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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회 소식
동문 여러분의 의견을 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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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 2006-02-28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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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문 중에서 우리나라 농업분야에 새 역사를 창조하신 서암 함영수(모교 19회) 박사의 공덕을 기리고 그 뜻을 후배들에게 심어주고자 모교내에 그분에 흉상을 건립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업적은 1957년 우리나라 최초로 수경재배분야를 개척하여 상용화에 성공을 하셨으며 70년대 만성적인 주식(쌀)부족의 타개책의 일환으로 다수확 품종의 개발에 주역으로서 당시에 획기적인 통일벼를 육성하는데 크게 기여하는 등 농업 선진화에 기여한 공로가 지대합니다.
이에 그분의 업적을 후학들에게 알려 모교의 자긍심 고취와 함께 향학에 더 정진할 수 있는 정신적 모태를 형성하고자 모교 교정에 기념비를 건립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어는 한 두 동문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닌 만큼 동문 여러분들의 폭넓은 이해와 협조 그리고 성원이 따라야 될 사항이라 봅니다.
이 사업에 대하여 동문 여러분의 고견을 들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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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은 통일벼 ‘大豊’…연 4천만섬 돌파
첫 확대 재배에서 성과를 인정받지 못한 통일벼는 73년도 농림부의 장려품종에서 제외된다. 농림부는 73년도 식량증산 시책을 시달하면서 “금후 특종 품종을 농가에 강요할 때는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중문책 하겠다”고 밝혔다. 통일벼 품종을 권장해서는 안된다는 암묵적 지시였다.
농림부의 이 같은 태도에 새 볍씨를 개발한 농촌진흥청 측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농진청은 “통일벼가 다수확 품종이라는 사실이 입증된 만큼 재배상의 결점을 보완해 확대재배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입장을 강조했다. 농진청은 73년 1월24일 각 도 진흥원장과 기술보급과장, 농촌지도소장 등을 소집해 “각 시 군의 재배 적지를 선정해 통일벼를 재배하라”고 별도 지시를 내린다.
두 기관간 알력 속에 73년도 통일벼 재배면적은 전년보다 35% 줄어든 12만1000 정보로 조정돼 2차년도 재배에 나서게 된다.
재배 결과 73년도 통일벼 수확은 대풍작을 기록했다. 농진청의 예상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이 해 재래품종은 단당 350Kg을 생산한데 반해 통일벼는 481Kg을 기록, 37.4%나 증수됐다. 12만1천 정보의 통일벼 재배면적에서 110만2000섬의 쌀이 증산됐으며, 농가 순소득증가액만 226억원에 달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이 같은 대풍은 통일벼를 장려품종에서 제외했던 농림부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농림부는 특히 73년부터 단당 600Kg 이상을 생산하는 농가에 대해 10만원씩의 상금을 지원하겠다는 획기적인 시상제도를 발표해 놓은 터였다. 농림부는 600Kg 이상 생산할 수 있는 농가가 100여명선에 불과할 것으로 예상하고 이에 대한 상금만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런데 통일벼 대풍으로 600Kg 이상 다수확 농가가 총 3765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나자 3억6000여만원에 달하는 추가상금을 확보하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
이 해 통일벼 재배를 성공적으로 지도하면서 단당 780Kg이라는 사상 최고 수확량을 이끌어낸 농진청은 ‘쌀 3000만섬 돌파’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갖게 됐고, 74년 18만9000 정보를 대상으로 통일벼 3차 재배에 나선다.
74년 통일벼 농사도 대풍이었다. 이 해 쌀 수확량은 3086만섬을 넘어서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3000만섬을 돌파하는 신기록을 세웠다. 74년에는 600Kg 이상 다수확 농가가 2만9000명선으로 급격히 늘어나 정부는 30억원의 시상금을 준비해야만 했다.
통일벼의 대성공에 이어 75년부터 유신, 밀양23호, 수원264호, 노풍 등 신품종들이 잇따라 개발 보급되면서 75년 3242만섬, 76년 3596만섬에 이어 77년에는 4170만섬을 넘어서 사상 처음으로 연간 쌀 수확 4000만섬을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다.
8.15 해방 이후 수없이 겪어 왔던 미곡 부족과 쌀 파동을 근본적으로 극복하고, 비로소 ‘주곡 자립’의 문을 활짝 열게 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77년12월 농업진흥청을 방문, 뿌듯한 마음으로 “녹색혁명 성취”라는 휘호를 남겼다.
