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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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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권오원
작성일 2006-10-23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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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情無限
“(………………..이튿날 아침 고단한 마련해선 일찌거니 눈이 떠진 것은 몸이 지닌 기쁨이 하도 컷던 탓이었를까? 안타깝게도 간밤에 볼수 없었던 靈峯들을 對面하려고 새댁같이 수줍은 생각으로 밖에 나섰으나, 계곡은 여태 짙은 안개 속에서, 峻峯은 상기 깊은 구름 속에서 容易하게 자태를 엿보일 성싶지 않았고, 다만 가까운 데의 전나무, 잣나무 들만이 대장부의 기세로 활개를 쭉쭉 뻗고, 하늘을 찌를듯이 솟아 있는 것이 눈에 띄일 뿐이었다.
모두 근심없이 자란 나무들이었다. 靑雲의 뜻을 품고 하늘을 향하여 문실문실 자란 나무들이었다. 꼬질쪼질 뒤틀어지고 외틀어지고 한 野山 나무밖에 보지 못한 눈에는 귀공자와 같이 氣稟이 있어 보이는 나무들이었다.
朝飯후 短杖짚고 험난한 前程을 웃음경삼아 探勝의 길에 올랐을 때에는, 어느덧 구름과 안개가 개어져 遠近산악이 閱兵式하듯 점잖이들 버티고 서 있는데, 첫눈에 瞳子를 시울리게 하는 萬山의 색소는 紅! 이른바 단풍이란 저런 것인가 보다 하였다.
萬壑(학)千峯이 한바탕 흔들리게 웃는 듯, 山色은 붉을 대로 붉었다. 자세히 보니 紅만도 아니었다. 靑이 있고, 綠이 있고, 黃이 있고, 橙이 있고, 이를테면 산 전체가 무지개와 같이 복잡한 색소로 구성되였으면서도, 얼핏 보기에 朱紅만으로 보이는 것은 스펙트럼의 조화던가?
복잡한 것은 色만이 아니었다. 산의 용모는 더욱 多岐하다. 혹은 깍은 듯이 峻초(가파를 초)하고, 혹은 그린 듯이 溫厚하고, 혹은 막잡아 빚은 듯이 험상궂고, 혹은 틀에 박은 듯이 단정하고…….. 용모 풍취가 형형색색인 품이 이미 凡俗이 아니다.
산의 品評會를 연다면 여기서 더 호화로울수 있을까? 문자그대로 無窮無盡이다. 長安寺 맞은편 산에 鬱鬱蒼蒼 우거진 것은 다 잣나무뿐인데, 도시 二等邊三角形으로 가지를 늘어뜨리고 섰는 품이,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가 흡사히 고여 놓은 茶禮塔같다. 부처님은 禮佛床상만으로는 未洽해서, 이렇게 자연의 珍羞盛饌을 베풀어 놓으신 것일까? 얼핏 듣기에 부처님이 무엇을 탐낸다는 것이 千萬不當한 말 같지만 탐내는 그것이 物慾 저편의 존재인 자연이고 보면, 자연을 맘껒 탐낸다는 것이 이미 佛心이 아니고 무엇이랴!
장안사 앞으로 흐르는 溪流를 끼고 돌며 몇 굽이의 峽谷을 거슬러 올라가니, 산과 물이 어울리는 지점에 조그마한 찻집이 있다.
다리도 쉴 겸, 스탬프북을 한권 사서 옆에 구비된 인장을 찍으니, 그림과 함께 紙面에 나타나는 세 글자가 明鏡臺! 俯仰하여 천지에 塹愧(참괴)함이 없는 공명한 심경을 明鏡止水라고 이르나니, 명경대란 흐르는 물조차 머므르게 하는 곳이란 말인가! 아니면, 지니고 온 惡心을 여기서만은 淨하게 하지 아니치 못하는 곳이 바로 명경대란 말인가? 아무려나 아름다운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찻집을 나와 수십보를 바위로 올라가니, 깊고 푸른 黃天潭을 발 밑에 굽어보며 半空에 巍(외)然히 솟은 층암 절벽이 우뚝 마주 선다. 명경대였다. 틀림없는 化粧鏡 그대로였다. 옛날에 죄의 有無를 이 명경에 비추면, 그 밑에 흐르는 황천담에 죄의 影子가 반영되었다고 길잡이는 말한다.
명경! 세상에 거울처럼 두려운 물품이 다신들 있을 수 있을까? 인간비극은 거울이 발명되면서 비롯했고, 인류문화의 근원은 거울에서 출발했다고 하면 나의 지나친 억설일까? 백 번 놀라도 猶不足일 거울의 요술을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日常으로 대하게 되었다는 것은 또 얼마나 可驚할 일인가!
新羅朝 최후의 왕자인 麻衣太子는 시방 내가 서 있는 이 바위 위에 꿇어 엎드려 명경대를 우러러보며 오랜 세월을 두고 南無阿彌陀佛을 念誦했다니, 태자도 당신의 業罪를 明鏡에 映照해 보시려는 뜻이었을까? 雲上氣稟에 무슨 죄가 있으랴만, 登極하실 몸에 麻衣를 감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이, 이미 佛法이 말하는 전생의 緣일는지 모른다.
