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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초희(楚姬) - ‘筠’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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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에이포 작성일 2024-09-28 20:18 댓글 0건 조회 23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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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면 애일리에 소재한 허균 시비>   

 

여러 기록을 살펴볼 때 그는 분명 강릉 사천면 애일리 외가 김광칠의 터에서 교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부인할 수 없는 강릉인이다. 선입견일 수 있지만 강릉사람들은 보편적으로 대인관계에 있어서 살갑지 못하고 다소 무뚝뚝하다. 특히 강릉인은 사적으로 초당의 선사유적지와 인류학적으로 Y염색체 연구에서 입증되듯이 몽골 등 북방에서 남하한 몽골로이드다. 북방계열의 사람들은 우직하며 이성적 합리적 사고가 부족한 반면 직관력과 창의력은 우수하다 했다.

 

균은 허엽의 색깔이 다른 두 가계의 영향을 두루 받아서인지 뛰어난 천재성뿐만 아니라 성격이 다소 괴팍하고 때로는 돌출적이면서도 정치적 감각과 수완은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사서삼경을 통달했다고 하나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이 더 그를 지배했을 수도 있다.

 

1603, 춘추관 편수관과 지제교를 겸직하며 지내던 중 균은 조카의 결혼식에 당시의 예복과는 다른 이상야릇한 옷을 입고 왔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집요한 공세를 받았다. 그가 어떤 모양, 어떤 형태의 입성을 했는가에 대해 알 길이 없으나 상상하건대 그에게는 시대를 리드하는 패션감각도 있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당시의 명나라에 영향을 받은 복잡하고 불편한 복장이 아니라 그의 성정처럼 현대의 개량한복 같은 복장을 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할 수 있다. 아무튼 사헌부의 트집이 계속되자 벼슬에 대한 회의를 품고 모든 관직을 뒤로한 채 강릉 외가와 금강산을 오가며 방랑생활을 한다.

 

역설적이게도 이상한 복장을 하고 조카의 결혼식에 참석한 균에 대한 사헌부관리들의 판단과는 달리 선조는 이를 긍정적으로 보았던가 후일 그를 왕실의 복식을 관장하는 상의원정(尙衣院正/영화 상의원참조. 조선시대 상의원에 소속된 정3품 관직으로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복식 일체를 관장하며, 재물과 보화를 관리하고 제조하고 공급하던 공조(工曹) 소속의 벼슬에 임명한다.

 

균은 1604(선조 37) 7월에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고 같은 해 9월 황해도 수안군수로 임명받아 부임한다. 그러나 암행어사의 암행감찰에서 불교를 숭상했다며 다시 탄핵받아 군수직을 사퇴하고, 균과 같은 날 강원도 흡곡현감으로 발령을 받고 한달 차로 사퇴한 친구 한석봉(본명/韓濩/서예가 · 문신)과 방탕한 생활했는가 싶었는데 한편으로는 이 기간을 이용해 형 봉의 문집 <하곡집(荷谷集)> 두 권을 발간했다. 그와 함께 하루 같이 술을 마셨던 한석봉은 술에 취한 채 나귀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나귀 등에서 떨어져 객사를 한다.

 

이후 16064월에 원접사(명나라 사신을 멀리까지 나가 맞아들이는 일을 하던 임시직 벼슬) 유근(柳根)의 추천으로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에 임명되자 주지번과 사서오경 등 고전을 막힘없이 논하고, 재기 넘치는 글로 주지번을 감동시켰다. 균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동안 보관하던 누이 난설헌의 시선집을 주지번에게 주었던 바, 주지번이 초희의 놀라운 시작(詩作)에 감동하여 초희 사후 18년 뒤인 1606년 명나라에서 <난설헌집>이 출간된다.

 

초희가 스물일곱의 나이에 세상을 뜨면서 자신과 함께 다비(茶毘/인도의 화장법 일종)를 시켜 달라던 육신과도 같은 그녀의 걸작들은 이렇게 오빠 균의 누이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그리움, 세심한 배려로 그 일부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녀의 불행과 요절도 요절이려니와 짧은 생애에 걸쳐 많은 시를 남겼으나 상당수가 그녀의 다비와 함께 불태워졌을 것으로 생각하니 안타깝고 또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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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105일부터 이틀간 허균선양사업회가 주관하는 허균문화제가 초당 생가 일원에서 열린다 합니다. 많은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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