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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질 먹으러 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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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권오원 작성일 2007-05-02 10:03 댓글 0건 조회 79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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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이야기

내가 태어나고 자란 江陵 沙川지방의 아름다운 歲時風俗중에 하나가 “질”이였는데, 당시에는 나라의 기둥산업이 벼농사였고, 이 벼농사에 시골 농가에서는 온힘과 모든 정성을 다 쏟아 바쳤으므로, 벼농사는 모든 농사일의 중심이였고, 벼농사의 豊凶에 따라 한 집안과 나라의 경제가 좌지우지 되던 그런 시절이였네.

節氣로는 端午가 지나고 여름방학 때 쯤이면 세벌 짐(김)을 거의 끝낼 때인데, 짐이라면 논의 벼 포기 사이 사이에 끼어 자라는 잡초를 제거하는 일로, 이때에는 초벌, 두벌, 세벌짐을 끝 낼 때이므로, 이시기를 고비로 벼농사에 들어가는 노력은 수확할 때 까지 거의 끝이 나는 시기이네. 이렇게 힘든 일을 한 후에 그 노고를 동네 사람들이 한데 모여 서로 치하하고, 먹고, 마시며 한 이틀을 흥겹게 즐기는 마을 잔치가 ‘질’이였네.

농사란 그 일이 논 농사건 밭 농사건 어디 쉬운 것이 있으리오 마는, 특히 벼농사는 논의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서 시작되는 가래질 –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를 하여 부실해 진 논두렁을 논흙으로 다시 싸 바르는 일 - 에서 수확에 이르기까지, 이른 봄에서 늦가을 까지 꼬박 일년이 걸리는 긴 과정이라네. 이런 과정의 현장을 보고, 겪고, 때로는 적은 힘이나마 직접 참여하면서 자란 탓으로, 지금도 밥 한 알의 귀중함을 아주 소중히 여기고 살고 있다네. 자식들이 어렷을 때 함께 밥을 먹을 때는 꼭 이 사실을 명심하도록 타 이르고는 했는데, “이 밥 한 알의 값은 아주 보잘 것 없지만, 이 밥 한 알이 이 밥상에 올라오는데 꼬박 일년이 걸렸다. 그러니 그 가치는 그 무엇으로도 가늠할수 없을 만큰 크니 부디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하고는 했다네.

가래질을 끝내고 모를 심을 때 까지의 논에는 골벵이<골뱅이>가 至賤으로 자라서, 이를 줏어다가 삶은 후에 까만 똥집과 껍데기는 버리고, 희고 까만 살 부분을 여러번 씻고, 또 씻어서, 새콤 달콤한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참, 그맛 그만이였다네! 春窮期에 골벵이는 시골 농촌의 훌륭한 동물성 단백질 공급원이였으며, 또 가을에 벼베기가 끝나면 – 벼를 벨 때는 논물을 다 빼는데 – 윗논에서 아랫 논으로 물이 흘러드는 물줄기로 아랫 논에 파인 조그만한 웅덩이에는 용고기 (미꾸라지와 같은 種이거나, 같은 科로 생각되는 비슷한 모양에 크기는 작은)가 바글바글 한데, ‘물 반 고기 반’이라고 하는 표현은 고기가 많을 때 쓰이는 말이지만, 이 때의 광경은 고기가 너무 너무 많이, 한군데 모여 우글거리기 때문에 징그럽다고 느껴질 정도인데, 이 용고기는 가을철 훌륭한 추어탕의 원료가 되기도 하였다네. 비료, 농약, 살충제등을 쓰지 않은 농사였으니, 지금의 시각으로는 ‘親環境營農法’인 셈이였지.

(모를 심을 때 까지 잠시 숨 고르기를 하는 이 논畓 저 논에는 어디서 날아 왔는지 새하얀 白鷺가 그 커다란 껑충하게 위로 붙은 다리로 성큼 성큼 그러나 조용 조용히 여기저리를 옮겨 다니면서 무엇인가 열심히 줏어 먹는데, 이런 모습은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흙빛의 山野가 온통 파릇 파릇한 봄 氣運에 한껒 취하고 아지랑이에 푹 빠져, 졸립고, 나른한 시골 농촌의 한나절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내고는 하였는데, 이 큰 새는 이 고요함와 나른함을 그 큰 날개로 후두두둑 날아 오르면서 깨어 버리고는 했다네.)

