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자유 게시판

소요유(逍遙遊)

페이지 정보

작성자 소요거사 작성일 2007-06-13 10:05 댓글 4건 조회 694회

본문

0000000000031458035_%B3%BB%B8%F0%BC%FC4633F69696B94.JPG

북명(北冥)바다에 고기가 있어 이름을 곤(鯤)이라 하였는데 머리에서 꼬리까지 몇천리나
되는지 모를 정도로 컸다.
곤이 변신하여 새가 되면 붕(鵬)이라 하니, 한번 날개짓에 물보라가 3천리를 몰아치는데
바람을 타고 9만리를 솟아오른 다음 여섯달 동안을 쉬지않고 날아서 남명(南冥)바다에
이른다. 붕새의 눈에는 하늘은 그저 끝없는 푸르름만 보일 뿐이고 그의 앞길을 가로 막는
것은 이세상에 아무것도 없다.(薺諧集)

이 상상속의 동물에서 묘사된 거대(巨大)함은 '작은 세계에서 사는것보다 헤아릴수
없는 큰 세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는 통념상 인식의 초월에 대한 비유이다.
두 동물은 동일한 것이지만 바다에 있으면 물고기가 되고 하늘에 있으면 새가 되는
자유자재의 변화를 구사한다.
말하자면 세상에 지식인이던 아니던 모든 사람들이 가져야 할「사유(思惟)의 경계境界) 」
에 대한 지적이다.
이들은 어떤 일에도 좌우되지 않고 온갖 사람들과 얽혀 살지만 꺼리낌 없이 자유롭고
여유만만한 모습이다. 이들은 마치 붕새가 바닷물을 차고 푸른 하늘을 나는것 같아서
거침없이 세상과 공유(共有)하며 노닌다.
장자(壯子)는 이를 일러 소요유(逍遙遊)라 했다.

006%5B20030802000850%5D.jpg
소요유의 개념은 '존재(存在)의 이것과 저것으로
그 성립을 대비(對比)'
하지 않는다.
사물을 차별하지 않고 어떤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생성변화의 사상에 무한으로 순응해 가는 자유로운
정신을 말한다.
곧 일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자신도 하나의
자연(自然)으로 보고 작위(作爲)하지
않으므로서 그 속박을 벗어나는 것이다.
『하루살이 조균(朝菌)버섯은 무한겁의 세월이
얼마나 긴줄 모르고, 1만6천년에 하나씩 나이테를
더해가는 대춘(大椿)나무는 하루의 짧음을 모르니 길고 짧음에 누가 얽매일 것인가?
다만 자연과 동화되어 무하유(無何有:아무것 없음)의 향기에 취함이 가장 여유로운 삶』
이라고 壯子는 관조(觀照)한다.
결국 내적인 자유를 구가하여 유유자적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요유는 「여백(餘白)의 미(美)」에서 연유된다.
무엇이던 넘치도록 가득가득 채워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에게는 여유가 없다.
좀 모자라고 아쉬운 여백이 있어야 그로 인해 삶의 숨통이 트이고 생각의 공간이 열린다.

명필 왕희지가 동진(東晉) 신음땅에 살때였다.
큰 눈이 내렸는데 한밤중 잠에서 깨어나 창문을 열자 사방은 눈에 덮혀 온통 흰빛이였다.
그는 일어나서 뜰을 거닐며 좌사(佐士)의 '초은시'를 읊다가 갑자기 한 친구가 생각이 났다.
이때,그 친구는 멀리 섬계라는 곳에 살았는데 그는 서둘러 작은배를 타고 밤새 저어가서
날이 샐 무렵 친구집 문전에 당도했다.
그러나 무슨 생각에서인지 친구를 부르지않고 그 길로 돌아서고 말았다.
어떤 사람이 이상하게 여기고 그 까닭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흥이 나서 친구를 찾았다가 흥이 다해 돌아가는데 어찌 꼭 친구를 만나야만 하겠는가?"
(허균/한정록)
흥이란 즐겁고 좋아서 저절로 일어나는 감정이다.
그때 만약 친구집문을 두드려 마주앉아 담소하고 아침을 먹고 왔다면 그 흥은 많이 소멸 될
터이고 덜 채워진 여백으로 인한 여운은 맛볼수 없었을 것이다.
소요유는 바로 이 여백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터키작가 오르한의 <내이름은 빨강>은 「가치(價値)의 원근법(遠近法)」
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선험적(先驗的)으로 주어진 관념(觀念)의 세계를 그리던 화가는 '눈에 보이는 대로'의
풍경을 그릴수 없다
는 것이다.
소요유는 이미 얻은 경험에 의한 개념(旣成槪念:Preconceived idea)을 접고 어디서
무엇을 보느냐는 새로운 형태의 매카니즘(Mechanism)을 찾아야 한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함으로 존재한다'는 자연과 동화되기 위해서 필요한 자기
중심(自己中心)을 적시한 것이며 이것이 곧 소요유의 기본개념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0000000000033361247_%B8%F0%BD%C0%281%29.JPG
선현의 심오한 이치를 우둔한 범부(凡夫)가 어찌 그 끝자락이라도 깨달을수
있겠는가?
다만 옛사람들의 생각과 행적을 흉내내어 한갓 부끄러움을 조금이나마 감추려
노력할 뿐이다.

