틀은 알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리라 본다. 동물 마냥 본성으로만 살아가는 것은 이 세상에 온 의미를 너무 반감시키는 사고방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간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밥 벌어 먹고 살기 위하여 바둥바둥하고 있다고 본다. 일 하지 않고 먹고 살 수 있다면 굳이 힘들고 머리 아프게 살아갈 필요가 없으리라 보지만 현실은 냉혹한 것이다. 이 현실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 적응할 수 있다면 그래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적당히 살아도 되는데 뭐 그렇게 번거롭게 부산을 떨 필요가 있겠는가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도 나름대로의 철학이나 소신이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세상은 모르는 것 보다는 아는 것이 삶의 영역을 좀 더 확장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리라 본다.

 

   우리가 밥 벌어 머고 사는 세상에는 크게 두 가지 스타일로 구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제목에서 보듯 특정 소수를 상대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밥을 벌어먹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독자들도 이 시점에 자신이 어느 부류의 대열에 끼어 있는지 생각해 보면 금세 답이 나오리라 본다. 자신이 처한 부류의 대열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였을 때 자신의 가치가 더 커질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봄 즉 하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은 당연히 사회에서 엮여서 살아가는 관계로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을 인식은 하고 있다고 본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당연한 것을 그냥 당연한 것으로 넘긴다면 이것은 동물의 본능 쪽으로 접근하는 처사가 되리라 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런 말을 하기 전에도 사회는 있었다. 그런데 그 전에 무수히 살았던 사람들이 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갈 것이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전제를 말하는 순간부터 인간 사회생활의 세계를 이성이 통제하는 세계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이 모여서 건전한 사회를 만드는 기본적 사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도 완전한 정답이 아닐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보다 더 현실적이고 리얼한 표현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고 본다.

 

   범위를 좁혀서 우리가 밥 벌어먹는 대상에 대해서 특정 소수냐 아니면 불특정 다수냐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 보자. 특정 소수와 불특정 다수를 상대한다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 접근법이 아닐까 싶다. 내게 밥줄을 이어주는 사람이 누군가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자. 우선 필자 같은 경우는 특저의 소수를 상대로 밥을 벌어먹고 있다고 본다. 매일 만나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다. 가끔 가다가 외부의 손님도 마주하지만 대다수가 매일 만나는 특정 소수와 관련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마인드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살아가는 사람과는 다른 관점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특정 소수를 대상으로 밥 벌어먹는 사람들은 그 대상에 대해서 해박한 식견과 지식과 성향을 잘 안다는 것이다.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해서는 누구 못지않게 잘 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특정 소수에 대해서 현재와 미래에 대한 엄청난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이런 집단에서는 인간 개개인에 대해서 소홀히 할 수 없는 관계로 엮어진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나와 함께 하는 특정 소수로 인하여 밥을 먹는데 대충대충의 관계를 형성한다면 내 밥자리도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특정 소수를 상대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수렴적으로 지향하는 성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특정 소수의 모든 것을 녹여 줄 수 있는 방향으로 사고방식을 전환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다보니

 

 

   반면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밥 벌어먹는 사람들은 성향자체가 외향으로 확산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한 두 사람을 상대로 밥벌이를 할 수 없는 관계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는데서 자신의 존재가치가 들어나게 되는 것이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밥벌이를 하는 경우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만 잘 하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조직에 얽매이면서 불특정 다수와 지지고 볶아야 하는 경우에는 양상이 조금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혼자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밥벌이를 하는 경우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밥 먹고 사는 영역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알면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하는 대표적인 직업군이 정치인이 아닐까 생각된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어야지만 표와 연결되는 관계로 나와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친근감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이외에도 농수산업, 제조업, 건설업, 유통업, 숙박업, 일반 공무원 등은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영업을 함으로서 수요자에 맞는 서비스가 필요하리라 본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밥 벌어먹는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친근감을 줄 수 있는 방향의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 것이다. 특정 소수를 상대로 밥 벌어 먹는 사람들과는 좀 다르게 접근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

 

   특정 소수와 불특정 다수의 이분법적인 논리에서 밥벌이를 적용한다는 것은 썩 바람직한 것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우리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잘 아는 것은 삶을 좀 더 용이하고 부드럽게 이끌어 갈 수 있는 방향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알고 상대를 알면 더 좋은 삶이 있다고 누군가가 말한 기억이 난다. 실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밥벌이는 특정소수와 불특정 다수가 적절히 섞여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을 수 있다. 우리의 사회는 융합형으로 분화가 되고 있는 것이다. 양쪽의 상황을 잘 파악하여 더 나은 세계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찾는 방편으로 이용될 수 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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