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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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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윤기 작성일 2007-06-11 07:54 댓글 2건 조회 59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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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에서 - 2007. 6. 10(일) 촬영

신 록

- 서 정 주


어이 할꺼나
아, 나는 사랑을 가졌어라.
남 몰래 혼자서 사랑을 가졌어라.

천지엔 이미 꽃잎이 지고
새로운 녹음이 다시 돋아나
또 한번 날 에워싸는데...

못 견디게 서러운 몸짓을 하며
붉은 꽃잎은 떨어져 내려
펄펄펄 펄펄펄 떨어져 내려

신라 가시내의 숨결과 같은
신라 가시내의 숨결과 같은

풀밭에 바람 속에 떨어져 내려
올해도 내 앞에 흩날리는데...
부르르 떨며 흩날리는데...

아, 나는 사랑을 가졌어라.
꾀꼬리처럼 울지도 못할
기찬 사랑을 혼자서 가졌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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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
어느 핸가 청담동의 한 화랑에서 열린 '시가 았는 그림전' 뒤풀이에 시인과 화가가 함께 어울리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비 오는 날 출출한 저녁이면 예사로이 이루어졌을 법한 이런 일도 예술 동네의 형편들이 각박해지면서
이젠 흔치 않은 일이 되었다.
불빛이 흐리고 천장이 낮은 집이었는데 그 자리에 미당도 계셨다.
무슨 일인가로 식사시간 전에 일어서는 내게 선생이 손을 들어
`아무리 바빠도 상머리는 한번 쳐다보고 가셔야제.`라며 앉혔다.
'상이나 한번 쳐다보고 가라'는 것은 바빠도 식사를 좀 하고 가라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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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이 물려진 다음 화가와 시인들이 서로 번갈아가며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여류 시인 한 분이 노래 대신 '국화 옆에서'를 낭송했다.
본인의 시가 낭송되는 동안 가부좌한 노시인이 뭐라고 중얼거렸다.
바로 옆자리의 내가 들으니 `귀좋다. 참 그 귀좋다......`였다.
누구의 귀(耳)가 좋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차례가 되어 시원찮은 솜씨로 가곡 하나를 부르고 앉는데
미당은 허리를 굽혀오며 `총각, 어찌 그리 창가를 잘도 허시요?`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 눈길이 형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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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노시인은 상당히 늦은 시간까지 몸체를 좌우로 보일락 말락 흔들며 가부좌를 풀지 않았다.
그 몸에서는 쉬임없이 요기 같은 것이 흘러 나오는것 같았다.
늙은 무당에게서인 듯 무기 같은 것도 느껴졌다. 그날 밤 나는 `귀좋다! 참 그 귀좋다!`라는 중얼거림에서
'화사집' -- 대학 때 읽고 소름이 돋았던 그 시집의 관능을 보았으며 총각이나 창가 같은 언어들 속에서
'질마재 신화'의 삼한(三韓)적 시간이 시인에게 고스란히 머물러 있음을 보았다.
서울하고도 번화한 청담동에 앉아서도 시인의 정신은 여전히 도솔천과 선운사를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화가 김병종의 화첩기행중에서 - 서울;효형출판,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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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이유는 언제나 또렷하다
함성을 지를 만큼 기쁘고 눈물을 흘릴 만큼 기뻐하는
그 기쁨의 상황과 이유는 항상 또렷한 것이지만
이슬처럼 마음을 적시는 평화로움은
언제나 고요한 물결처럼 잔잔하고 꿈결처럼 은은하여 어느때 어디로 부터 오는 것인지
아득하여 헤아릴 수 없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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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귀에 익은 소리로 네 어미는 너를 부를 것이다
너는 내 손에서 죽어야할 아무런 이유도 없고
여린 네 삶을 내 손안에서 구속할만한 권리도 어디에 있겠느냐
너에게 내린 네 삶터인 자연속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네 어미의 깃털을 감싸안고 따뜻한 네 어미의 젖을 먹으며
섬뜩한 독사의 눈을 피해
너도 어미가 되어 하늘 높이 날아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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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만은, 오늘만은
바다는 평화롭다
이 평화로운 바다에서 모두가 낭만에 젖어있다

산사의 염불소리는 파도에 묻쳐 들리지 않고 이끼낀 추마끝에서 찰랑거는 풍경소리만 들린다
성모 마리아앞에 무릅을 꿇지 않아도 이미 비둘기 같은 나래를 펴고 평화가 날아들고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를 만나지 않았어도 사랑이 무엇인지 알만한 노래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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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역줄기 한조각을 건져 올리며 기뻐하는 소박한 욕심들이 하얀 파도를 따라 밀려오고 밀려간다

은빛, 금빛보다 더 찬란하여 눈이 부시고 거룩하여 하얗기만한
그 놀라운 평화가 가슴안에서 물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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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오늘은, 오늘만은
파란하늘 아래 푸른바다를 안고 쏜살같은 시간이 멈추어 있다

2007. 6. 10(일) - 연곡천에서 그리고 영진바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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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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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행님의 댓글

조덕행 작성일

  언제 보아도 마음의 고향은 포근함 그 자체입니다.
고추 내놓고 자무락질 할때부터,불혹의 나이에 아름다운 묘령의 여인과 
차 한잔 나누며 담소를 나누며 응시하던 그 곳이군요.
고향 바다는 항상 거기 있는데 가벼운 이 몸만 왔다 갔다 입니다.
그 바닷가는 오늘따라 더욱 짙으고 푸르군요.
오늘도 더욱 행복하시고 귀한 시간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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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기님의 댓글

김윤기 작성일

  조덕행 후배님께
평화로운 마음은 내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대상에 대한 단순하고 미묘한 본능적 관조(觀照)의해 지극히 우발적이며
논리적으로는 정리되지 않는 감상의 여운이 지속되는 마음의 미학(美學)이 아닌가 싶다네.
은어가 떼지어 노닐고 있는 연곡천에서 무릅위까지 바지를 걷어 올리고 철없는 아이처럼 첨버덩거리며
이곳 저곳을 촬영을 하고도 남는 시간,
영진바다로 내달아 은빛 파도를 바라보며 이유없이 밀러드는 마음의 평화,
연곡천에서 영진바다에서 나는 그 평화를 담아 왔다네.
비록 졸작이지만 내속에 물결치던 그 평화가 이국의 후배님 가슴속에도 그대로 전해 졌으면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