두고 떠나기 아쉬운 마음에 몇 번이고 뒤를 돌아다보며 계곡을 돌아나가니, 앞으로 閻(염)魔처럼 막아서는 雄姿가 釋迦峯, 뒤로 猛虎같이 덮누르는 神容이 天眞峯! 전후 좌우를 살펴봐야 峽窄(착)한 골짜기는 그저 그뿐인 듯, 진퇴유곡의 절박감을 느끼며 그대로 걸어 나가니, 간신히 트이는 또 하나의 峽谷!
몸에 감길 듯이 정겨운 黃泉江 물줄기를 끼고 돌면, 길은 막히는 듯 나타나고 나타나는 듯 막히고, 이 산에 흩어진 전설과 저 봉에 얽힌 由來談을 길잡이에게 들어가며, 쉬엄쉬엄 걸어 나가는 동안에 몸은 어느덧 深海같이 幽邃(수)한 樹林속을 거닐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천하에 수목이 이렇게도 至賤으로 많던가! 박달나무, 엄나무, 피나무, 자작나무, 고로쇠나무………나무의 종족은 하늘의 별보다도 많다고 한 어느 시의 구절을 연상하며 고개를 드니,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단풍뿐, 단풍의 산이요 단풍의 바다다.
산 전체가 燎原한 花園이요, 碧空에 巍(외)然히 솟은 峯峯은 그대로가 활짝 피어 오른 한 떨기의 꽃송이다. 산은 때 아닌 때에 다시 한번 봄을 맞아 百花爛漫한 것일까? 아니면, 不意의 神火에 이 봉 저 봉이 송두리째 붉게 타고 있는 것일까? 眞朱紅을 함빡 빨아들인 海綿같이 우러러 볼수록 찬란하다.
산은 언제 어디다 이렇게 많은 색소를 간직해 두었다가, 일시에 지천으로 내뿜는 것일까?
단풍이 이렇게까지 고운 줄은 몰랐다. 지완형은 몇번이고 탄복하면서 흡사히 동양화의 畵幅속을 거니는 감흥을 그대로 맞본다는 것이다. 정말 우리도 한 떨기 단풍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다리는 줄기요, 팔은 가지인 채, 피부는 단풍으로 물들어 버린 것 같다. 옷을 훨훨 벗어 꽉 쥐어짜면, 물에 헹궈 낸 빨래처럼 진주홍 물이 주르르 흘러 내릴 것만 같다.
그림 같은 蓮花潭 垂簾瀑을 玩賞하며, 몇십굽이의 石階와 木棧(잔)과 鐵索을 踏破하고 나니, 문득 눈 앞에 막아서는 무려 3백 단의 가파른 사닥다리---한 층계 한 층계 한사코 기어오르는 마지막 발걸음에서 시야는 一望無際로 탁 트인다. 여기가 해발 5천 척의 望軍臺----아! 천하는 이렇게도 광활하고 웅장하고 숭엄하던가!
이름도 정다운 白馬峯은 바로 指呼之間에 서 있고, 내일 오르기로 예정된 毘盧峯은 단걸음에 건너뛸 정도로 가깝다. 그 밖에도 有象無象의 허다한 峯들이 戰時에 割據하는 群雄들처럼 여기에서도 불끈 저기에서도 불끈, 시선을 낮춰 아래로 굽어보니, 발 밑은 千인(길 인)斷崖, 無限際로 뚝 떨어진 黃泉溪谷에 단풍이 선혈처럼 붉다. 우러러 보는 단풍이 새색시 머리의 七寶丹粧 같다면, 굽어보는 단풍은 치렁치렁 늘어진 규수의 치마폭 같다고나 할까. 수줍어 수줍어 생글 돌아서는 낯 붉힌 아가씨가 어느 구석에서 금새 튀어 나올 것도 같구나!
저물 무렵에 摩하(꾸짖을 가/하)衍의 旅舍를 찾았다.
산중에 사람이 귀해서였던가 어서 오십사는 상냥한 안주인의 환대도 은근하거니와, 문고리 잡고 말없이 맞아주는 여관집 아가씨의 정성은 무르익은 머루알같이 고왔다.
여장을 풀고 마하연庵을 찾아갔다. 여기는 禪院이어서 불경 공부하는 승려뿐이라고 한다. 크지도 않은 절이건만 승려수는 실로 30명는 됨직하다. 이런 深山에 웬 중이 그렇게도 많을까?
한없는 청산 끝나 가려 하는데, [無限靑山行欲盡]
흰구름 깊은 곳에 노승도 많아라. [白雲深處老僧多]
옛글 그대로다.
路毒을 풀 겸 식후에 바둑이나 두려고 남포동 아래에 앉으니 溫故之情이 불현듯 새로워졌다.
“남포등은 참말 오래간만인데.”
하며, 불을 바라보는 지완형의 말씨가 하도 따뜻해서, 나도 장난삼아 심지를 돋우었다 줄였다 하며 까맣게 잊었던 옛 기억을 되살렸다. 그리운 얼굴들이 흐르는 물에 落花송이 같이 떠돌았다.