마지막으로 하는 세벌 짐매기는 여간 고역이 아닌 것이, 이맘 때 쯤이면 벼 포기가 어른 배꼽 높이만큼 자라서 엎드려 잡초를 제거하자면 벼포기의 끝에 눈이 찔리랴, 벼포기가 무성해서 아래는 잘 보이지 않지, 햇볕은 쨍쨍 내려 쪼이지, 등에서는 뜨끈 뜨끈한 끈적거리는 땀이 비오듯 흘러 내리지, 그마리(거머리)는 달라붙지, 간혹 물뱀이라도 있을라치면 식은 땀을 흘려야지, 하루 종일 허리를 구부리고 해야 하는 일이다 보니 허리는 끊어 질 것 같은 艱難과 辛苦의 시간과, 노력에, 정성을 다 했으니 어찌 농사일이 전부인 사람들에게는 축복해야 할 잔치가 아니였겠는가?

행정구역으로는 사천면 方洞里 노가매골(老釜洞)인 우리 마을이라야 고작 30여호의 아주 작은 마을이였고, 머슴(우리집에서는 아저씨라고 호칭)을 두고 농사일을 하는 집은 우리집을 포함하여 큰댁과 두집이였는데, 농사일에 필수인 소를 기르는 집도 너댓집 정도로 호남이나 영남의 곡창지대 기준으로는 셈에도 들지 못하는 그런 수준이였지만, 작은 규모의 농사만큼이나 인심은 아주 무던했다네. 그래서, ‘고샅’이라는 단어는 朴景利의 소설‘土地’ 를 비롯한 여러 책에서 익힌 말로, 우리 마을에서는 이 말은 쓸수 없을 정도로 마을의 家家戶戶는 뚝뚝 떨어져서 띄엄 띄엄 한집씩 있었다네.

동네 어른들이 적당한 날을 잡아 ‘질’날을 정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우리집 뒤에 있는 나이를 가늠할수 없는 몇백년 된 밑둥이 어른 두서너사람들이 벌린 팔 길이 만큼이나 큰 소나무 가지에 그네를 매는 일이였는데, 저녁 나절에 어른들이 볏집으로 튼튼하게 꼬아서 15미터 정도 높이에 매는 이 그네는 거의 한달여 동네 꼬맹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하지만 간혹 늦은 저녁시간에는 동네 처녀.총각들의 모임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네. 사실 그 시절에는 우리 꼬맹이들한테는 놀이 시설이 전혀 없었던 시절이였으므로, 이 그네는 일년에 한번씩 찾아오는 각설이 처럼 꼬맹이들한테는 엄청난 큰 선물이였다네! 사실, 우리 꼬맹이들은 장난감을 모르고 자란 그런 세대들이 아닌가!

(긴^^긴 겨울밤 전기도 없던 시절 바깥 어른이 出他한 집의 舍廊은 가끔씩 동네 꼬맹이들의 놀이방이 되고는 하는데, 놀이중에 어떤 녀석이 방구(귀)를 뀌고 싶다는 신호를 보내면, “야, 야, 쪼끔 있다 꿔, 응, 쪼끔 참아, 쪼끔만” 하며 부랴 부랴 성냥을 준비하고, 이녀석은 방구가 바지속으로 새지 못하도록 바지를 앞으로 바짝 댕겨 살에 착 붙도록 잡는 것과 동시에, “야, 야, 됐다 됐어, 이제 꿔바, 꿔”, 하면 녀석이 뿡 뿡 뿌우웅 하고 그동안 참았던 방구를 시원하게 토해 내자마자 궁뎅(둥)이에 성냥불을 그어 대면 펑 소리를 내며 불이 확 붙어 오르는데……. 모였던 꼬맹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깔깔대며 배꼽을 움켜 쥔다네. 다행이 몇 녀석이 번갈아 가면서 방구를 꾸어 대면 그날의 놀이는 큰 성공를 거두는 셈이지………!)

