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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t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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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규전 작성일 2019-08-25 08:42 댓글 0건 조회 71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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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 too.

나는 아버지처럼 그렇게 안 살 꺼야.”

라는 구절을 시도 때도 없이 뇌까리면서 살아온 과거가 있었다.

그렇게 안 살고 싶은 당사자는 당연이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표상을 보면서 살아가는 아이었을 것이다.

먼저 살아가는 대상의 많은 부분은 부모가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이라 본다.

자식의 입장으로 보았을 때 부모가 대단하다고 느낄 경우도 있겠지만 일부의 자식들은 미래의 삶에 배척 대상이 될 수 도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보면서 크고 자라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본다.

많은 사람들은 배워서 인간이 된다고 하는데 옛날에는 배움이 없어도 다 인간생활을 했다고 본다.

결국 배우지 않아도 먼저 살아가는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이 커 나가는 사람들에게는 배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배움에 대상이 아니라 배척의 대상이 되는 삶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선대가 살아가는 모습대로 안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대목인 것이다.

요는 선대처럼 안 산다고 외치는 모습에 누가 나무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젊었으니까 당연이 구질구질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선대의 모습이 마뜩찮을 수 도 있을 것이다.

더 나은 생각과 행동을 가지고 미래를 열어가겠다는데 말릴 장사 그 누가 있겠는가?

 

필자는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연이 내 밑에 동생들이 줄줄이 태어났다.

전통적인 삶을 살아갔던 시골 생활은 누구나 비스무리 했을 것이다.

때가 되면 밭을 갈고 씨 뿌리고 김매고 수확하는 과정을 되풀이 하던 시절이었다.

더 쉽게 표현한다면 젊은 날에는 농경문화에 일상에 그대로 젖었던 시절이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농경문화의 종결점은 농삿일보다는 그 위에 상징적으로 이루어지는 관혼상제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 중에서 매년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제례는 집안에 큰 행사로 자리매김 되었었다.

제사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가까운 촌수와 관련된 사람들임으로 소홀히 바울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고 본다.

 

당시 필자의 아버지도 장남이었던 관계로 우리 집에서 제사를 바웟었다.

없는 살림에 제물을 마련하기 위하여 우리 어머니는 상상을 넘을 정도의 고충을 겪으셨다.

그 이야기를 다 하자면 끝도 한도 없을 것 같기도 하기에 미래의 과제로 남겨두려 한다.

 

제가 때가 되면 우리 아버지가 밤을 까셨다.

지금 같으면 시장에서 하얗게 까서 진공포장 된 완제품을 사다가 쓰지만 당시에는 그런 것은 없었기에 죽으나 사나 직접 까 쓸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철이 들면서 나도 아버지를 따라 밤을 까고 깎기도 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나중에 우리 아버지처럼 저렇게 밤 까고 깎는 일은 하지 않을꺼야를 속으로 뇌까리면서 작업을 하였다.

 

시간이 많이 지나고 우리 아버지도 저승으로 가셨다.

자연스럽게 제사도 내 몫이 되었다.

어느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준비를 하던 어느 시점에 필자가 신문지를 펼쳐놓고 밤을 까고 있었다.

내가 제사 때 밤을 까지 않겠노라고 다짐을 한 게 엊그제 같았었는데 세월이 지난 어느 순간에 내 자신이 밤을 까고 있더라는 것이다.

 

물론 지금도 제사 때면 필자가 밤을 깐다.

우리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까는 밤은 색다른 맛과 멋과 추억을 동시에 주기도 한다.

과거에 내가 외쳤던 나는 아버지처럼 그렇게 안살아.”가 머쓱하게 허언이 되어버린 지금의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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