밤 깊어 뜰에 나가니, 날씨는 흐려 달은 구름 속에 잠겼고 陰風이 몸에 신산하다. 이디서 솰솰 소란히 들려오는 소리가 있기에 바람 소린가 했으나, 가만히 들어보면 바람 소리만도 아니요, 물 소린가 했더니 물 소리만도 아니요, 나뭇잎 갈리는 소린가 했더니 나뭇잎 갈리는 소리만은 더구나 아니다. 아마 필시 바람 소리와 물 소리와 나뭇잎 갈리는 소리가 함께 어울린 교향악인 듯싶거니와 어쩌면 곤히 잠든 산의 호흡인지도 모를 일이다.
뜰을 어정어정 거닐다 보니, 여관집 아가씨는 등잔 아래 오로시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무슨 책일까? 밤 깊은 줄조차 모르고 골똘히 읽는 품이, 春香이 苔刑 맞으며 百으로 아뢰는 대목일 것도 같고, 陋名 쓴 薔花가 자결을 각오하고 원한을 하늘에 告祝하는 대목일 것도 같고, 시베리아로 定配가는 카츄사의 뒤를 네프 佰爵이 쫓아가는 대목일 것도 같고……..궁금한 판에 제멋대로 상상해 보는 동안에 산 속의 밤은 처량히 깊어 갔다.
자꾸 깊은 산 속으로만 들어가기에, 어느 세월에 이 골(谷)을 다시 헤어나볼까 두렵다. 이대로 친지와 처자를 버리고 중이 되는 수밖에 없나 보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이키니, 몸은 어느 새 구름을 타고 두리둥실 솟았는지, 群小峯이 발 밑에 절하여 아뢰는 비로봉 중허리에 나는 서 있었다. 여기서부터 날씨는 급격히 변화되어, 이 골짝 저 골짝에 안개가 자욱하고 陰散한 구름장이 산허리에 감기더니, 銀梯 金梯에 다달았을 때 기어코 비가 내렸다. 젖빛 같은 煙霧가 짙어서 지척을 분별할 수 없다. 雨裝없이 떠난 몸이기에 그냥 비를 맞으며 올라가노라니까 돌연 一陣狂風이 어디서 불어 왔는가, 휙 소리를 내며 雲霧를 몰아가자, 은하수 같이 정다운 은제와 朱紅 綢緞 폭같이 늘어놓은 붉은 진달래 단풍이 몰려가는 연무 사이로 나타나 보인다. 은제와 단풍은 마치 이랑이랑으로 엇바꾸어 가며 짜놓은 비단결같이 봉에서 골짜기로 퍼덕이며 흘러내리는 듯하다. 진달래는 꽃보다 단풍이 倍勝함을 이제야 깨닭았다.
오를수록 雨勢는 맹렬했으나, 광풍이 안개를 헤칠 때마다 濃霧속에서 忽顯忽沒하는 靈峯을 迎送하는 것도 과히 壯觀이었다.
산마루가 가까울수록 비는 暴注로 내리붓는다. 일만 이천 봉을 단박에 蒼海로 변해 버리는 것일까? 우리는 갈데없이 물에 빠진 쥐 모양을 해 가지고 비로봉 絶頂에 있는 찾집으로 찾아드니, 유리창 너머로 내다보고 섰던 童子가 문을 열어 우리를 영접하였고, 벌겋게 타오른 장독 같은 난로를 에워싸고 둘러앉았던 先着客들이 자리를 사양해 준다. 인정이 다사롭기 온실 같은데, 밖에서는 몰아치는 빗발이 어느덧 우박으로 변해서, 창을 때리고 문을 뒤흔들고 금시로 천지가 뒤집히는 듯하다. 龍虎가 싸우는 것일까? 산신령이 大怒하신 것일까? 驚天動地도 類萬不動이지 이렇게 萬象을 뒤집을 법이 어디 있으랴고, 肝腸을 죄는 몇 분이 지나자, 날씨는 삽시간에 잠든 양같이 온순해진다. 變幻도 이만하면 극치에 달한 듯싶다.
비로봉 最高點이라는 巖上에 올라 사방을 眺望했으나, 보이는 것은 그저 뭉게이는 雲海뿐----운해는 태평양보다도 깊으리라 싶다. 內.外.海 三 金剛을 一望地下에 굽어 살필 수 있다는 一地點에서 허무한 운해밖에 볼 수 없는 것이 可惜하나, 돌이켜 생각건대 해발 육천척에 다시 身長 오 척을 가하고 傲然히 佇(저)立해서, 만학천봉을 발 밑에 꿇어 엎드리게 하였으면 그만이지 더 바랄 것이 무엇이랴.
마음은 千軍萬馬에 군림하는 快勝將軍보다도 교만해진다.
비로봉 동쪽은 아낙네의 살결보다도 흰 자작나무의 樹海였다. 설 자리를 삼가 九重深處가 아니면 살지 않는 자작나무는 무슨 樹中公主이던가? 길이 저물어 지친 다리를 끌며 찾아든 곳이 哀話 맺혀 있는 龍馬石---마의태자의 무덤이 황혼에 고독했다. 陵이라기에는 너무 초라한 무덤---鐵柵도 床石도 없고, 風霖에 시달려 碑文조차 읽을 수 없는 화강암 비석이 오히려 처량하다.
