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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일기 - 마지막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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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량마눌
작성일 2006-07-11 17:59
댓글 0건
조회 1,147회
본문
2003년 3월 24일
수술 후 20일 만에 항암치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항암제는 복용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5년간 더 복용해야 한답니다.
다른 암과는 달리 초기에 발견하면
그리고 전이만 되지 않고 잘 견딘다면 생존율은 다른 암과 달리 뛰어나다고 합니다.
반면 재발의 확률이 높아 수술하지 않은 사람에 비해 수술한 사람은
수술한 쪽이나 반대편에 다시 재발 할 확률이 높기에
6개월에 한번씩 전이검사를 하게 되는데
검사비용도 만만치 않지만 검사하는 과정도 그리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수술만하고 항암제 복용으로 치료가 끝나는 줄 알고 있었는데
방사선치료도 병행해야 한다는 의사의 처방이 나왔습니다.
다행히 혈관에 항암제를 투여하는 요법을 사용하지 않는다기에 조금은 위안이 되었지만
방사선과 과장님과 상담하는 과정에 말씀을 들으니
수술도 중요하지만 지금부터가 아주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방사선 치료는 조금만 잘못 쏘여도 그 부작용이 생명하고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라
방사선 치료를 받기 위한 준비과정 또한 복잡했습니다.
3월24일
지워지지 않는 물감으로 가슴 주위와 방사선이 지나가는 각도를 잡아
가슴에 그림제작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석고위에 눕게 한 다음 등판 작업을 하였습니다.
미세한 움직임 때문에 방사선이 빗나가는 경우를 막기 위한 세밀한 작업이었습니다.
그리고 C.T 촬영을 끝내고 방사선 과장님과의 상담을 하였습니다.
방사선 치료를 할 때 폐를 지나가게 되므로 만의 하나이지만
혹여 따르는 부작용에 당신들은 책임을 지지 않겠다며 서명을 요구하더군요.
어쩔 수 있었겠습니까?
하라는 대로 말 잘 들어야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 수밖에
별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앞으로 33회의 방사선 치료를 거치게 되는데
그 과정에 폐가 스펀지처럼 딱딱하게 굳어질 수 있다는 말씀과
나중에는 풀어지니 걱정하지 말라는 위로의 말씀을 함께 하셨습니다.
또한
영양을 골고루 잘 섭취해야 33회의 방사선 치료를
무사히 끝날 수 있다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고 유산소 운동을
꼭 해야 한다는 부탁의 말씀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준비 과정에 들어가는 경제적 부담이 얼마나 컸었는지요.
유방에 방사선을 쪼이기 전 가슴의 살이 덜 익게 하는
조그마한 연고 하나가 무려 6만원이나 했습니다.
33회 끝날 때까지 골고루 펴서 발라 주라고 하니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갔겠습니까?
가슴에 그림만 그렸어도 20만원이 넘었고
등판 제작에도 30만원
방사선 쪼이는데 일주일에 한번씩 결제하듯 선불을 지급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돈 없는 사람은 중도에서 포기할 수밖에.........
2회의 방사선을 쪼인 다음 X-Rey 촬영을 하고 피검사가 들어갔습니다.
‘빈대 한 마리 잡으려고 초가삼간 다 태운다.’ 라는
표현이 적절하다고 방사선 과장님은 말씀을 덧 붙이셨습니다.
암 세포의 전이를 막기 위해 백혈구의 수치가 떨어지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방사선을 쪼이게 되니까 끝까지 잘 견디어 달라고 하셨습니다.
2회의 방사선 치료만 했는데 벌써부터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수술한 쪽을 쏘이는데 현저하게 부어오르며 가래가 끓기 시작하였습니다.
속까지 울렁거리기 시작하는데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항암제 복용에 신경과 약 복용 방사선 치료 등 정말 산 넘어 산 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밥을 넘겨야 치료를 받는 기운이 생길 텐데
모든 냄새도 맡을 수 없을 정도로 속이 무척 울렁거렸습니다.
의정부에서 서울로 매일 치료 받으러 가기 힘들어
결국 서울에 사시는 작은 어머님 댁에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작은 어머니께서 정성껏 해 주시는 밥을 제가 잘 먹어야만 보람을 느끼실 텐데
억지로 넘기려니 결국 토하기를 반복해야만 했습니다.