『나는 적은돈으로 배 하나를 사서 그 안에 고기그물 너댓개와 낙싯대 한두개를 갗우어
놓고 또 술과 잔과 소반을 준비한후 호젖한 강가에 방 한칸을 만들어 따스한 온돌을 놓고
싶다. 늙은 아내와 심부름 할 아이 하나를 이끌고 물에 떠 다니면서 오늘은 어떤강에서
낙시질하며 그 다음날은 또 어떤 여울에서 고기를 잡는다.
바람을 맞으며 물위에서 잠을 자고, 물결에 떠 다니는 오리들 처럼 둥실둥실 흘러다니며
때때로 짧막한 시가(詩歌)를 지어 스스로 애애(愛哀)한 정회(情懷)를 읊고자 한다...』

다산(茶山)정약용이 태어난 고향인 소내(沼川)로 내려와서 가난하지만 낭만적이고
운취있으며 마음만은 넉넉한 삶을 꿈꾸면서 지은 「소상연파조수지가기」(沼上煙派釣수之
家記:소내강의 안개속에서 낙시질 하는 늙으니의 집)라는 글이다.
강위에 배를 띄우고 시가를 읊조리며 물가는 대로 떠다니는 강물위에서 생활하는 낙시꾼의
삶에서 소요유의 유현한 멋이 풍기지 않는가?

인생은 한조각 부운(浮雲)이다.
찬바람 소소한 늦은 가을날 아침 사창문발에 걸려있는 낙엽 하나와 같은 존재이다.
종래는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 내가 있을뿐-
소유했다고 생각한 그 많던 선지식은 한순간의 착각이였고 정해진 길따라 하릴없이 끌려
가는 한점 티끌이 나였음을 비로서 깨닫는다.

그리 멀지않은 남은 여정
소요유의 유유자적에 스스로를 맡기고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울수는 정녕 없는것일까?
붕새의 넓은등에 얹혀앉아 한잔술로 세상을 잊으며 내 이상을 찾아서 남명바다로 가고픈
욕망은 필부의 부질없는 한낱 허황된 꿈인가?





댓글목록

profile_image

조덕행님의 댓글

조덕행 작성일

  참으로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종래는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 내가 있을뿐 "
항상 가슴에 새겨둔 글귀인데 소요거사님의 명필을 접하니
더 더욱 가슴에 선명히 새겨지는것 같습니다.
 여백의 미학도 다시한번 새겨 봅니다.
다시한번 선배님의 정성 가득한 글에 감사드림니다.

profile_image

김윤기님의 댓글

김윤기 작성일

  파악할 대상에 대한 관조(觀照)는 그 속성상 감상적이며 추상적이여서 신뢰할 진실성과 간직할만한 지속성도
없거니와 실현 가능한 현실성은 더더욱 찾기 어려운 피상적 개념으로 이해한다.
직관이나 관조는 인간의 동물적인 본능과 감각에 의존하는 경향이 너무 짙어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고 현실성과
논리적이고 과학적 근거를 중시하는 현대인들을 이해 시키고 설득 시킬만한 의미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장자의 관조속에 그려진 소요유 또한 중국인 특유의 황당한 소재와 모호한 물감으로 그려놓은 거대한 추상화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북명바다가 그렇고 남명바다가 그렇다.
곤이 그렇고 붕이 그렇다
그것은 창조주에 의한 천지창조를 능가하는 중국인이 만들어낸 신화로만 느껴진다.
그리고 이 거대한 그림을 걸어놓을 만한 거대한 집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장자는 네 마음속에 있는 집에다 걸어라 하겠지만
소요의 말씀처럼 나 역시 지인(知人)도, 신인(神人)도, 성인(聖人)도 아닌 소갈머리없는 범부이니 ---
소요유에 대한 장자의 관조속의 꼬랑지를 잡느니
차라리
소요유(逍遙遊)는 일상에 대한 일탈이라고 쉽게 단정해 버리고 말겠다.

profile_image

소요거사님의 댓글

소요거사 작성일

  관렴을 유추하여 사물의 속성이나 근원을 찾으려는 直觀이나 觀照는
감상적이며 추상적이여서 언듯 공허한 思惟의 한계를 벗어날수 없을지 모르나
그렇더라도 진실성이나 지속성마져 거부할 필요는 없을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철학적 수단이나 종교적 접근이 그로 연유되었고 또 그로인하여
한 사상의 맥으로 정돈되었기 때문이다.

장자의 소요유에 대한 우리의 살핌도 그런 맥락으로 접근되어야 할것이다.
비록 그 방식에 있어 비현실적이고 피상적 개념에 묻혀들었지만 오히려 그 모호함속에서
凡脫과 安心을 찾으면 되리라.
세상에 '분명히 확실한'저길은 어디에도 없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울수만 있다면
그나마도 곤이나 붕이라는 가상의 속에서 헤매여 봄도 나쁘진 않을듯-

소요유는
그래서 혼돈에서 정돈을 찾을수 있는 한 방편으로 여기고 넘어감이 좋을듯 하네.

profile_image

김윤기님의 댓글

김윤기 작성일

  무한한 사유부터 주어진 무한한 자유로 인해 무한한 번뇌가 불같이 일어나는 것이다.
무한한 공허가 어디로 부터 오는 것인가
무한한 사유로 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此에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함으로 존재한다'는 말씀 처럼 오늘은 그대와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소요거사께서 추구하는 소요유의 유유자적하는 삶이 소생 또한 추구하는 바이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