무덤가 비에 젖은 두어 평 잔디밭 테두리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창명히 저무는 서녘 하늘에 化石된 태자의 愛騎 龍馬의 孤影이 슬프다. 무심히 떠도는 구름도 여기서는 잠시 머무르는듯, 素服한 百樺(화)는 한결같이 슬프게 서 있고 눈물 머금은 초저녁 달이 중천에 서럽다.
태자의 몸으로 麻衣를 걸치고 스스로 險山에 들어온 것은 千年 社稷을 망쳐 버린 비통을 한몸에 짊어지려는 苦行이었으리라. 울며 소맷귀 부여잡는 樂浪公主의 纖纖玉手를 뿌리치고, 돌아서 入山할 때에 대장부의 胸裡가 어떠했을까? 興亡이 在天이라, 天運을 슬퍼한들 무엇하랴만, 사람에게는 스스로 信義가 있으니, 태자가 고행으로 蒼氓(맹)에게 베푸신 도타운 慈惠가 천 년 후에 따습다.
천년 사직이 南柯一夢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다시 천 년이 지났으니, 悠久한 永劫으로 보면 천 년도 須臾(유)던가?
고작 七十生涯에 희로애락를 싣고 角逐하다가 한 웅큼 腐土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暗然히 愁愁롭다.)”
이 기행문은 범우사의 범우문고 209권째인 鄭飛石(1919-1911)의 수필집 “산정무한” 중 111쪽에서 122쪽 까지를 텍스트로 삼아 금강산에 당도하기까지의 첫날분은 제외하고 후반부만 全載하였고, 尙志社의 ‘한국 현대 명 수필선’을 참고로 했네. 이 글은 우리 年輩가 고등학교에 재학중일 때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던 정비석의 금강산 기행문이라네.
이 기행문을 여기에 옮긴 것은 이글에 대한 기억이 너무 생생하기 때문인데, 가을 단풍철만 되면 이글을 처음 배울 때에 인상깊게 받아들였던 감정으로, 어떤 형태의 글로도, 어떤 음악으로도, 어떤 그림으로도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할수 있을까? 했던 그때의 충격과 감상때문이라네. “……옷을 훨훨 벗어 꽉 쥐어짜면, 물에 헹궈 낸 빨래처럼 진주홍 물이 주르르 흘러 내릴 것만 같다.”는 대목은 描寫의 極致가 아닌가? 음악은 들어서 좋으면 좋고, 글은 읽어서 좋으면 좋고, 그림은 봐서 좋으면 좋은데, 이 기행문은 지금 이 나이에 읽어도 山勢만큼이나 秀麗한 그 筆致에 흠뻑 빠져들고는 한다네. 鄭敾(1676-1759)의 ‘金剛全圖’는 國寶로 지정된 빼어난 금강산의 그림인데, 이 그림은 적잖은 식견의 바탕이 있어야 제대로 이해를 할수 있다고 하지만, 이 기행문이야 어렵지 않게 우리 가슴에 와 닿은 편안한 글이 아닌가?
이 글을 배울 때만 하더라도, 동서 양 진영의 冷戰體制가 極을 향해 가파르게 치닫던 시절이라, 金剛石diamond처럼 아름답다는 금강산은 저어 멀리 다른 별(星)에 있는 산이겠거니 했었는데, 요사이는 가는 길이 다소 비싸게 치이고, 또 보는 곳도 제한적이기는하나 내 나라 내 땅에 있는 서울에서 고작 두서너 시간 자동차로 걸리는 咫尺의 거리에 있는 이 산을 마음대로 보고 즐길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나는 정비석선생님의 강연을 한번 들은 적이 있었는데, 50년대 말인가 60년대 초에 三一堂(進明女高의 강당)에서 있었던 강연으로, 주제는 확실치는 않지만 대강 ‘순수소설과 신문소설과의 관계’ 같은 제목이였는데, 순수소설이 뭐 별거냐 소설이라면 우선 재미가 있어야하고, 또 독자들이 많아야지 독자가 없는 소설이 무슨 소용이겠느냐는 것이 강연의 요지가 아니였나하는 기억이라네.
기록으로 보더라도 선생님은 아주 많은 소설을 신문이나 잡지에 연재하셨는데, 4.19 직후에 한국일보에 ‘革命前夜’라는 제목으로 4.19에 관한 소설을 연재하셨는데 10여회 분 쯤에서,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생들을 比喩한다는것이 돈 100환이 생기면 서울대생은 책을 사서 보고, 연대생은 구두를 닦아 폼을 내고, 고대생들은 막걸리를 마셔 기분을 낸다는 표현에 연대와 고대생들이 憤氣撑天하여 지금의 한국일보사 앞까지 와서 문제의 소설을 즉시 중단하고 사과하라는 요구에, 사과하고 글은 중도에서 끝낸 적이 있었는데……. 당시는 모든 문제가 데모로 하루가 시작돼서 데모로 하루가 끝나는 그런 世態였었고, 또 이런 데모 狂風과 데모 萬能이, 역사의 한 흐름이라고 보더라도, 5.16군사 구테타로 이어지는 하나의 빌미를 주지 않았나 하고 생각하고는 한다네.
鄭飛石선생님을 생각하면서…………..!
