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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만에 경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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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만에 경사 1
우리 모교가 이 세상에 둥지를 틀고 개교를 한 것은 1928년 7월1일에 일이다.
어디서 개교를 했는가 하면 현 위치가 아니고 지금 명륜고 자리 옆쪽에 향교였다고 한다.
거기서 개교를 한 다음 현 강릉여고 자리로 이사를 와서 몇 년 동안 공부를 하다가 현 입암동으로
또 이사를 하게 되었다.
현 강여고 자리가 옛날 농고 자리었다는 것은 거기에 우뚝 서 있는 히말리야시다가 몇 그루가
확실하게 입증해주고 있다.
당시에 거기에 심겨져 있던 히말리야시다 개체 중에서 가장 폼이 나는 것 하나만 굴취해서 현재
우리 모교 교정에 심었는데 그게 현재 우리의 교목인 것이다.
학교를 옮길 당시에 우리 모교 자리는 병산 내려가는 포플러 길목 옆에 찬바람이 쌩쌩부는
허허벌판 같은 곳이었다.
지금은 강남 요지로서 학교 부지 5만여 평의 땅값만 하여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부동산
부자 학교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처음 우리 모교가 세워진 것은 한국 사람이 아닌 왜놈들이 만들었다.
허구 많은 학과를 다 놔두고 농고를 만든 이유는 왜놈들이 당시에 조선을 식민지화 시키면서
농산물 수탈을 위하여 농업계 인력양성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인문계 및 공업계, 상업계 같은 학교를 마다하고 농업계를 만든 또 하나의 이유는 한민족을 그저
농업이나 연명할 정도의 노동자를 만들어 까막눈 같은 민족으로 전락시킬 흑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우민화 정책을 써서 우리 민족을 무지렁이로 만든 다음 자기들 입맛에 맞는 방향으로
좌지우지하겠다는 아주 고약한 발상을 가지고 시작한 것이다.
당시엔 학교라곤 농고밖에 없었음으로 인문학이나 경영학, 법학, 공학 등을 배우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에 유학을 가야하는데 그 때 사회상으로 보았을 때 그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다보니 각 지역에 개설된 농고로 그 지역에 인재들이 모여들 수 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그 대열에 끼다보니 저 위에 원산에서부터 울진에 이르기까지 동해안에 인재는 죄다
몰리면서 명문학교로 명성을 날렸으리라 짐작이 된다.
더 이해하기 쉽게 표현한다면 타 학교가 없었던 관계로 똥지게를 지고 다니던 학교도 독과점이
되다보니 좋은 인재가 다 몰릴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거기서 무엇을 가르쳤겠는가.
당연히 일본식의 식민사관교육에 중점을 두었으리라 본다.
일본을 숭상하는 황국신민 사상을 중심으로 좀 똘똘한 한국 젊은이들을 왜놈사상에 젖어 들도록
세뇌교육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해방되기 전까지 우리 모교의 교장은 죄다 왜놈출신 뿐이었다는 것이 그 증거인 것이다.
교사는 일부 한국인이 있었지만 그 또한 왜놈들의 사상에 쩔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당시에 완장만 채워 놓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때려잡던 왜놈 앞잡이 순사를 연상해 보면 얼추
짐작은 갈 것이라 본다.
이렇게 우리 모교는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설립되면서 왜놈들의 수탈정책의 희생양으로 전락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이다.
거기서 가르쳐준 것은 큰 틀에서 2가지 정도였을 것이라 짐작이 된다.
하나는 전쟁물자 중에서 가장 비중이 큰 군량미 생산을 위한 기술을 가르쳐 주었을 것이고 또
하나는 왜놈 스타일(황국신민)의 교육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렇게 태생된 우리 모교가 해방이 되면서 그 당시에 가르쳤던 왜색풍의 한국인 선생이 바통을
이어받아 가르치게 된 것이다.
일본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는 죄다 왜색 풍에 젖어 있던 선생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교육도 새로운 세계를 제대로 열지 못하고 왜색과 함께 어정쩡한 방향으로 정립되었
으리라 추정된다.
교육의 일제 잔재가 그대로 이어진 교육이 지금까지 흘러오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금은 왜색이 많이 상쇄되었지만 삼 사 십 년 전 만 해도 왜놈 풍의 교육이 만연했었다.
매주 월요일 애국조회를 시작으로 교장의 훈시, 교복, 교모, 빡빡머리, 왜놈 풍의 교훈이나 급훈,
교련조회, 칼 같은 선후배 관계, 지시일변도의 학교 운영, 스파르타식 교육, 주입식 교육 같은
것이 횡행하였다.
시대가 바뀌면서 이런 것도 어느 정도 희석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교실에 들어가면 왜놈 스타일의
교육 잔재가 널려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세월의 부침만큼 우리 모교의 역사도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본다.
우리 모교가 실업계인 만큼 산업이 변할 때 마다 급격하게 변화와 맞닥뜨릴 수 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왔다.
농공병진정책으로 인하여 농고에 공고가 들어오면서 농공고가 되었다가 다시 농고로 되었다가
이제는 농고가 조경과 하나만 남고 공고화 되어 버린 것이다.
타 학교에 비하여 시대적 조류와 파도의 선봉에 있다 보니 안정적인 학교 운영보다는 정책적
수단에 흔들리는 학교가 돼 버린 것이다.
- 다음글100년 만에 경사 2 25.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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