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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24회) 님 9월16일 강원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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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동문회 작성일 2020-09-16 14:23 댓글 0건 조회 1,45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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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터뷰]운동인 근성으로 역기들던 손에 붓 쥐었죠

대관령 표지석 쓴 정선 출신 石泉 박동철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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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 국가대표로 활약 아시안게임 동메달도
운동선배 필체본후 글씨와 품격에 대해 고민

펜글씨 연습 30만자 쓴 후 붓글씨 독학까지
명주군 기념비 글씨공모전 선정되며 유명세

90세 나이지만 현역 사업가로도 활동 중
"여전히 글쓰기 즐겨…더 좋은글 노력할 것"


석천(石泉) 박동철(91) 선생. 정선 북동리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 체육사에 큰 족적을 남긴 역도인이고 동시에 대관령 표지석 글자를 쓴 주인공이기도 하다. 운동과 서예에서 모두 두각을 나타낸 상당히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고교생 신분으로 출전한 강릉단오제에서 씨름판을 석권하고 1950년대 초에 열린 전국체전에서 육상 100m, 씨름, 역도에서 각각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서로 다른 종목에서 3관왕을 달성한 것이니 탁월한 운동 능력 하나만큼은 타고난 셈이다. 그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고려대는 그를 스카우트하게 되고 이후 한국역도의 유망주로 주목을 받는다.

국가대표 역도선수가 된 석천 선생은 전국체전 5연패에 이어 1956년 멜버른올림픽에 참가하는가 하면 1958년에는 도쿄 아시안게임에 역도경기 라이트 헤비급에 출전해 동메달을 따내기도 했다. 장미란(원주), 사재혁(홍천) 등 도 출신 역도 영웅의 탄생 이전에 이미 걸출한 스타가 자리 잡고 있었던 셈이다.

그가 서예인이 된 것은 고려대 재학 시절 한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방학을 맞아 북평에 내려와 운동을 하던 중 한 선배의 편지를 받았는데 그 편지글의 필체가 초등학생 2~3학년 수준의 악필이었다는 것이다. “운동을 하다가 은퇴를 해 사회에 나가서 이 정도의 글씨를 쓴다면 품격의 문제 아닌가 생각하게 됐어요. 신언서판(身言書判·인물평가의 기준으로 몸과 말씨, 글씨, 판단 등 네 가지를 이르는 말)이라고 했으니까요.” 그 길로 서점으로 향한 그는 한자 교본을 샀다. 그리고 펜글씨 연습을 시작하게 된다. 30만 자 가까이 써내려 갔다. 운동선수의 근성이 이때 발휘 된 것이다. 내친김에 독학으로 붓글씨 공부까지 하게 됐다.

그의 글씨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대관령 표지석을 통해서다. 1991년 세계잼버리대회를 고성에서 유치했을 때 당시 명주군에서 대회를 기념하는 기념비 계획을 세우고 공모를 진행했는데 석천선생의 글이 뽑히게 된 것이다.

“(응모를 하면서도) 내 글씨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돌(표지석) 크기가 컸고, 체육을 했기 때문에 큰 글씨에 호감도 있던 터라 공모전에 응하게 됐고 내가 쓴 것이 선정됐습니다.” 그의 글씨를 보고 새로 짓는 강릉세무서에서도 의뢰가 들어왔다. 그렇게 완성된 것이 현재 강릉세무서에 세워져 있는 '성실납세 국가번영(誠實納稅 國家繁榮)'탑이다.

망백(望百)의 나이다. 그리고 아직은 꼿꼿한 현역이다. 그는 레미콘에 들어가는 혼화제를 납품하는 태영케미칼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업가이기도 하다.

“여전히 글쓰기를 즐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려대 교우회보에 칼럼을 쓰기도 하고요. 앞으로도 좋은 글을 많이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석기기자 sgtoh@kwnews.co.kr

2020-9-16 (수) 22면 - 오석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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