夏 童 2006년 10월
“(………………..이튿날 아침 고단한 마련해선 일찌거니 눈이 떠진 것은 몸이 지닌 기쁨이 하도 컷던 탓이었를까? 안타깝게도 간밤에 볼수 없었던 靈峯들을 對面하려고 새댁같이 수줍은 생각으로 밖에 나섰으나, 계곡은 여태 짙은 안개 속에서, 峻峯은 상기 깊은 구름 속에서 容易하게 자태를 엿보일 성싶지 않았고, 다만 가까운 데의 전나무, 잣나무 들만이 대장부의 기세로 활개를 쭉쭉 뻗고, 하늘을 찌를듯이 솟아 있는 것이 눈에 띄일 뿐이었다.
모두 근심없이 자란 나무들이었다. 靑雲의 뜻을 품고 하늘을 향하여 문실문실 자란 나무들이었다. 꼬질쪼질 뒤틀어지고 외틀어지고 한 野山 나무밖에 보지 못한 눈에는 귀공자와 같이 氣稟이 있어 보이는 나무들이었다.
朝飯후 短杖짚고 험난한 前程을 웃음경삼아 探勝의 길에 올랐을 때에는, 어느덧 구름과 안개가 개어져 遠近산악이 閱兵式하듯 점잖이들 버티고 서 있는데, 첫눈에 瞳子를 시울리게 하는 萬山의 색소는 紅! 이른바 단풍이란 저런 것인가 보다 하였다.
萬壑(학)千峯이 한바탕 흔들리게 웃는 듯, 山色은 붉을 대로 붉었다. 자세히 보니 紅만도 아니었다. 靑이 있고, 綠이 있고, 黃이 있고, 橙이 있고, 이를테면 산 전체가 무지개와 같이 복잡한 색소로 구성되였으면서도, 얼핏 보기에 朱紅만으로 보이는 것은 스펙트럼의 조화던가?
복잡한 것은 色만이 아니었다. 산의 용모는 더욱 多岐하다. 혹은 깍은 듯이 峻초(가파를 초)하고, 혹은 그린 듯이 溫厚하고, 혹은 막잡아 빚은 듯이 험상궂고, 혹은 틀에 박은 듯이 단정하고…….. 용모 풍취가 형형색색인 품이 이미 凡俗이 아니다.
산의 品評會를 연다면 여기서 더 호화로울수 있을까? 문자그대로 無窮無盡이다. 長安寺 맞은편 산에 鬱鬱蒼蒼 우거진 것은 다 잣나무뿐인데, 도시 二等邊三角形으로 가지를 늘어뜨리고 섰는 품이,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가 흡사히 고여 놓은 茶禮塔같다. 부처님은 禮佛床상만으로는 未洽해서, 이렇게 자연의 珍羞盛饌을 베풀어 놓으신 것일까? 얼핏 듣기에 부처님이 무엇을 탐낸다는 것이 千萬不當한 말 같지만 탐내는 그것이 物慾 저편의 존재인 자연이고 보면, 자연을 맘껒 탐낸다는 것이 이미 佛心이 아니고 무엇이랴!
장안사 앞으로 흐르는 溪流를 끼고 돌며 몇 굽이의 峽谷을 거슬러 올라가니, 산과 물이 어울리는 지점에 조그마한 찻집이 있다.
다리도 쉴 겸, 스탬프북을 한권 사서 옆에 구비된 인장을 찍으니, 그림과 함께 紙面에 나타나는 세 글자가 明鏡臺! 俯仰하여 천지에 塹愧(참괴)함이 없는 공명한 심경을 明鏡止水라고 이르나니, 명경대란 흐르는 물조차 머므르게 하는 곳이란 말인가! 아니면, 지니고 온 惡心을 여기서만은 淨하게 하지 아니치 못하는 곳이 바로 명경대란 말인가? 아무려나 아름다운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찻집을 나와 수십보를 바위로 올라가니, 깊고 푸른 黃天潭을 발 밑에 굽어보며 半空에 巍(외)然히 솟은 층암 절벽이 우뚝 마주 선다. 명경대였다. 틀림없는 化粧鏡 그대로였다. 옛날에 죄의 有無를 이 명경에 비추면, 그 밑에 흐르는 황천담에 죄의 影子가 반영되었다고 길잡이는 말한다.
명경! 세상에 거울처럼 두려운 물품이 다신들 있을 수 있을까? 인간비극은 거울이 발명되면서 비롯했고, 인류문화의 근원은 거울에서 출발했다고 하면 나의 지나친 억설일까? 백 번 놀라도 猶不足일 거울의 요술을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日常으로 대하게 되었다는 것은 또 얼마나 可驚할 일인가!
新羅朝 최후의 왕자인 麻衣太子는 시방 내가 서 있는 이 바위 위에 꿇어 엎드려 명경대를 우러러보며 오랜 세월을 두고 南無阿彌陀佛을 念誦했다니, 태자도 당신의 業罪를 明鏡에 映照해 보시려는 뜻이었을까? 雲上氣稟에 무슨 죄가 있으랴만, 登極하실 몸에 麻衣를 감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이, 이미 佛法이 말하는 전생의 緣일는지 모른다.
