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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일기 - 1화 (미즈뜰에서 퍼옴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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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량마눌
작성일 2006-06-28 18:57
댓글 0건
조회 1,100회
본문
이 글을 쓰기 까지
참으로 많은 고심을 해 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 볼 때 분명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며
다시 상기 시키고 싶지 않은 일이라
많은 생각을 해 보았지만 굳이 명분을 내세우자면
다시는 여러분의 가정에 저와 같은 일이 없도록 하고자
예방 차원에서 용기를 내어 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 부탁의 말씀 올리자면
글을 읽고 나신 다음
미리 염려 하시지 말고 이상한 마음과 자각 증상을 느끼시면
바로 병원을 찾아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한 가지 더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제가 이 글을 쓰기 전에
여러분에게 밝고 명랑하게 비추어 졌던
제 모습 그대로만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대 강릉 농공고의 선후배님들 몇 분이
저의 건강에 대하여 아시고 계시기에 늘 염려의 대상이 되어
항상 송구스러운 마음을 갖고 있으므로 아울러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2003년 2월의 마지막 날인 28일 한가로운 낮에
우연히 T.V를 시청하다
유방암 자가 진단법에 대하여 설명을 하기에
무심코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왼쪽 가슴에 멍울이 만져지는 자각 증상을 느끼면서
그리고 유두에서 피와 골음이 함께 나왔습니다.
(멍울이라고 다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참고로 저는 좁쌀만한 단단한 멍울과 물렁한 멍울
4개가 발견 되었습니다.)
'아~ 나는 이미 늦었구나' 하는
스스로의 진단을 내렸습니다.
항상
말로만 들어도 무서운
여러 가지 암에 대한 상식으로 비추어볼 때
자각증상으로 느껴질 때에는
이미 늦었다는 말을 들은 바 있기에
순간 저의 생각은 늦은 쪽으로 굳혀졌습니다.
멍울이 발견 된 것만으로도 온몸이 떨리는데
스스로의 판단이 늦었다고 생각하니
뼈 속까지 녹아내리는 느낌이었습니다.
빠른 시간 내에 검사를 받으려고 노력했지만
다음 날
병원마저 휴일이 겹쳐 버렸습니다.
급한 마음에 무조건 큰 병원을 찾아 나섰습니다.
응급실로 찾아 갔지만
제가 거주하는 지역이 경기도 인지라
서울에 위치한 여의도 성모 병원은
제3의료지역인 서울 수도권으로서 검사는 할 수 있지만
만약 검사 결과 암이라고 판정이 나오지 않으면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어 일반으로 처리된다는
냉정한 의료법을 내 놓았습니다.
만약 암이 아니라면
돈하고 바꿀 수 없는 더 좋은 일이겠지만
또 하나의 걱정스러움은 경제에 따른 문제이었습니다.
보험 적용도 받지 못하는 거액의 검사 비용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이었습니다.
빠른 시간 내의 검사와 결과가 필요로 하면서도
그대로 병원에 눕지 못함이 안타까웠습니다.
보험 대상이 아닌 일반 환자에 대한 영리를 생각해서인지
의료진들의 발 빠른 대처로
링거액을 먼저 들고 오는 것을 뻔히 목격하면서도
마음 편히 병원에 눕지 못하고 도망치듯
이내 병원 문을 빠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3일간의 휴일동안 경기도네에 있는
작은 병원을 전전긍긍하고 다니며 급한 검사를 마쳤습니다.
(유방촬영 및 초음파 검사)
검사결과
"큰 병원으로 가보셔야겠습니다."라는
믿고 싶지 않은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작은 병원에서 의사의 소견서를 첨부하여
다시 여의도 성모병원 응급실로 향하였습니다.
응급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은
이미 많은 환자들로 초만원이라는 것과
바깥으로 드러난 끔찍한 상처를 안고 들어 온 환자와
또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견디지 못하고
이내 숨을 거두어 버린 망자들을 위한 가족들의 통곡 소리였습니다.
말 그대로 급한 환자가 몰리는 응급실인 것 같았습니다.
제일 먼저
병명에 관계없이 링거액을 꽂은 다음
혈압과 체온을 재고 급한 대로 심전도 검사와 X-rey 검사를 마쳤습니다.
그나마 저는 복 받은 자리였습니다.
자리를 잡지 못한 환자들은
복도 바닥에서 또는 의자에서 링거액을 꽂고 기다리는 모습이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였습니다.
마음은 무척 불안한데 주변마저 산란하니
지나 보내는 한 시간이 괴로울 정도였습니다.