“얼른 한 숟가락이라도 물에 말아 먹어라.”
곁에서 안쓰러우셔서 억지로 권하셨습니다.
다른 식구들의 밥맛을 잃게 할까봐 한 숟가락을 물에 말아 제 방으로 들고 들어갔습니다.
‘억지로라도 먹어야지.’
열 번을 용기 내어 수저를 들어 보지만 계속 되는 헛구역질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물에 말은 한 수저의 밥그릇을 손에 쥐고 흐르는 눈물을 닦았습니다.
또 들여다보고 제 시도 하려하면 헛구역질이 나오고 참으려고 애를 쓰다
서러움의 제 눈물은 물에 말은 밥그릇 속으로 뚝뚝 떨어졌습니다.
눈물에 섞여있는 한수저의 밥을 삼키고는 또 화장실로 직행하였습니다.
식사를 하시던 가족들에게 얼마나 미안 했었는지요.
횟수를 거듭하여 치료 할수록 가슴은 부어올랐고
또한 벌겋게 익어 가더니만 결국 습포가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밤새 쓰라림에 부채질을 해 대며 고통과 씨름을 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내가 이렇게 고통을 겪고 사는데 꼭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앞산으로 산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지러워 잘못하면 실족한다고 의사는 조심할 것을 당부하였지만
계속 산책을 강행하였습니다.
제가 치료를 받던 그해
장마도 아닌 그 계절에 비가 얼마나 많이 내렸던지
우산을 쓰고 산책한 날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작은 집 부모님께서 염려하실까봐 고통스러울 때마다
눈을 피해 산에서 통곡하고 울었던 기억도 납니다.
두 분이 말다툼이라도 하신 날에는 혹여 ‘제가 부담스러우셔서 싸우시나.’ 하는 서러움에
산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내려오지 않고 숨 죽여 운 날도 많았었습니다.
창피스러워서 사람들이 뜸한 곳을 찾아 헤매고 말입니다.
참으로 외롭고 고통스러웠던 자신과의 싸움이었습니다.
횟수를 거듭할수록 머리카락도 서서히 빠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체질에 따라서 부작용도 달리 오는데
같이 수술 받고 같이 방사선 치료하는 어떤 이는 참 멀쩡하게도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르고 화장을 짙게 하고 오는 등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 모습은 같이 치료받고 있는 사람들의 부러움에 대상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그 사람의 속마음도 들어 가봐야 아는 것이라고
보편적으로 남편들이 치료 과정에 따라 오고는 하였는데
그 사람 남편의 외모는 빡빡머리에 굵은 금 목걸이를 착용한 것이
마치 조폭 아저씨처럼 보였습니다.
보호자의 입장으로 고통을 대신 할 수도 없으면서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과 몇 마디의 공격적인 말을 들어야 했으니까요.
그 아저씨의 말씀이 “뭐 그런 것 같고 못 참아서들 그러느냐.”라는 망발이었습니다.
그 이후 그 사람의 집에서 부부싸움이 있었고
미련한 아저씨가 부인의 항암제를 들고 “나 이거 먹고 자살한다.”고 협박하여
결국 이혼 했노라고 하소연하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나쁜 사람 같으니라고........ 쯧쯧.”
‘긴 병에 효자 없다.’고 했나요?’
지금 투병 생활을 하고 있는 제 자신도 무척 지겹고 고통스럽습니다.
열심히 노력하여 밝은 마음을 자신에게서 만들어 내면서
끝까지 싸워 꼭 이겨 내어 새로운 멋진 삶에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빠른 시간 내에 완치되어 가족들은 물론
늘 곁에서 심려하시고 격려와 사랑을 한 없이 베풀어 주시는 여러분께
밝고 건강한 모습 보여 드릴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만병의 치료가 사랑만큼 더 큰 특효약이 없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못나고 부족함이 많은 저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동안 특효약인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고개 숙여 깊은 감사의 절을 올리겠습니다. (넙죽)
지루하신 데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함께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모든 분들의 가정에는 저와 같은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으시기를 제가 간절히 기도하렵니다.