두고 떠나기 아쉬운 마음에 몇 번이고 뒤를 돌아다보며 계곡을 돌아나가니, 앞으로 閻(염)魔처럼 막아서는 雄姿가 釋迦峯, 뒤로 猛虎같이 덮누르는 神容이 天眞峯! 전후 좌우를 살펴봐야 峽窄(착)한 골짜기는 그저 그뿐인 듯, 진퇴유곡의 절박감을 느끼며 그대로 걸어 나가니, 간신히 트이는 또 하나의 峽谷!
몸에 감길 듯이 정겨운 黃泉江 물줄기를 끼고 돌면, 길은 막히는 듯 나타나고 나타나는 듯 막히고, 이 산에 흩어진 전설과 저 봉에 얽힌 由來談을 길잡이에게 들어가며, 쉬엄쉬엄 걸어 나가는 동안에 몸은 어느덧 深海같이 幽邃(수)한 樹林속을 거닐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천하에 수목이 이렇게도 至賤으로 많던가! 박달나무, 엄나무, 피나무, 자작나무, 고로쇠나무………나무의 종족은 하늘의 별보다도 많다고 한 어느 시의 구절을 연상하며 고개를 드니,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단풍뿐, 단풍의 산이요 단풍의 바다다.
산 전체가 燎原한 花園이요, 碧空에 巍(외)然히 솟은 峯峯은 그대로가 활짝 피어 오른 한 떨기의 꽃송이다. 산은 때 아닌 때에 다시 한번 봄을 맞아 百花爛漫한 것일까? 아니면, 不意의 神火에 이 봉 저 봉이 송두리째 붉게 타고 있는 것일까? 眞朱紅을 함빡 빨아들인 海綿같이 우러러 볼수록 찬란하다.
산은 언제 어디다 이렇게 많은 색소를 간직해 두었다가, 일시에 지천으로 내뿜는 것일까?
단풍이 이렇게까지 고운 줄은 몰랐다. 지완형은 몇번이고 탄복하면서 흡사히 동양화의 畵幅속을 거니는 감흥을 그대로 맞본다는 것이다. 정말 우리도 한 떨기 단풍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다리는 줄기요, 팔은 가지인 채, 피부는 단풍으로 물들어 버린 것 같다. 옷을 훨훨 벗어 꽉 쥐어짜면, 물에 헹궈 낸 빨래처럼 진주홍 물이 주르르 흘러 내릴 것만 같다.
그림 같은 蓮花潭 垂簾瀑을 玩賞하며, 몇십굽이의 石階와 木棧(잔)과 鐵索을 踏破하고 나니, 문득 눈 앞에 막아서는 무려 3백 단의 가파른 사닥다리---한 층계 한 층계 한사코 기어오르는 마지막 발걸음에서 시야는 一望無際로 탁 트인다. 여기가 해발 5천 척의 望軍臺----아! 천하는 이렇게도 광활하고 웅장하고 숭엄하던가!
이름도 정다운 白馬峯은 바로 指呼之間에 서 있고, 내일 오르기로 예정된 毘盧峯은 단걸음에 건너뛸 정도로 가깝다. 그 밖에도 有象無象의 허다한 峯들이 戰時에 割據하는 群雄들처럼 여기에서도 불끈 저기에서도 불끈, 시선을 낮춰 아래로 굽어보니, 발 밑은 千인(길 인)斷崖, 無限際로 뚝 떨어진 黃泉溪谷에 단풍이 선혈처럼 붉다. 우러러 보는 단풍이 새색시 머리의 七寶丹粧 같다면, 굽어보는 단풍은 치렁치렁 늘어진 규수의 치마폭 같다고나 할까. 수줍어 수줍어 생글 돌아서는 낯 붉힌 아가씨가 어느 구석에서 금새 튀어 나올 것도 같구나!
저물 무렵에 摩하(꾸짖을 가/하)衍의 旅舍를 찾았다.
산중에 사람이 귀해서였던가 어서 오십사는 상냥한 안주인의 환대도 은근하거니와, 문고리 잡고 말없이 맞아주는 여관집 아가씨의 정성은 무르익은 머루알같이 고왔다.
여장을 풀고 마하연庵을 찾아갔다. 여기는 禪院이어서 불경 공부하는 승려뿐이라고 한다. 크지도 않은 절이건만 승려수는 실로 30명는 됨직하다. 이런 深山에 웬 중이 그렇게도 많을까?
한없는 청산 끝나 가려 하는데, [無限靑山行欲盡]
흰구름 깊은 곳에 노승도 많아라. [白雲深處老僧多]
옛글 그대로다.
路毒을 풀 겸 식후에 바둑이나 두려고 남포동 아래에 앉으니 溫故之情이 불현듯 새로워졌다.
“남포등은 참말 오래간만인데.”
하며, 불을 바라보는 지완형의 말씨가 하도 따뜻해서, 나도 장난삼아 심지를 돋우었다 줄였다 하며 까맣게 잊었던 옛 기억을 되살렸다. 그리운 얼굴들이 흐르는 물에 落花송이 같이 떠돌았다.
