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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초희(楚姬) (9) -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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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기술했듯이 어린 시절 강릉의 초당과 사천의 외가에서의 아름다운 서정과 추억을 간직한 채 서울로 올라간 초희는 1577년 15세에 집안의 주선으로 안동김씨(安東金氏) 김성립(金誠立)과 혼인하였지만, 부부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워낙 그녀의 글재주가 뛰어나자 주눅이 든 남편 김성립은 그녀를 피하기만 했다. 늦은 나이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나 말단 종9품 홍문관 저작에 머물렀고, 가정의 충실하기보다는 기생집을 드나들며 풍류를 즐기는데 시간을 허비했다.
남편의 난봉 끼 외에도 시어머니와의 계속된 불화는 그녀의 마음과 몸을 피폐하게 했고, 1580년(선조 13년) 아버지 허엽이 상주의 한 객관에서 사망한 이후 아들과 딸을 연이어 병으로 잃기까지 했다.
그녀는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섬세한 필치와 애상적 시풍으로 그녀만의 특유의 시 세계를 이루어 낸다. 그러나 어머니 김씨가 사망한데 이어 오빠 허봉 역시 율곡 이이를 비방하다가 변방으로 귀양가고, 동생 허균도 관직을 오르내리며 방황하는 등 비극이 끊어지지 않자 삶의 의욕을 잃었고, 그 허망함을 책과 먹(墨)으로 메우고 달래다가 1589년 (선조 22년) 3월 19일, 한성 자택에서 유시(遺詩)를 남기고 세상을 등졌으니 그녀의 나이 겨우 27세였다.
碧海浸瑤海 /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靑鸞倚彩鸞 /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芙蓉三九朶 /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紅墮月霜寒 /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그가 죽자 남동생 허균은 그를 그리워하며 추모하는 시 한수를 남겼으니,
“옥(玉)이 깨지고 별이 떨어지니 그대의 한 평생 불행하기만 했구나.
하늘이 줄 때에는 재색을 넘치게 했으면서도
어찌 이리도 가혹하게 속히 빼앗아 가는가?
거문고는 멀리 둔 채 타지도 못하고
좋은 음식 있은들 맛보지 못하였네
난설헌의 침실은 고독만이 넘치고
난초도 싹이 트는가 싶더니 서리 맞아 꺾였네
하늘로 돌아가 편히 쉬기를
세상에 한순간 왔던 것이 슬프기만 하다.
홀연히 왔다가 바람처럼 떠나가니
한 세월 오랫동안 머물지 못했구나
허난설헌은 죽기 직전 방안을 가득 채웠던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소각시켰으나 다행히 친정집에 있던 작품들은 이를 아깝게 여긴 균이 이를 보관했다가 1608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면서 가지고 갔다. 이를 명나라 시인 주지번에게 주자 읽고 탄복한 명나라 관리들이 비용을 지원해 난설헌의 시가 주류를 이룬 <조선시선>이 간행되었고 그 시집이 역으로 조선에 들어오게 된다.
한편 1711년에는 일본의 문인인 분다이야지로(文台屋次郎)에 의해 시가 번역되고 시집이 간행되어 한때 일본에 유행처럼 애송되기도 했으니 이는 시를 통한 최초의 한류라 할 수 있다. 엄격한 남존여비의 세상에 태어나 때로는 진한 감성으로, 때로는 시대의 모순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저항적인 시를 피워낸 초희,
그렇게 짧은 생을 마치고 한 떨기 하늘의 별이 되었고, 우리는 그녀가 생애에 일군 문학적 향기를 기리며 오늘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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