갑자기 초라해진 자신의 모습에 서러움이 물밀 듯 밀려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복 바쳐 올랐습니다.
“왜 하필이면 나야?”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나 보다 더 악하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남편의 옷자락을 붙들고 흔들며 포악을 부려보았습니다.
마치 남편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 버린 것처럼
원망 섞인 말을 퍼 부으면서 말입니다.
어찌나 서럽게 울었던지 옆에 있던 가족들도
제가 흘리는 눈물에 하염없이 따라 울고 있었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족들에게 식사를 하고 올 것을 권유했습니다.
갑작스럽게 병원을 쫒아 다니느라 미처 식사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픈 사람은 그렇다하지만
건강한 사람은 식사를 해야 다음에 또 환자를 돌보게 되지요.
“지금 밥이 넘어 가냐”라고 가족들은 거부했지만
“우리 냉정히 생각하자.”하며 억지로 밀어 냈습니다.
가족들이 식사를 하러 간 후에 의사가 찾아 왔습니다.
“아주머니! 퇴원하셨다가 내일 외래로 다시 방문해 주세요.”
정말 본인에게는 말도 안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외래로 예약을 해서 순서를 밟아 오자면
암세포가 퍼져 상당하게 많이 전이 될 터인데.......
‘이대로 순순히 나가면 죽을 수 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오히려 의사를 설득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저 이대로 나가면 죽습니다.”
“선생님! 살려 주십시오.”
속이 상한 일이 너무 많았었기에
‘차라리 죽어 버리겠다.’ 는 생각으로 죽음 또한 두렵지 않았었는데
어떻게 사람 마음이 이리도 간사할 수 있을까?
허나
막상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앞에 체면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저 처분만 바라면서도 줄곧 살라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의사도 할말은 있었습니다.
“아주머니같이 응급실에서 바로 수술실로 갈 수 만 있다면
예약 해 놓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어쩌란 말입니까?”
당연 백번 옳은 말씀이었기에 말문이 막히더군요.
하지만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강하였기에
의사를 설득시켰습니다.
“선생님! 저 이대로 나가면 몇 개월 동안 기다리면서
다른 병으로 죽고 말 것 입니다.
제발 선처해 주세요.”
저는 삶의 끈을 절대 놓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듣고 계시던 의사 선생님은
“교수님하고 의논하여 결정 할 것이니 그 다음은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라는
말씀을 남기고 돌아 가셨습니다.
참으로 많은 고심을 해 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 볼 때 분명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며
다시 상기 시키고 싶지 않은 일이라
많은 생각을 해 보았지만 굳이 명분을 내세우자면
다시는 여러분의 가정에 저와 같은 일이 없도록 하고자
예방 차원에서 용기를 내어 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 부탁의 말씀 올리자면
글을 읽고 나신 다음
미리 염려 하시지 말고 이상한 마음과 자각 증상을 느끼시면
바로 병원을 찾아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한 가지 더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제가 이 글을 쓰기 전에
여러분에게 밝고 명랑하게 비추어 졌던
제 모습 그대로만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대 강릉 농공고의 선후배님들 몇 분이
저의 건강에 대하여 아시고 계시기에 늘 염려의 대상이 되어
항상 송구스러운 마음을 갖고 있으므로 아울러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2003년 2월의 마지막 날인 28일 한가로운 낮에
우연히 T.V를 시청하다
유방암 자가 진단법에 대하여 설명을 하기에
무심코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왼쪽 가슴에 멍울이 만져지는 자각 증상을 느끼면서
그리고 유두에서 피와 골음이 함께 나왔습니다.
(멍울이라고 다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참고로 저는 좁쌀만한 단단한 멍울과 물렁한 멍울
4개가 발견 되었습니다.)
'아~ 나는 이미 늦었구나' 하는
스스로의 진단을 내렸습니다.
항상
말로만 들어도 무서운
여러 가지 암에 대한 상식으로 비추어볼 때
자각증상으로 느껴질 때에는
이미 늦었다는 말을 들은 바 있기에
순간 저의 생각은 늦은 쪽으로 굳혀졌습니다.
멍울이 발견 된 것만으로도 온몸이 떨리는데
스스로의 판단이 늦었다고 생각하니
뼈 속까지 녹아내리는 느낌이었습니다.
빠른 시간 내에 검사를 받으려고 노력했지만
다음 날
병원마저 휴일이 겹쳐 버렸습니다.
급한 마음에 무조건 큰 병원을 찾아 나섰습니다.