밤 깊어 뜰에 나가니, 날씨는 흐려 달은 구름 속에 잠겼고 陰風이 몸에 신산하다. 이디서 솰솰 소란히 들려오는 소리가 있기에 바람 소린가 했으나, 가만히 들어보면 바람 소리만도 아니요, 물 소린가 했더니 물 소리만도 아니요, 나뭇잎 갈리는 소린가 했더니 나뭇잎 갈리는 소리만은 더구나 아니다. 아마 필시 바람 소리와 물 소리와 나뭇잎 갈리는 소리가 함께 어울린 교향악인 듯싶거니와 어쩌면 곤히 잠든 산의 호흡인지도 모를 일이다.
뜰을 어정어정 거닐다 보니, 여관집 아가씨는 등잔 아래 오로시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무슨 책일까? 밤 깊은 줄조차 모르고 골똘히 읽는 품이, 春香이 苔刑 맞으며 百으로 아뢰는 대목일 것도 같고, 陋名 쓴 薔花가 자결을 각오하고 원한을 하늘에 告祝하는 대목일 것도 같고, 시베리아로 定配가는 카츄사의 뒤를 네프 佰爵이 쫓아가는 대목일 것도 같고……..궁금한 판에 제멋대로 상상해 보는 동안에 산 속의 밤은 처량히 깊어 갔다.
자꾸 깊은 산 속으로만 들어가기에, 어느 세월에 이 골(谷)을 다시 헤어나볼까 두렵다. 이대로 친지와 처자를 버리고 중이 되는 수밖에 없나 보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이키니, 몸은 어느 새 구름을 타고 두리둥실 솟았는지, 群小峯이 발 밑에 절하여 아뢰는 비로봉 중허리에 나는 서 있었다. 여기서부터 날씨는 급격히 변화되어, 이 골짝 저 골짝에 안개가 자욱하고 陰散한 구름장이 산허리에 감기더니, 銀梯 金梯에 다달았을 때 기어코 비가 내렸다. 젖빛 같은 煙霧가 짙어서 지척을 분별할 수 없다. 雨裝없이 떠난 몸이기에 그냥 비를 맞으며 올라가노라니까 돌연 一陣狂風이 어디서 불어 왔는가, 휙 소리를 내며 雲霧를 몰아가자, 은하수 같이 정다운 은제와 朱紅 綢緞 폭같이 늘어놓은 붉은 진달래 단풍이 몰려가는 연무 사이로 나타나 보인다. 은제와 단풍은 마치 이랑이랑으로 엇바꾸어 가며 짜놓은 비단결같이 봉에서 골짜기로 퍼덕이며 흘러내리는 듯하다. 진달래는 꽃보다 단풍이 倍勝함을 이제야 깨닭았다.
오를수록 雨勢는 맹렬했으나, 광풍이 안개를 헤칠 때마다 濃霧속에서 忽顯忽沒하는 靈峯을 迎送하는 것도 과히 壯觀이었다.
산마루가 가까울수록 비는 暴注로 내리붓는다. 일만 이천 봉을 단박에 蒼海로 변해 버리는 것일까? 우리는 갈데없이 물에 빠진 쥐 모양을 해 가지고 비로봉 絶頂에 있는 찾집으로 찾아드니, 유리창 너머로 내다보고 섰던 童子가 문을 열어 우리를 영접하였고, 벌겋게 타오른 장독 같은 난로를 에워싸고 둘러앉았던 先着客들이 자리를 사양해 준다. 인정이 다사롭기 온실 같은데, 밖에서는 몰아치는 빗발이 어느덧 우박으로 변해서, 창을 때리고 문을 뒤흔들고 금시로 천지가 뒤집히는 듯하다. 龍虎가 싸우는 것일까? 산신령이 大怒하신 것일까? 驚天動地도 類萬不動이지 이렇게 萬象을 뒤집을 법이 어디 있으랴고, 肝腸을 죄는 몇 분이 지나자, 날씨는 삽시간에 잠든 양같이 온순해진다. 變幻도 이만하면 극치에 달한 듯싶다.
비로봉 最高點이라는 巖上에 올라 사방을 眺望했으나, 보이는 것은 그저 뭉게이는 雲海뿐----운해는 태평양보다도 깊으리라 싶다. 內.外.海 三 金剛을 一望地下에 굽어 살필 수 있다는 一地點에서 허무한 운해밖에 볼 수 없는 것이 可惜하나, 돌이켜 생각건대 해발 육천척에 다시 身長 오 척을 가하고 傲然히 佇(저)立해서, 만학천봉을 발 밑에 꿇어 엎드리게 하였으면 그만이지 더 바랄 것이 무엇이랴.
마음은 千軍萬馬에 군림하는 快勝將軍보다도 교만해진다.
비로봉 동쪽은 아낙네의 살결보다도 흰 자작나무의 樹海였다. 설 자리를 삼가 九重深處가 아니면 살지 않는 자작나무는 무슨 樹中公主이던가? 길이 저물어 지친 다리를 끌며 찾아든 곳이 哀話 맺혀 있는 龍馬石---마의태자의 무덤이 황혼에 고독했다. 陵이라기에는 너무 초라한 무덤---鐵柵도 床石도 없고, 風霖에 시달려 碑文조차 읽을 수 없는 화강암 비석이 오히려 처량하다.