(시골 꼬맹이들은 이렇게 몸으로 겪으면서 배우고 자란다네.)

‘질’ 날에는 피리, 꽹가리, 징, 북등으로 구성된 農樂隊가 ‘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큰 깃발을 앞세워 동네를 고루 고루 돌며 요란스럽고, 신명나게, 놀아대면, 동네에서는 집집마다 ‘아, 이제 상차릴 준비를 해야 하겠구나’ 하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그 동안 정성스럽게 준비한 음식을 지고, 이고, 들고 우리집 뒤에 그네를 매 둔 넓은 터로 한집 두집 모이기 시작한다네.

그 넓은 그네 터는 마을에서 좀 높은 언덕에 위치해 있었으며, 꼬맹이들이 가끔 새끼를 꼬아 만든 공으로 공차기를 하는 장소로도 이용되기도 했는데, 전날에 쳐 놓은 여러 개의 遮日이 해를 하얗게 가리고, 마을 멍석들이 빈틈없이 깔려진 자리로, 우리집에서는 매년 동네 어른들을 위해 준비한 甘酒가 옮겨지고, 우리 큰 댁에서는 막걸리가 옮겨지고, 현장에서 뜨겁게 준비해야 하는 음식을 위한 불이 지펴지고…… 그래서, 음식을 지지고, 붙이고, 끓이고, 굽느라고 이날은 온 동네가 구수한 음식 냄새로 가득 찬다네. 우리 같은 꼬맹이들은 농악대 뒤를 졸졸 따라 다니기도 하고, 심부름을 하기도 하며, 괜히 신명이 나서 그저 싱글 벙글거리며 덩달아 분위기에 휩쓸려 그저 좋아했다네.

이날만은 농사를 짓느라고 그동안 애쓰고, 고생하고, 마음을 쓴 농사일에 직접 참여하신 어른들의 날이기 때문에, 우리집에서는 아저씨에게 새옷을 한벌 해 드리고, 점심 때 쯤에는 아저씨 가족들도 꼭 참여하라는 당부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네. 질床은 집집마다 주부들의 솜씨를 한껒 뽐냈지만, 어린 눈에는, 우리집에서 차린 아저씨를 위한 질상은 해마다 으뜸이 아니였나 하는 생각이였다네. 가로 세로가 1x1.5m 쯤 되는 붉게 칠을 한 床에 상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올려 놓은 음식상을 집에서 그대로 들어서 옮겨 오기 때문에 들고 오는 이들이 고생은 해도, 이상을 받는 우리집 아저씨는 늘 만족해 하는 그런 표정이였다네.

우리집 질상의 백미는 뭐니뭐니 해도 白熟인데 그때만 해도 닭을 통째로 한사람이 먹는다는 것은 焉敢生心 꿈이나 꿀 일이 였는가? 붉은 벼슬을 그대로 인 이 백숙위에 빨간 실고추, 파를 송송 썬 채, 계란을 붙여 썬 노란색의 채, 채로 썬 새까만 石耳 버섯등으로 모양을 내서 상 한가운데에 터억 놓으면 아주 압권이였다네. 2003년에 全南 康津에서 난생 처음으로 南道定食을 먹은 적이 있었는데 산해진미가 따로 없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는 어른이 된 후의 이야기이므로 꼬맹이 때에 내가 보았던 이 질상은, 참으로 호화로운 천하에서 가장 먹음직스러운 잘 차린 음식상이였다는 생각이였다네. 이 백숙은 아저씨도 감히 손을 대지 못하시니 다른 사람들이야 넘 볼수가 있었겠는가? 해서, 아저씨 아주머니가 다른 음식과 함께 집으로 싸 가셨지. 아버님께서는 이날만은 점심을 집에서 드셨다네.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에서 살기 시작 할 때 까지 우리집에는 세분의 아저씨들이 거쳐 갔는데, 한분은 6.25 한국전쟁 때에 인민군에 끌려가서 생사를 알수 없게 되었고, 한분은 몇 년인가 계속해 있어서 받은 새경<私耕>을 아끼고, 長利도 놓고 하여 나중에는 自作農으로 독립을 하였고, 또 한분은 먼 일가친척으로 아직도 생존해 계시던데……..