응급실로 찾아 갔지만
제가 거주하는 지역이 경기도 인지라
서울에 위치한 여의도 성모 병원은
제3의료지역인 서울 수도권으로서 검사는 할 수 있지만
만약 검사 결과 암이라고 판정이 나오지 않으면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어 일반으로 처리된다는
냉정한 의료법을 내 놓았습니다.
만약 암이 아니라면
돈하고 바꿀 수 없는 더 좋은 일이겠지만
또 하나의 걱정스러움은 경제에 따른 문제이었습니다.
보험 적용도 받지 못하는 거액의 검사 비용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이었습니다.
빠른 시간 내의 검사와 결과가 필요로 하면서도
그대로 병원에 눕지 못함이 안타까웠습니다.
보험 대상이 아닌 일반 환자에 대한 영리를 생각해서인지
의료진들의 발 빠른 대처로
링거액을 먼저 들고 오는 것을 뻔히 목격하면서도
마음 편히 병원에 눕지 못하고 도망치듯
이내 병원 문을 빠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3일간의 휴일동안 경기도네에 있는
작은 병원을 전전긍긍하고 다니며 급한 검사를 마쳤습니다.
(유방촬영 및 초음파 검사)
검사결과
"큰 병원으로 가보셔야겠습니다."라는
믿고 싶지 않은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작은 병원에서 의사의 소견서를 첨부하여
다시 여의도 성모병원 응급실로 향하였습니다.
응급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은
이미 많은 환자들로 초만원이라는 것과
바깥으로 드러난 끔찍한 상처를 안고 들어 온 환자와
또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견디지 못하고
이내 숨을 거두어 버린 망자들을 위한 가족들의 통곡 소리였습니다.
말 그대로 급한 환자가 몰리는 응급실인 것 같았습니다.
제일 먼저
병명에 관계없이 링거액을 꽂은 다음
혈압과 체온을 재고 급한 대로 심전도 검사와 X-rey 검사를 마쳤습니다.
그나마 저는 복 받은 자리였습니다.
자리를 잡지 못한 환자들은
복도 바닥에서 또는 의자에서 링거액을 꽂고 기다리는 모습이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였습니다.
마음은 무척 불안한데 주변마저 산란하니
지나 보내는 한 시간이 괴로울 정도였습니다.
갑자기 초라해진 자신의 모습에 서러움이 물밀 듯 밀려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복 바쳐 올랐습니다.
“왜 하필이면 나야?”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나 보다 더 악하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남편의 옷자락을 붙들고 흔들며 포악을 부려보았습니다.
마치 남편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 버린 것처럼
원망 섞인 말을 퍼 부으면서 말입니다.
어찌나 서럽게 울었던지 옆에 있던 가족들도
제가 흘리는 눈물에 하염없이 따라 울고 있었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족들에게 식사를 하고 올 것을 권유했습니다.
갑작스럽게 병원을 쫒아 다니느라 미처 식사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픈 사람은 그렇다하지만
건강한 사람은 식사를 해야 다음에 또 환자를 돌보게 되지요.
“지금 밥이 넘어 가냐”라고 가족들은 거부했지만
“우리 냉정히 생각하자.”하며 억지로 밀어 냈습니다.
가족들이 식사를 하러 간 후에 의사가 찾아 왔습니다.
“아주머니! 퇴원하셨다가 내일 외래로 다시 방문해 주세요.”
정말 본인에게는 말도 안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외래로 예약을 해서 순서를 밟아 오자면
암세포가 퍼져 상당하게 많이 전이 될 터인데.......
‘이대로 순순히 나가면 죽을 수 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오히려 의사를 설득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저 이대로 나가면 죽습니다.”
“선생님! 살려 주십시오.”
속이 상한 일이 너무 많았었기에
‘차라리 죽어 버리겠다.’ 는 생각으로 죽음 또한 두렵지 않았었는데
어떻게 사람 마음이 이리도 간사할 수 있을까?
허나
막상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앞에 체면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저 처분만 바라면서도 줄곧 살라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의사도 할말은 있었습니다.
“아주머니같이 응급실에서 바로 수술실로 갈 수 만 있다면
예약 해 놓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어쩌란 말입니까?”
당연 백번 옳은 말씀이었기에 말문이 막히더군요.
하지만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강하였기에
의사를 설득시켰습니다.
“선생님! 저 이대로 나가면 몇 개월 동안 기다리면서
다른 병으로 죽고 말 것 입니다.
제발 선처해 주세요.”
저는 삶의 끈을 절대 놓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듣고 계시던 의사 선생님은
“교수님하고 의논하여 결정 할 것이니 그 다음은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라는
말씀을 남기고 돌아 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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