무덤가 비에 젖은 두어 평 잔디밭 테두리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창명히 저무는 서녘 하늘에 化石된 태자의 愛騎 龍馬의 孤影이 슬프다. 무심히 떠도는 구름도 여기서는 잠시 머무르는듯, 素服한 百樺(화)는 한결같이 슬프게 서 있고 눈물 머금은 초저녁 달이 중천에 서럽다.
태자의 몸으로 麻衣를 걸치고 스스로 險山에 들어온 것은 千年 社稷을 망쳐 버린 비통을 한몸에 짊어지려는 苦行이었으리라. 울며 소맷귀 부여잡는 樂浪公主의 纖纖玉手를 뿌리치고, 돌아서 入山할 때에 대장부의 胸裡가 어떠했을까? 興亡이 在天이라, 天運을 슬퍼한들 무엇하랴만, 사람에게는 스스로 信義가 있으니, 태자가 고행으로 蒼氓(맹)에게 베푸신 도타운 慈惠가 천 년 후에 따습다.
천년 사직이 南柯一夢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다시 천 년이 지났으니, 悠久한 永劫으로 보면 천 년도 須臾(유)던가?
고작 七十生涯에 희로애락를 싣고 角逐하다가 한 웅큼 腐土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暗然히 愁愁롭다.)”
이 기행문은 범우사의 범우문고 209권째인 鄭飛石(1919-1911)의 수필집 “산정무한” 중 111쪽에서 122쪽 까지를 텍스트로 삼아 금강산에 당도하기까지의 첫날분은 제외하고 후반부만 全載하였고, 尙志社의 ‘한국 현대 명 수필선’을 참고로 했네. 이 글은 우리 年輩가 고등학교에 재학중일 때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던 정비석의 금강산 기행문이라네.
이 기행문을 여기에 옮긴 것은 이글에 대한 기억이 너무 생생하기 때문인데, 가을 단풍철만 되면 이글을 처음 배울 때에 인상깊게 받아들였던 감정으로, 어떤 형태의 글로도, 어떤 음악으로도, 어떤 그림으로도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할수 있을까? 했던 그때의 충격과 감상때문이라네. “……옷을 훨훨 벗어 꽉 쥐어짜면, 물에 헹궈 낸 빨래처럼 진주홍 물이 주르르 흘러 내릴 것만 같다.”는 대목은 描寫의 極致가 아닌가? 음악은 들어서 좋으면 좋고, 글은 읽어서 좋으면 좋고, 그림은 봐서 좋으면 좋은데, 이 기행문은 지금 이 나이에 읽어도 山勢만큼이나 秀麗한 그 筆致에 흠뻑 빠져들고는 한다네. 鄭敾(1676-1759)의 ‘金剛全圖’는 國寶로 지정된 빼어난 금강산의 그림인데, 이 그림은 적잖은 식견의 바탕이 있어야 제대로 이해를 할수 있다고 하지만, 이 기행문이야 어렵지 않게 우리 가슴에 와 닿은 편안한 글이 아닌가?
이 글을 배울 때만 하더라도, 동서 양 진영의 冷戰體制가 極을 향해 가파르게 치닫던 시절이라, 金剛石diamond처럼 아름답다는 금강산은 저어 멀리 다른 별(星)에 있는 산이겠거니 했었는데, 요사이는 가는 길이 다소 비싸게 치이고, 또 보는 곳도 제한적이기는하나 내 나라 내 땅에 있는 서울에서 고작 두서너 시간 자동차로 걸리는 咫尺의 거리에 있는 이 산을 마음대로 보고 즐길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나는 정비석선생님의 강연을 한번 들은 적이 있었는데, 50년대 말인가 60년대 초에 三一堂(進明女高의 강당)에서 있었던 강연으로, 주제는 확실치는 않지만 대강 ‘순수소설과 신문소설과의 관계’ 같은 제목이였는데, 순수소설이 뭐 별거냐 소설이라면 우선 재미가 있어야하고, 또 독자들이 많아야지 독자가 없는 소설이 무슨 소용이겠느냐는 것이 강연의 요지가 아니였나하는 기억이라네.
기록으로 보더라도 선생님은 아주 많은 소설을 신문이나 잡지에 연재하셨는데, 4.19 직후에 한국일보에 ‘革命前夜’라는 제목으로 4.19에 관한 소설을 연재하셨는데 10여회 분 쯤에서,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생들을 比喩한다는것이 돈 100환이 생기면 서울대생은 책을 사서 보고, 연대생은 구두를 닦아 폼을 내고, 고대생들은 막걸리를 마셔 기분을 낸다는 표현에 연대와 고대생들이 憤氣撑天하여 지금의 한국일보사 앞까지 와서 문제의 소설을 즉시 중단하고 사과하라는 요구에, 사과하고 글은 중도에서 끝낸 적이 있었는데……. 당시는 모든 문제가 데모로 하루가 시작돼서 데모로 하루가 끝나는 그런 世態였었고, 또 이런 데모 狂風과 데모 萬能이, 역사의 한 흐름이라고 보더라도, 5.16군사 구테타로 이어지는 하나의 빌미를 주지 않았나 하고 생각하고는 한다네.
鄭飛石선생님을 생각하면서…………..!
夏 童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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