일꾼들의 고용은 보통 일년기간으로 하며 먹고, 자고, 입혀주고, 담배를 비롯한 막걸리는 늘 준비되여 있어야 하며, 서로간에 정한 새경(기억으로는 쌀 10가마 정도)은 가을 추수가 끝나면 주고 받는데, 새경을 주고 받으면 공식적인 고용기간은 끝이 나는 거네. 어떤 일꾼들은 새경으로 받은 일년치 년봉?을 긴 겨울동안 노름을 해서 몽땅 잃고는 한다는 소리가, “뭐, 한 일년 늦게 태어난 셈 치지”했다고 해서 동네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는데, 이처럼 이때에는 農閑期에 시간 보낼 꺼리가 참 마땅치 않았다네.

농사일이라는 것이 지금도 그렇겠지만 아침을 먹기전까지 하는 새벽일이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컷었다네.

“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해놈은 상기 아니 일어났냐
재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냐.”

위의 시조에서처럼 동녘 하늘이 희 뿌옇게 黎明이 트기 무섭게 농촌의 하루 일이 시작 되는데, 이런 일에는 늘 집에서 빚은 막걸리가 제공되네. 아저씨가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을 할라치면 나는 가끔씩 이 막걸리 심부름을 하고는 했는데, 이때 아저씨의 권유?로 찔끔 찔끔 한두모금 맛 보았던 막걸리가 내가 술을 배운 계기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라네.

벼농사가 기본인 시절이다 보니, 내 기억으로는, 모내는 일에, 물론 더 올라가면 볍씨를 담그는 일이 되고, 가래질이 되기도 하겠지만, 일꾼들에게 쏟는 정성은 참으로 지극했다는 기억인데, 아무리 살림이 어려운 집일지라도 이날만은 꼭 삶은 빨간 팥을 위에 얹은 흰 쌀밥을 대접한다네. 좀 여유가 있는 집이라면 당연히 고깃국에 꽁치구이(이때가 꽁치철이였지)가 곁들어 지기도 하는데, 흰쌀밥위에 얹은 빨간 삶은 팥과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흰밥의 흰색은 그렇게 대비되는 색갈의 아름다움일수가 없었다네. 우리나라의 歲時飮食에는 꼭 빨간 색의 팥이 들어가는데, 동지 팥죽이 그렇고, 보름 오곡밥이나 약밥이 그렇고, 告祀용 시루떡이 그런데, 이는 붉은 색을 싫어한다는 귀신들의 習俗에 유래하여 逐鬼의 상징성이 있다고 하네.

(중국사람들은 빨간 색과 황금색을 모든 색중에서 제일 좋아하는데, 개업을 할 때에는 반드시 붉은 색의 천에 황금색으로 글씨를 쓰는 것이 기본이네. 붉은 색은 繁榮과, 發財와, 惡鬼를 쫒는 의미가 있다고 하는데, 우리들이 慶事에 쓰는 흰봉투 대신에 그네들은 붉은 색 봉투(紅包:홍파오)를 쓰는데, 이 홍파오는 보통 ‘囍’자를 가운데 넣고 양 옆으로는 용을 황금색으로 무늬했는데 설날 같은 즐거운 날에 세뱃돈을 넣어 줄 때 쓴다네. 중국의 國旗를 ‘우싱홍치五星紅旗’라고 부르는데, 붉은색 바탕에 황금색 별이 다섯개가 있지 않는가. 언젠가 한국의 한 중소기업인이 중국 현지에서 합작공장 준공식을 준비하는데, 흰천에 검은 글씨로 쓰자고 고집하는 바람에 일을 그르쳤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네)

