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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입식 교육으로는 장사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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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입식 교육으로는 장사가 안 된다.
일전에 모처에 교육을 받으러 갔었다.
맨날 가르치는 일에 치중하다가 역을 교육을 받아보니 새로운 느낌도 들어간다.
가르치는 것도 힘들지만 배우는 것은 그와 못지않게 힘들다는 것도 함께 느껴진다.
필자는 교육을 받으러 가면 초반부에는 일정시간을 잠으로 할애한다.
강사들의 강의는 초반부에 흥미를 일으키기 위하여 본 강의와는 좀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기에 그 시간대에 잠을 좀 자 놓으면 본론에 맨 정신으로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충실하게 강의를 들으면 좋겠지만 그 또한 많은 체력과 정신력이 소모되기에 용이치는 않은 것 같다.
그 강의에서 본질에 벗어난 이야기 중 충격적으로 뇌리에 스친 대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강사가 이야기 한 것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강의를 듣는다는 것은 어떤 목적과 필요성이 있는데 그 속에는 창의성이란 양념이 곳곳에 들어가 있어야 제 맛이 난다는 것이다.
잘 하는 강의는 창의성이 의도적으로 묻어나게 하는 것인데 유독 그런 방향에서 강의를 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독일의 사례인데 그 나라에서 창의성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한 강의가 운전면허에 관한 강의라고 한다.
운전면허와 관련된 강의는 창의성의 개념은 뒤로 하고 오로지 주입식, 획일식, 일제식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운전과 관련된 강의내용에서 창의성이 발휘되면 별 특이한 운전법이 다 나와서 교통이 엉망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곧이곧대로 가르쳐 준대로 규정이나 규칙을 절대 벗어나서는 안 되는 식으로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당연한 말씀 같았으면 실제적으로 그런 식으로 교육이 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고 인식되었다.
그런데 운전면허와 관련된 강의만 주입식, 일제식, 획일식으로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생각도 들어간다.
어떤 지식이나 식견, 경험을 타인에게 집어 넣어주는 교육 중에서 창의성이나 독창성이 발휘되면 엉망으로 되는 분야가 있다.
바로 종교교육이 아닐까 싶다.
절이나 성당, 교회 같은 곳은 스님이나 신부, 목사와 신도 간에 단상이란 도구를 통하여 확실한 선을 그어주고 있다.
그리고 신도들은 획일화 된 의자에 종교마다 제시된 부동의 자세로 설법이나 설교를 들어야 한다.
거기에 반문이나 의문, 질문이 좀해서 용납되지 않으리라 본다.
법문이나 성경, 코란의 내용이 절대적이라는 것은 상식이 아닐까 싶다.
이런 곳이 또 하나 있다.
군사 교육이다.
신병교육이나 예비군교육을 가 보면 교관이 입에 침을 튀겨가면서 가르치면서 시범을 보인다.
들어보면 틀린 말도 있고 맞는 말도 있다.
하지만 이 교육에서 토를 단다거나 함부로 질문을 하면 재미없어지는 광경을 만나게 된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창의성이나 독창성은 용납이 안 된다.
실제로 일반 병사는 굳이 창의성이나 독창성을 발휘할 이유가 크게 없는 것이다.
막말로 전쟁이 났는데 군사가 배운 대로 전쟁을 하지 않고 멋대로 움직이다 큰 코 다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해서 군사교육시간에는 눈동자도 멋대로 굴리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통제를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학교교육은 어떤가?
전자에 제시했던 몇 가지 통제된 교육의 예와는 정 반대로 나가야 하는 곳이라 본다.
아이들에게 한 가지를 가르쳐도 그 가르침이 미래에 무한한 가치와 상상력을 불어 넣을 수 있는 교육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교사가 가르친 지식이 곧 법이요 교리가 된다고 한다면 그것을 배운 아이는 그 이상에서 생각하고 상상하는 능력은 떨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일제식, 주입식, 획일화 된 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교사는 그렇게 가르쳐야 자신의 존재가치가 높아진다고 인식되고 있다.
교사 자체도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당연히 교육은 교사가 가르쳐 준 대로 듣고 받아 적고 외우고 시험 쳐야 정상인 것으로 각인이 된 것이다.
이런 교육의 발원은 일제강점기에 교육, 그 이후 군사문화와 유신시대에 강압과 억압의 시절 등을 겪으면서 더 공고화 되었는지도 모른다.
학교현장에서 이제는 그런 구태의연한 교육방법을 탈피해야 한다고 본다.
인구절벽의 시대가 오고 있다.
태어나는 아이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적어지는 마당에 이들을 키워 단순노동이나 시키는 교육은 우리의 희망을 스스로 꺾는 행위일 것이다.
가르치는 방법이 바뀌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개개의 아이들에게 창의적이고 독창적이면서 천부적인 능력을 발휘하게 할 것인가를 깊게 성찰할 수 있는 교육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미래를 열어줄 수 있는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 선생의 마인드부터 바꿔야 할 것이다.
내가 그렇게 배웠으니 그렇게 가르친다는 논리를 가진 자라면 미래를 내다보는 아이들 교육에는 적합지 않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가가 대두된다.
많은 교육학자들이 무수히 많은 교육방법 이론을 만들어 놓았다.
너무나 좋은 방법들이 특허료 없이도 맘껏 쓸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자기체질과 학생들의 수준과 능력에 맞는 교육법은 지천에 깔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떻게 내 것으로 만들어 적용하느냐가 교사가 풀어야 할 과제인 것이다.
하루아침에 교사 자신의 교수법을 바꾼다는 것은 용이치 않은 문제라 본다.
하지만 앞으로의 교육에서는 주입식, 강압식, 획일화된 교육 방법으로는 장사가 안 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면서부터 출발하여야 할 것이다.
현재와 같은 교육방법을 어떻게 탈피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자신의 체질에 맞는 교육방법을 구안하여 적용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교사가 들어가는 교실만큼은 교사 고유의 영역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 우리나라 교육 방법의 근간이다.
자신이 들어가는 교실에서 배우는 아이들의 능력을 최대한 높여줄 수 있는 다양한 교육방법을 가진 교사가 환영을 받을 것이다.
어떤 교실에 들어가 보면 엎드려 자는 아이들이 태반인 곳이 있다.
자신의 수업시간에 잠자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은 수업방법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빨리 인식하고 새로운 수업기법을 도입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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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해오락님의 댓글
해오락 작성일조규전 후배님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분야별 교육방법론을 언급 하셨는데, 타종교는 모르겠으나 기독교 교육은 단상중심으로 하는 케리그마 (선포)식으로 하는 설교도 물론 있지만, 질문과 토론 디스케션을 통한 클래스 교육은 다양성을 띤 교실교육입니다. 神學은 시대적 콘텍스트를 배경으로하는 트랜드 이기 때문에 주입식 교육이 아니고 열린 창조교육임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