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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와 며느리 그리고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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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광해군 작성일 2006-10-09 16:45 댓글 0건 조회 98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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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머니는 연세에 비해 매우 현대적인 분이시다.
특히 며느리들 대하시는 모습을 뵐라치면 내가 답답하기까지 할 만큼 인자하신 편이다.
추석이 되면 어머니는 며느리들 오기 전에 대부분의 준비를 모두 마치고 계신다.
다행히 우리집은 아버님이 막내이신 덕분에 제사를 모신다거나 하는 일은 없지만
5남매가 한꺼번에 들이 닥치는 추석은 결코 만만한 준비가 아니다.

어머니께서 명절 준비를 마치는 것은 보통 명절 이틀 전이다.
그러면 며느리 셋은 보통 명절 전날 도착하여 전 부치는 시늉과 설겆이 정도만 하고
끝을 내는 편이다. 그러면서도 속내를 보면 그나마도 꽤 힘들어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아침 밥은 대부분 어머니께서 다 하신다.
어머님께서 미리 밥을 해놓은 성미가 아니시고 특히 아침 일찍 일어나시는 것이
습관이 되신 덕분에 아침 밥은 직접 지으시는 것이다.
아침 잠이 많은 며느리들은 밥의 뜸이 다들고 국이 다 데워졌을 무렵에야
부엌으로 나가 대충 상차림 정도만으로 아침 준비의 흉내를 낼 뿐이다.

나는 가끔씩 어머님께 이런 일에 대해 넌지시 제동을 걸곤 한다.
나도 어차피 남자이고 아내를 챙기고 싶은 생각이 궁극적으로 있지만
명절에라도 어머니 편을 들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며느리들이 셋이나 된다.
물론 예전 어머니들처럼 부지런하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굳이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선수를 치시다 보면 결국 며느리들에게
올곧지 못한 버릇을 들이는 꼴이라고 부채질을 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대답은 늘 한결같다.
내손으로 밥 지어먹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것이다.
며느리들 시키고 싶은 생각이야 왜 없겠느냐만 어차피 저들도 시어머니 되고 어른 되면
똑같아 질 것이라는 말씀이다.
게다가 염불을 외시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시는 걸음이니 가만 있기보다는
적당한 운동이라도 하는 것이 낫다는 말씀이다.

따지고 보면 비단 우리 어머니만의 일이 아닌 듯하다.
돌이켜 보면 어머니 세대야 말로 참으로 눈물 겨운 마지막 며느리 세대를
사신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어렸을 때 할머니가 우리 집으로 와 계시면
어머니는 할머니 모시는 일에여간 신경을 써시지 않았다.
밥반찬 챙기는 것은 기본이고 아랫목에 불 들어간 정도을 알기 위해 일일이 손바닥을 대고
확인을 하셨다. 상도 어김없이 두 상을 보셨다.
아버지와 할머니 겸상을 따로 보고는 다시 가족들 상을 차렸다.
좋은 음식과 새음식은 항상 할머니 상에 일차로 올랐다.
할머니 옷도 수시로 챙겨서 할머니가 우리집에 와계시는 동안에는 언제나 환하고
깨끗한 모습이셨다. 온갖 세상 사는 이야기도 곧잘 나누셔서 할머니가 지겨워하시지도 않았고 특히나 어디 좋을 볼 거리가 있으면 언제나 할머니를 모시고 다니는 것도 어머니의
주특기셨다. 아마 다른 어머니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시대 사람들이 다 그렇듯 대식구의 빨래는 언제나 한 양동이 가득이었다.
세탁기는 고사하고 빨래용 고무장갑도 없던 시절이었다.
시냇가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하고 오시면 언제난 손이 빨갛게 얼어있었다.
우리 집의 경우 할머니까지 합하면 아홉식구였다.
그 살림을 어머니 혼자서 다 사셨으니 그 정황이 오죽하셨을까?
그러나 그 와중에도 뜨개질, 자수는 물론 닭이나 돼지, 토끼까지 먹이는
부업까지 마다하지 않으셨다. 어머니의 속옷은 언제나 아버지나 형이 입던 다 낡고
헐어버린 옷이었고 겉옷 역시 몇몇 단장을 위한 옷을 제외하고는
우리의 낡은 교련복이나 아버지의 잠바였다.

그런 어머니셨다.
그러면서도 여권신장이 뭐니 남녀 평등이 뭐니 이런 말씀을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시고
잘도 사셨다. 더군다나 정작 당신들이 할머니가 되고 시어머니가 되고 나니
며느리들이 죄다 자기 몸 귀한 습성에 빠져 제대로 시어머니 봉양을 하지 못한다.
아들들은 분명히 처가에서는 넉살이 좋아보이고 붙임성도 있어 보이는데
집에만 오면 슬슬 제 안사람 눈치만 보는 듯하다.

여하튼 그렇게 명절 며칠을 보내고 자식들은 휑하니 사라진다.
그들이 사라진 뒤끝에는 자식 손주들에게 내준 이불이며 베개들이 겹으로 쌓여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역시 아무런 불평 한 마디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그 치다꺼리를 하실 것이다.
그런 한 편, 우리집 며느리들은 틀림없이 별 것 아닌 일을 한 것으로
온갖 세상의 중노동을 다 한 듯이 차 속에 늘부러져 끙끙 앓을 지도 모른다.
미련한 남편들은 어머니의 켜켜이 쌓인 노역쯤은 아랑곳 않고 아내들의 애처로움에만
목이 타서 명절이 끝나고는 전화조차 제대로 드리지 않고 또 삶속에 파묻힐 것이다.

아마 대부분 집들의 추석 풍경은 올해도 예외없이 비슷할 것이다.
약해빠진 며느리들은 귀성 자체의 긴 여정에 골머리를 앓을 것이고 아직도 특권의식에
사로잡힌 남자들은 줄곧 술 마시고 고스톱 치는 것으로 명절 맞이를 하고 끝을 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자식들이 밀려왔다
사라진 뒷 켠에서 갑자기 허전해져 버린 가슴을 다시 명절 뒤끝의 치다꺼리로 채우실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남자도 바뀌어야 한다.
어차피 이전의 어머니들처럼 강인한 아내들은 더 이상 없다.
약한 아내들임을 인정해줘야 한다.
아내가 힘드는 것을 안다면 최소한 상이라도 함께 치울줄 알고 말이라도 수고한다고
따뜻하게 해줄 일이다. 뭣하면 남자들끼리 돌아가며 설걷이라도 직접 해주면 또 어떨까?
어머니 힘드신 줄 안다면 적어도 내가 덮던 이불이라도 툭툭 털어서
빨래줄에 걸고는 와야 할 것이고 자기가 묵은 방이라도 훤하게 청소하고 와야 할 것이다.
추석이 끝난 뒤에도 며칠 쯤은 혹시 몸이라도 상하지 않으셨는지
자주 전화라도 드려야 할 것이다.

물론 며느리들의 마음가짐도 바뀔 필요가 있다.
시댁에 대한 의무감을 버리고 진정한 가족애를 느낄 필요가 있다.
친정에서 힘들지 않음은 친정이 편해서이다.
시댁을 가족으로 생각하고 편하게 생각한다면 시댁으로 오가는 일이나 노역들이
생각보다는 덜 힘들 것이다. 물론 그게 하루 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다.
어머니가 자식들이 밀려들고 밀려가는 속에서 온갖 힘든 일을 하시고도 힘들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를 며느리들은 밴치마킹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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