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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근 교장선생님 동상건립에 대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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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대흥 작성일 2009-10-23 12:06 댓글 0건 조회 1,02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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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2월26일 이토히로부미는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의 총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이토는 조선민중의 의식개조를 통한 내선일치를 앞세워 친일파를 키우고 조선 스스로 일본
에 동화되도록 하는 교묘한 문화통치를 구사했던 자입니다.
안중근이 이토를 사살하므로서 일본은 군국주의가 대두되면서 무단통치가 이어졌고 조선인
들은 이때부터 일본의 간악한 의도를 파악하고 지배를 사실상 거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이토가 살아 있었다면 3.1운동은 애초부터 이루어 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수히 많은 친일파와 그로 인하여 서서히 일본에 동화되는 끔직한 일이 벌어졌을 터이니
까요.
안중근의 의거는 국혼(國魂)이 였습니다.
항일운동으로 기우러져 가는 나라를 일으켜 새우려는 불꽃같은 혼이 그로 하여금 을사늑약
의 원흉에게 총을 겨누게 했던것입니다.

흔히들「농고식(農高式)」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한번 결정하면 일사불란하게 동참하고 열과 성을 다해 멋진 결과를 얻어내는 Trend Chasing
(추종풍조)을 일컷는 말입니다.
혹자는 개성의 결여를 우려하고 혹자는 포플리즘을 빗대어 폄하하나 '농고식'은 누구도
흉내낼수 없는 우리들만의 문화(文化)입니다.
이런 '농고식 문화'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고 최용근 교장선생님의 동상건립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그분의 행장기는 이미 김윤기 동문이 요약해서 홈피에 올린 동영상이나 유인물 등으로
모르는 동문들이 없을 것입니다.
일제의 교육말살 정책에 대항하여 갖은 박해를 받아가며 강농의 민족정신을 지켰던 일이며
6.25로 페허가 된 학교를 재건하는데 교직원과 학생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정상화 시킨일들
과 우수교사를 확보하여 1인1기교육을 통하여 실업교육의 저변확대를 이룩한것은 우리 농
고가 지역사회, 나아가서는 우리나라의 교육계에 이바지하는 명문고로서의 뿌리를 내리게
만든 힘의 원천이 되었음을 알것입니다.
<축구 ㅡ하면 강릉농고ㅡ>의 등식도 그런 가운데 얻어진 것입니다.

교정앞에 우뚝선 히마라야삼나무는 우리 농고의 상징입니다.
교내에 있는 60년 이상된 정원수는 우리 농고의 역사입니다.
6.25난중에 뿔뿔히 흩어졌던 이 유서어린 수목들을 회수하면서 고사(枯死)된 나무를 붙잡고
눈물을 펑펑 흘렸다는 당시 선배들의 증언들은 나무 한그루 풀한포기에 서려있던 강농의
역사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농고식 문화는 이렇게 유구한 세월의 흔적과 무수한 고난의 아픔속에 만들어 진것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살신구국이 '국혼'이였다면 '농고식 문화' 는「교혼(校魂)」이라고 이름 붙힐
수 있습니다.
스승을 가슴깊히 존경하고 선배를 하늘처럼 받들며 모교를 집안보다 더 사랑하는 농고식
문화는...그러므로 강릉농고의 '교혼'인 것입니다.

최용근 교장선생님의 동상건립은 2만여 동문들의 염원에 의하여 추진되었음을 압니다.
혹자는 직접 교육을 받았고 혹자는 함자 석자도 낯설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 농고의 우상이였고 전통의 맥(脈)이셨음은 분명합니다.
히말리아시타를 모교의 상징물로 여겨서 신성시 했듯이 농고의 맥을 잇게 해주신 훌륭한
선배님의 자취를 길이 보존함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이같은 일은 몇몇 동문들의 거금찬조도 중요하지만 농고를 나온 모든 동문들의 참여가 그에
못지않게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잔디한장은 내가 깔고, 벽돌하나는 네가 놓는다는 열정이 중요합니다.
추진성금의 많고 적음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같은 서당에서 함께 글을 읽은 사람들을 '창우(窓友)'라 하고 이들의 우정을 '창의(窓誼)라
합니다. 우리는 농고라는 서당에서 배움을 함께 한 '동창(同窓)'입니다.
창우로 의리를 맺고 창의로 힘을 합쳐 동창의 기개를 높히 떨쳐 보십시다.
'농고식'으로 해서 못할게 무에 있으며 않될게 무에 있습니까?

고 최용근 교장선생님의 동상건립에 관하여 느낀바 소회를 피력해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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