그리고 새로 태어난 제 2의 인생 겸손한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수술 후 20일 만에 항암치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항암제는 복용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5년간 더 복용해야 한답니다.
다른 암과는 달리 초기에 발견하면
그리고 전이만 되지 않고 잘 견딘다면 생존율은 다른 암과 달리 뛰어나다고 합니다.
반면 재발의 확률이 높아 수술하지 않은 사람에 비해 수술한 사람은
수술한 쪽이나 반대편에 다시 재발 할 확률이 높기에
6개월에 한번씩 전이검사를 하게 되는데
검사비용도 만만치 않지만 검사하는 과정도 그리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수술만하고 항암제 복용으로 치료가 끝나는 줄 알고 있었는데
방사선치료도 병행해야 한다는 의사의 처방이 나왔습니다.
다행히 혈관에 항암제를 투여하는 요법을 사용하지 않는다기에 조금은 위안이 되었지만
방사선과 과장님과 상담하는 과정에 말씀을 들으니
수술도 중요하지만 지금부터가 아주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방사선 치료는 조금만 잘못 쏘여도 그 부작용이 생명하고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라
방사선 치료를 받기 위한 준비과정 또한 복잡했습니다.
3월24일
지워지지 않는 물감으로 가슴 주위와 방사선이 지나가는 각도를 잡아
가슴에 그림제작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석고위에 눕게 한 다음 등판 작업을 하였습니다.
미세한 움직임 때문에 방사선이 빗나가는 경우를 막기 위한 세밀한 작업이었습니다.
그리고 C.T 촬영을 끝내고 방사선 과장님과의 상담을 하였습니다.
방사선 치료를 할 때 폐를 지나가게 되므로 만의 하나이지만
혹여 따르는 부작용에 당신들은 책임을 지지 않겠다며 서명을 요구하더군요.
어쩔 수 있었겠습니까?
하라는 대로 말 잘 들어야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 수밖에
별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앞으로 33회의 방사선 치료를 거치게 되는데
그 과정에 폐가 스펀지처럼 딱딱하게 굳어질 수 있다는 말씀과
나중에는 풀어지니 걱정하지 말라는 위로의 말씀을 함께 하셨습니다.
또한
영양을 골고루 잘 섭취해야 33회의 방사선 치료를
무사히 끝날 수 있다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고 유산소 운동을
꼭 해야 한다는 부탁의 말씀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준비 과정에 들어가는 경제적 부담이 얼마나 컸었는지요.
유방에 방사선을 쪼이기 전 가슴의 살이 덜 익게 하는
조그마한 연고 하나가 무려 6만원이나 했습니다.
33회 끝날 때까지 골고루 펴서 발라 주라고 하니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갔겠습니까?
가슴에 그림만 그렸어도 20만원이 넘었고
등판 제작에도 30만원
방사선 쪼이는데 일주일에 한번씩 결제하듯 선불을 지급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돈 없는 사람은 중도에서 포기할 수밖에.........
2회의 방사선을 쪼인 다음 X-Rey 촬영을 하고 피검사가 들어갔습니다.
‘빈대 한 마리 잡으려고 초가삼간 다 태운다.’ 라는
표현이 적절하다고 방사선 과장님은 말씀을 덧 붙이셨습니다.
암 세포의 전이를 막기 위해 백혈구의 수치가 떨어지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방사선을 쪼이게 되니까 끝까지 잘 견디어 달라고 하셨습니다.
2회의 방사선 치료만 했는데 벌써부터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수술한 쪽을 쏘이는데 현저하게 부어오르며 가래가 끓기 시작하였습니다.
속까지 울렁거리기 시작하는데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항암제 복용에 신경과 약 복용 방사선 치료 등 정말 산 넘어 산 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밥을 넘겨야 치료를 받는 기운이 생길 텐데
모든 냄새도 맡을 수 없을 정도로 속이 무척 울렁거렸습니다.
의정부에서 서울로 매일 치료 받으러 가기 힘들어
결국 서울에 사시는 작은 어머님 댁에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작은 어머니께서 정성껏 해 주시는 밥을 제가 잘 먹어야만 보람을 느끼실 텐데
억지로 넘기려니 결국 토하기를 반복해야만 했습니다.