이런 점심을 이고, 지고, 들고 점심때에 모내는 곳에 도착하면, 일꾼들은 얼른 얼른 대강 대강 논물에 손발을 씻고 잘 차려진 점심상 주변에 죽 둘러 앉으면, 보통 年長者이거나 집주인이 꼭 밥을 한숟가락 떠서 고시네<고수레>를 한다네. 고시네를 하면서 늘, “금년에도 풍년이 들게 해 주십시오” 하면서 地神에게 먼저 禮를 올리는 의식이 끝나자마자, 볼이 미어 터지게 즐기는 점심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저절로 침을 꿀꺽 삼키게 한다네. 밥숫가락 하나 가득 꾹꾹 눌른 흰 쌀밥이 목줄대를 타고 꿈틀거리면서 내려가는 모습은 저렇게 잡수시다가 체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할 정도였다네. 이때에 본 광경중에 하나는, 그마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일꾼들의 장딴지에 붙어서 피를 빨아 먹어 탱탱하던지 건드리기만 해도 툭 떨어지는데, 꼬맹이들은 이 떨어진 그마리를 가운데에 아주 작은 나뭇가지를 넣어 속을 뒤집어서 햇볕에 말리는데 이때 피가 어떻게나 많이 쏟아지던지!

모내기 하는 날이 꼬맹이들에게 특별히 다가오는 즐거움은, 우리집에서는 보통 소여물을 끓여주는 바닥이 아주 너른 무쇠 가마솥에 몇십명분의 밥을 하기 때문에 자연히 누룽지(소딖기 또는 소꼴기로 부름)가 가마솥 바닥에 아주 두껍게 만들어 진다네. 노릿노릿하게 잘 구워진 두껍고 둥그런 소딖기를 한번 상상해 보게! 아주 훌륭한 간식꺼리라네. 그 시절에야 명절이나, 제사 때나, 어른들의 생신에나, 또는 특별히 떡을 해 먹을 때를 제외하면 뭐 간식 할 때나 꺼리가 그리 흔했는가? 

그 시절에는 모든 농사일이 人力으로 이루어 졌기 때문에 한 사람의 인력이 곧 한사람의 품이 되므로 꼬맹이들도 거들일이 있으면 꼭 거들어야 하는데, 모내기 때에는 못줄을 잡아주거나, 모판<苗板>에서 일꾼들이 미리 쩌 놓은 못(모+ㅅ)단을 쓰래질(논.밭을 간 후에 평평하게 고르는 일) 한 논의 여기저기에 옮겨 놓기도 한다네. 옮겨 간 못단은 한자리에 서서 여기저기로 적당한 거리를 가늠하여 던지는데, 멀리 또는 가까이 던지자면 다소의 기술이 필요하다네. 모판에서 모를 찔 때 어려운 점은, 모 뿌리에 붙은 흙의 양을 조절하는 것인데, 흙이 많이 붙으면 못단을 들고 모내기 할 때 3-4개의 모를 떼어내는데 시간이 걸리고, 흙이 너무 작게 붙으면 땅에 꽂기가 쉽지만 물에 뜨기가 쉬운 점이였다네.

모내기의 손놀림이 어찌나 빨랐던지 ‘재봉틀’라는 別號를 가진 이형재라는 분은 모내기 철만 되면 가장 잘 팔리는 일등 모내기 꾼이였었는데, 모내기의 가장 중요한 점은 너무 깊이 꽂으면 자칫 물에 잠겨 썩을 염려가 있고, 너무 얕게 꽂으면 着根도 하기전에 물에 뜨게 되니, 한번에 3-4개의 모를 한 포기로 해야지 너무 많은 양이면 성장과 가지치기에 부적합하다고 하더군. 

인류가 한 곳에 정착해 살면서 農耕文化의 기틀을 잡아나가는데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이 다른 무리들과의 싸움에서 이기거나 방어를 잘 하는 일이 였는데, 이를 위해서 집단화가 필요했고, 이 집단화는 部落을 형성했으며, 이 부락은 相扶相助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는데, 지금의 기계화된 농사일과는 달리 모든 농사일이 인력에 의지해야 했던 그 시절에는 내집 일이 곧 마을의 일이였고, 마을 일이 곧 내집 일이였으므로, 온 마을의 벼농사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모를 내고, 비슷한 시기에 벼를 수확하는 그런 형편이였다네. 우리집의 모내기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같이 일을 했다는 기억인데, 다른 집의 모내기에도 당연히 모두 모여서 함께 일을 해주는 품앗이로 되 갚음을 하지만, 일의 양이 많은 집과 적은 집과의 차이는 품삯으로 해결했다네.

