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자유 게시판

何如歌, 丹心歌

페이지 정보

작성자 조규전50 작성일 2025-02-28 07:17 댓글 0건 조회 329회

본문

 

 

    何如歌, 丹心歌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진들 어떠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년까지 누리리다.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 있으랴.

 

위에 소개된 시조는 어디서 많이 들어 보았을 것이다.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 교과서에도 실렸던 시조이다.

왜 이 두 시조가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주게 되었는가는 대충 짐작은 가리라 본다.

 

고려말에서 조선조 초까지 그야말로 정권이 송두리째 바뀌면서 사회적 변화도 엄청나게

 가져온다.

산천은 그대로지만 그 산천을 벗 삼아 살아가는 백성의 우두머리가 전격적으로 바꿔지는 

세상에 던져졌다.

백성들은 졸지에 패망한 나라와 그 나라를 딛고 일어난 새나라에서 살아야 하는 상황에

 마딱뜨리게 된다.

고려 국에서 밥을 먹던 조선에서 밥을 먹던 먹는 밥은 똑 같았을는지 모르지만 정치세계에서는

 달라도 너무 다른 세상으로 가게 된 것이다.

 

이 시대에 가장 고심이 컸던 사람들은 일반백성들이 아니라 정치를 하던 고려시대 관료들

이었을 것이다.

정권이 바뀐다하여도 그 바뀐 정권을 이끌어가자면 인재가 필요한데 그 인재 풀은 당연히 

고려시대에 관료들 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권이 바뀌면 재빨리 갈아타는 귀재들이 있듯이 그 당시에도 몰락해가는 

고려를 일으켜 세우기는커녕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조선으로 갈아탔던 관료들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에 관료들 대부분이 고려에서 조선으로 백기투항하면서 조선의 인재풀은 고려에서 

넘겨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개념 없이 자신의 나라였던 고려를 버리고 조선으로 가버린 가운데 독야청청 빛을

발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정몽주였다.

비록 패망한 고려이지만 그 고려의 정신을 가장 잘 지킨 분이 바로 정몽주였다고 본다.

우리 역사상 이렇게 지조와 줏대를 제대로 지킨 분이 있었는지를 찾아본다면 그분이 

독보적인 존재라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관점은 달라질 수 도 있을 것이다.

시대가 바뀌고 사회가 변하면 따라가야 하는데 그걸 제대로 못 한 것은 너무 고루하고 

전근대적 사고방식에 젖었던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시조만으로 보았을 때 하여가를 읊은 이는 조선조 3대 와이었던 이방원이다.

물론 하여가를 지을 무렵은 그냥 이성계의 아들로서 조선건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서 

전쟁터나 정치판에서 뛰던 왕자였을 때이다.

이때에도 이방원은 고려의 정신적 지주나 마찬가지였던 정몽주를 껴안지 아니하고 조선의

 가치를 제대로 정립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고매한 정몽주에게 칼과 활을 휘두르던 이방원이 다짜고짜 조선 편으로 들어

오라고 한다 한들 말빨이 안 먹혀 들어가리라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방원 자신도 자존심을 구기지 않으면서 정몽주의 의향을 떠 볼 요량으로 하여가를

 지었을 것이라 추측해본다.

 

이방원의 하여가에 대한 답을 정몽주는 단심가로 회답을 주었다.

당시에 정치적 상황으로 보았을 때 하여가나 단심가를 주고받을 정도로 한가한 때는 

아니었으리라 본다.

죽기 아니면 살기식의 살벌한 정치 행태가 벌어졌었다는 것은 역사적 기록이나 당시에

 상황을 잘 묘사한 사극 드라마에서 보면 짐작할 수 있으리라 본다.

그런 가운데서도 정적끼리 그런 시조를 주고받았다는 것은 생사가 넘나드는 과정에서도

 서로가 인간적인 내면의 모습을 표출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본다.

 

단심가를 본 이방원은 결심을 하게 된다.

정몽주라는 인간을 자기가 껴안고 가기란 너무나 높고 고매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그렇게 위대한 정치가와 같이 한다면 자신들이 저지른 반란이자 역성혁명을

 합리화하는데 큰 기여를 할 수 있었으리라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몽주를 껴안는데 실패한 이방원은 개성의 선죽교에서 철퇴를 날려서 정적을 제거

하는 최강수를 두고 말았다.

두고두고 역사적으로 비난 받을 일을 자초한 셈이 된 것이다.

 

정치세계가 단심가나 하여가를 주거나 받거니 할 정도로 낭만적인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본다.

하지만 그런 냉혹한 세계에서도 시를 통하여 서로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경지까지 갔다는데

 대하여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정적을 반국가세력이라는 누명으로 계엄령이나 내리면서 국가를 혼란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얼빠진 작자들과는 격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