“얼른 한 숟가락이라도 물에 말아 먹어라.”
곁에서 안쓰러우셔서 억지로 권하셨습니다.
다른 식구들의 밥맛을 잃게 할까봐 한 숟가락을 물에 말아 제 방으로 들고 들어갔습니다.
‘억지로라도 먹어야지.’
열 번을 용기 내어 수저를 들어 보지만 계속 되는 헛구역질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물에 말은 한 수저의 밥그릇을 손에 쥐고 흐르는 눈물을 닦았습니다.
또 들여다보고 제 시도 하려하면 헛구역질이 나오고 참으려고 애를 쓰다
서러움의 제 눈물은 물에 말은 밥그릇 속으로 뚝뚝 떨어졌습니다.
눈물에 섞여있는 한수저의 밥을 삼키고는 또 화장실로 직행하였습니다.
식사를 하시던 가족들에게 얼마나 미안 했었는지요.
횟수를 거듭하여 치료 할수록 가슴은 부어올랐고
또한 벌겋게 익어 가더니만 결국 습포가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밤새 쓰라림에 부채질을 해 대며 고통과 씨름을 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내가 이렇게 고통을 겪고 사는데 꼭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앞산으로 산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지러워 잘못하면 실족한다고 의사는 조심할 것을 당부하였지만
계속 산책을 강행하였습니다.
제가 치료를 받던 그해
장마도 아닌 그 계절에 비가 얼마나 많이 내렸던지
우산을 쓰고 산책한 날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작은 집 부모님께서 염려하실까봐 고통스러울 때마다
눈을 피해 산에서 통곡하고 울었던 기억도 납니다.
두 분이 말다툼이라도 하신 날에는 혹여 ‘제가 부담스러우셔서 싸우시나.’ 하는 서러움에
산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내려오지 않고 숨 죽여 운 날도 많았었습니다.
창피스러워서 사람들이 뜸한 곳을 찾아 헤매고 말입니다.
참으로 외롭고 고통스러웠던 자신과의 싸움이었습니다.
횟수를 거듭할수록 머리카락도 서서히 빠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체질에 따라서 부작용도 달리 오는데
같이 수술 받고 같이 방사선 치료하는 어떤 이는 참 멀쩡하게도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르고 화장을 짙게 하고 오는 등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 모습은 같이 치료받고 있는 사람들의 부러움에 대상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그 사람의 속마음도 들어 가봐야 아는 것이라고
보편적으로 남편들이 치료 과정에 따라 오고는 하였는데
그 사람 남편의 외모는 빡빡머리에 굵은 금 목걸이를 착용한 것이
마치 조폭 아저씨처럼 보였습니다.
보호자의 입장으로 고통을 대신 할 수도 없으면서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과 몇 마디의 공격적인 말을 들어야 했으니까요.
그 아저씨의 말씀이 “뭐 그런 것 같고 못 참아서들 그러느냐.”라는 망발이었습니다.
그 이후 그 사람의 집에서 부부싸움이 있었고
미련한 아저씨가 부인의 항암제를 들고 “나 이거 먹고 자살한다.”고 협박하여
결국 이혼 했노라고 하소연하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나쁜 사람 같으니라고........ 쯧쯧.”
‘긴 병에 효자 없다.’고 했나요?’
지금 투병 생활을 하고 있는 제 자신도 무척 지겹고 고통스럽습니다.
열심히 노력하여 밝은 마음을 자신에게서 만들어 내면서
끝까지 싸워 꼭 이겨 내어 새로운 멋진 삶에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빠른 시간 내에 완치되어 가족들은 물론
늘 곁에서 심려하시고 격려와 사랑을 한 없이 베풀어 주시는 여러분께
밝고 건강한 모습 보여 드릴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만병의 치료가 사랑만큼 더 큰 특효약이 없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못나고 부족함이 많은 저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동안 특효약인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고개 숙여 깊은 감사의 절을 올리겠습니다. (넙죽)
지루하신 데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함께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모든 분들의 가정에는 저와 같은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으시기를 제가 간절히 기도하렵니다.
그리고 새로 태어난 제 2의 인생 겸손한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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