질을 먹는 날(흔히 이렇게 불렀지)을 내가 좋아했던 이유중에 하나는 이 날만큼은 소에게 풀을 먹이러 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네. 아저씨가 질날과 다음날 소가 먹을 꼴(풀)을 미리 베어 놓았기 때문인데, 언제부터 여름방학에 소에 풀을 먹여야 했는지는 기억이 확실치 않으나, 국민학교<초등학교> 5-6학년이였지 않나 하는 생각인데, 친구들은 오후에 모두 동해 바다나 사천내<川>에 물 장난하러 가는 게 그렇게 부러울수가 없었다네. 우리 마을에서는 소의 효용이 봄에 밭갈고, 논갈고, 쓰래질을 하는 일이 거의 전부였는데, 달구지는 전혀 쓰지 않았으니 소는 봄 한철을 위해서 일년을 길러야 하는 형편이였지. 하지만, 논.밭갈이는 거의 매번 深耕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아주 힘든 일이여서, 소에게는 때때로 삶은 콩이 특식으로 주어지기도 했다네.

질 먹은 이튿날은 마을 어른들이 모두 사천해수욕장에 해수욕을 하러 갔다네. 東海는 빤히 보이는 곳에 있기는 해도 걸어 가기에는 좀 먼 거리여서 우리마을은 主業이 농업이라 漁村이 아닌 農村이였지만, 심정적으로는 아주 至近거리였기 때문에 우리 꼬맹이들한테 이 동해는 여름방학만 되면 훌륭한 놀이터가 되고는 했다네. 그 때만 하더라도 公害라는 말은 쓰이지 않았고, 또 소금이 귀했던 시절이였으므로, 어느 해 김장철에는 배추를 동해 바닷물에 그대로 저려오고는 했다네.

근래에 정치한다는 사람들이 입만 열었다하면 ‘相生’ 어쩌구 저쩌구 하는데, 상생은 입으로 외치는 구호도 아니고, 길거리에 내 거는 懸垂幕도 아닌데, 상생문화의 뿌리는 이런 농경사회가 그 嚆矢였고, 또 상생은 상부상조와 공동체 의식이 기본 이념으로 정치한다는 사람들의 입발린 소리와는 처음부터 차원을 달리했다네.

서울에 올라와 공부를 더 하고 삶의 터전을 잡고 산지가 내년이면 50년이 되지만, 어린 시절에 겪었던 이런류의 마을잔치는 생각할수록 눈물이 핑 도는 참 아름다운 풍속이네만, 매년 그네를 매던 집뒤에 하늘을 찌를듯이 우뚝하게 서 있던 그 큰 소나무와, 그 소나무와 경쟁하듯이 鬱鬱蒼蒼하게 자라던 아름드리 다른 소나무들은 지난 1998년 2월에 강원 嶺東에 일찍이 역사에 기록될수 없었던 크나 큰 산불로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고향집과 어린시절의 현장들과 함께 아주, 깡그리, 몽땅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네.

산업화에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도시화와 그에 따르는 人口過密化로 ‘農村’마다 ‘老人村’이 된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여서, 내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도 그렇게 시끌벅적하고 질펀하게 먹던 질도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고, 이제는 60代를 훌쩍 지나 古稀를 코 앞에 둔 그때 그 꼬맹이들의 머릿속에만 들어 있는 이야기꺼리가 되어 버렸네!

마을 꼬맹이들이 눈만 뜨면 어지럽게 뛰어 다녀 반질반질하게 닳아 진 길에는 잡초가 대신 들어섰고, 시멘트로 포장된 新作路에는 耕耘機와 자동차들이 주인이 되었으며, 燈盞 대신 전기불로, 우물물 대신 수돗물로, TV를 보며, 전화를 쓰고, 자가용으로 나들이를 하는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그 때 그 시절에 나누며 살던 그 情에는……….


夏 童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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