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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길을 묻다 95 - ‘1953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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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에이포 작성일 2018-04-29 21:04 댓글 0건 조회 64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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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727일 한국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맞대고 나라 안팎으로 백 수십만 사상자를 낸 비극의 한국전쟁은 그렇게 휴전이라는 이름으로 일단락된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보면 전쟁 와중에도 어찌어찌 잉태가 되어 전쟁이 끝나던 해에 세상에 태어났으니 '해방둥이'가 있듯 '휴전둥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뱃속에서 전쟁을 겪느라 어미도 새끼도 힘겨웠고, 총성과 포성, 피난길의 아우성을 태교음악 대신 들으며 세상에 나올 준비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휴전둥이는 건장한 장정으로 자라 군에 입대를 하고 공교롭게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을 촉발시킨 미루나무가 잘려나가는 현장에 있었다  

1976821일 새벽, 전 군에 데프콘2 비상이 걸리고, 연대 작전병이었던 나는 묵직한 실탄통과 수류탄을 지급받고 판문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GP의 벙커 속에 있었다. 일촉즉발, 실탄을 장전하고 안전핀을 푼 채 방아쇠에 검지손가락을 거는 순간, 고향집의 부모형제와 친구들의 얼굴이 스치듯 떠오르며 눈물이 쏟아져내렸다.

한 놈의 북한군이라도 더 쏴 죽여 전쟁에서 승리해야 하겠다는 군인으로서의 투지와 긴장감 보다는 이 순간 전쟁이 터지면 살아서 고향땅을 밟을 확률이 0%도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그날로 부터 418개월이 지났다. 엊그제 남북정상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리고 양국정상에 의해 평화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으로 튼실하고 아름다운 수형의 소나무 한그루가 그 역사의 현장에 심어졌다. 1953년생 소나무라고 한다.    

1953년생, 돌아보면 참 전쟁처럼 살아왔다.

앞으로는?

글쎄, 우선은 살아오면서 잘못 매듭지어졌던 숱한 형태의 미움과 증오부터 버려야 하겠다. 살아온 날이 그랬으니 이제는 저 소나무처럼 묵묵히 역사를, 세상을 관조하며 살아가야 하겠다. 소나무는 나이가 들수록 의연하고 향기로워진다고 했던가?

꽃잎처럼 붉었던 젊은 시절의 땀과 눈물이 배인 그 GP 언저리에는 지금쯤 철쭉이 만발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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