그분의 업적은 1957년 우리나라 최초로 수경재배분야를 개척하여 상용화에 성공을 하셨으며 70년대 만성적인 주식(쌀)부족의 타개책의 일환으로 다수확 품종의 개발에 주역으로서 당시에 획기적인 통일벼를 육성하는데 크게 기여하는 등 농업 선진화에 기여한 공로가 지대합니다.
이에 그분의 업적을 후학들에게 알려 모교의 자긍심 고취와 함께 향학에 더 정진할 수 있는 정신적 모태를 형성하고자 모교 교정에 기념비를 건립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어는 한 두 동문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닌 만큼 동문 여러분들의 폭넓은 이해와 협조 그리고 성원이 따라야 될 사항이라 봅니다.
이 사업에 대하여 동문 여러분의 고견을 들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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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은 통일벼 ‘大豊’…연 4천만섬 돌파
첫 확대 재배에서 성과를 인정받지 못한 통일벼는 73년도 농림부의 장려품종에서 제외된다. 농림부는 73년도 식량증산 시책을 시달하면서 “금후 특종 품종을 농가에 강요할 때는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중문책 하겠다”고 밝혔다. 통일벼 품종을 권장해서는 안된다는 암묵적 지시였다.
농림부의 이 같은 태도에 새 볍씨를 개발한 농촌진흥청 측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농진청은 “통일벼가 다수확 품종이라는 사실이 입증된 만큼 재배상의 결점을 보완해 확대재배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입장을 강조했다. 농진청은 73년 1월24일 각 도 진흥원장과 기술보급과장, 농촌지도소장 등을 소집해 “각 시 군의 재배 적지를 선정해 통일벼를 재배하라”고 별도 지시를 내린다.
두 기관간 알력 속에 73년도 통일벼 재배면적은 전년보다 35% 줄어든 12만1000 정보로 조정돼 2차년도 재배에 나서게 된다.
재배 결과 73년도 통일벼 수확은 대풍작을 기록했다. 농진청의 예상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이 해 재래품종은 단당 350Kg을 생산한데 반해 통일벼는 481Kg을 기록, 37.4%나 증수됐다. 12만1천 정보의 통일벼 재배면적에서 110만2000섬의 쌀이 증산됐으며, 농가 순소득증가액만 226억원에 달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이 같은 대풍은 통일벼를 장려품종에서 제외했던 농림부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농림부는 특히 73년부터 단당 600Kg 이상을 생산하는 농가에 대해 10만원씩의 상금을 지원하겠다는 획기적인 시상제도를 발표해 놓은 터였다. 농림부는 600Kg 이상 생산할 수 있는 농가가 100여명선에 불과할 것으로 예상하고 이에 대한 상금만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런데 통일벼 대풍으로 600Kg 이상 다수확 농가가 총 3765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나자 3억6000여만원에 달하는 추가상금을 확보하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
이 해 통일벼 재배를 성공적으로 지도하면서 단당 780Kg이라는 사상 최고 수확량을 이끌어낸 농진청은 ‘쌀 3000만섬 돌파’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갖게 됐고, 74년 18만9000 정보를 대상으로 통일벼 3차 재배에 나선다.
74년 통일벼 농사도 대풍이었다. 이 해 쌀 수확량은 3086만섬을 넘어서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3000만섬을 돌파하는 신기록을 세웠다. 74년에는 600Kg 이상 다수확 농가가 2만9000명선으로 급격히 늘어나 정부는 30억원의 시상금을 준비해야만 했다.
통일벼의 대성공에 이어 75년부터 유신, 밀양23호, 수원264호, 노풍 등 신품종들이 잇따라 개발 보급되면서 75년 3242만섬, 76년 3596만섬에 이어 77년에는 4170만섬을 넘어서 사상 처음으로 연간 쌀 수확 4000만섬을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다.
8.15 해방 이후 수없이 겪어 왔던 미곡 부족과 쌀 파동을 근본적으로 극복하고, 비로소 ‘주곡 자립’의 문을 활짝 열게 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77년12월 농업진흥청을 방문, 뿌듯한 마음으로 “녹색혁명 성취”라는 휘호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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