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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쟁 참전이야기(17)...전쟁터의 망중한(忙中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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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요병장
작성일 2006-11-17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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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28연대가 있던 투이호아 해변(2004년)
예전엔 푸른물과 눈부신 하얀 백사장이 있었으나 지금은 새우양식장을 만드느라
온통 훼손되어 옛모습은 찾을수 없다
바로 그 옆에 연하여 우리 12군수지원대대의 휴양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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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선교(三善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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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상처는 무서웠다.
비록 직접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나 하루도 거르지않고 들려오는 포성과
헬기소리,밤마다 터지는 조명탄과,부대야간초소매복,그리고 작전때면 어김없이
실려오는 부상병들의 모습....
전쟁터의 매일매일은 이렇게 숨막히는 긴장의 연속이다.
밤마다 겪는 적과의 사투에 대한 악몽과 고국에 대한 향수는
시간이 갈수록 짙어만가서 파월기간이 길어지면 질수록 잠못이루는 밤 또한
늘어갔다.
크던 작던 작전이 있던 날이면 우리부대내도 어김없이 비상이 덩달아 걸리고
그때마다 병사들은 방커속에서 모기와 싸우면서 밤을 꼬박 새웠다.
그런날이면 그 이튼날은 하루종일 비몽사몽으로 업무에 임해야 했다.
졸린 눈꺼풀을 부릅뜨고 작전부대에서 올라오는 전과분석과
포상대상을 분류하느라 눈코뜰새 없는 하루가 된다.
그러다보니 병사들의 집중력도 떨어져 안전사고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곤 했다.
한번은 서무계 김선홍병장이 과장님(조태승 대위)의 권총을 총집에 넣다가
실수로 오발사고를 냈다.
다행히 발사된 총알은 바닥을 튕겨서 천장에 밖혀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이 일로 인해 김병장은 사흘동안 영창을 다녀왔다.
아무리 전쟁터라지만 안전사고에 대한 징계만은 엄했다.
그런데 영창을 다녀온 김병장의 말이 걸작이였다.
"고생했지?"
우리가 위로하니까 그는 싱글벙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니...그냥 편하게 쉬다 왔어.얼차례도 없고 하루종일 라디오만 듣다가 온걸.
월남 좋긴 좋더라"
이렇게 쌓인 스트레스를
장병들은 토요일 오후가 되면 이 삼선교에서 풀었다.
삼선교(三善橋)-
세번 덕(德)을 쌓으라고 지은이름인가?
고국을 사랑하고, 전우를 사랑하고,베트남을 사랑하라는 의미인가?
바다물위에 페트럼통을 밧줄로 엮어서 부목을 만들고 그위에 팔각정을 짓고
이름을 삼선교라 부쳤다.
남지나해는 거울처럼 맑았다.
일년내내 거친파도 한번없고 바다속에는그흔한 해초하나 없이 깨끗했다.
물속에 암석이 없으니 수초가 자랄리 없고 다만 수심이 좀 깊은곳 바닥에서
자생하던 해초가 더러 파도에 밀려 해변으로 흘러 나온다.
멀리보이는 수평선은 그림처럼 조용했고, 이따금 보급품을 실은 수송선만이
가뭇가뭇 눈에 띄일뿐-
저 뒷편 혼바산은 연일 포격이 난무하고 피튀기는 전투가 벌어지지만
이 앞의 남지나해는 무엇때문에 그러느냐는듯 평화로운 침묵에 깃들어 있다.
해안을 길게 이은 하얀 백사장은 솜처럼 부드러웠다.
조개쪼각 하나 섞임없이 반짝이는 순백의 모래들은
걸을때마다 발밑에서 부드럽게 속삭이는 밀어(蜜語)소리를 낸다.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이되면
우리는어김없이 이 삼선교로 휴양을 즐기러 나왔다.
몇시간이고 맘껏 수영을 하다보면 식사시간을 놓치기 일수였다.
그러나 누구도 이를 개의치 않았다.
시간이 늦어 배식이 끝났더라도 내무반 침대밑에가면
꼬불쳐둔 C-레이션과 B-레이션이 지천으로 있지 않은가.
수영에 지치면
해안가 백사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낙하산으로 천막을 쳐놓고
그밑에 둥그렇게 모여앉아 '아까이' 녹음기에서 울려나오는
이미자의 "울어라 열풍아"를 들으면서 "진져"나 "버드와이져"를 마신다.
어느정도 거나해지면 px에서 갖어온 양주나 월남상점에서 사온 독한 '럼'주로
몽롱한 기분을 더욱 돋운다.
시원한 미풍에 고국의 향수가 절로 실려온다.
이때쯤이면 누구라 할것없이 머언 고국쪽을 향해 시선을 옮기며
오늘도 어김없이 은은이 울리는포성을 반주삼아
구성진 가락을 한차례 뽑아본다.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
(작전이 끝나면 야자수해변에서 1주일간의 달콤한 휴식이 주어진다)
병장의 전투수당은 한달 54달러였다.
이것을 한국돈으로 환산하면 15,000원쯤 되었다.
그당시 한국에서 받은 병장월급이 얼마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450원이 조금 넘는다고 기억된다)
상병이 360원인가 받았으니 그에 비하면 그리 적은 돈은 아니였다.
기억나는건 px에서 맥주 한깡값이 한국에서 막걸리 한대접값 정도였으니
그 귀한 맥주를 아무리 원없이 마셔도 병장수당으로 충분했었다.
어떤사람은 수당을 몽땅 집으로 송금하기도 했고(의무적으로 80%이상은 송금해야 했다),
그렇지 않는 장병들은 그당시는 엄청 귀한 시계나 라디오,선풍기,녹음기,
카메라등을 사모아서 귀국BOX를 그득 채웠다.
일개 사병들의 침대 머리맡에 대형 M9 이나 아까이 녹음기가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 계급별 월간 전투수당 (단위:$ ;30일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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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급 수당액 계 급 수당액 계 급 수당액
중 장 300 대 위 150 하 사 57
소 장 240 중 위 135 병 장 54
준 장 210 소 위 120 상 병 45
대 령 195 준 위 105 일 병 40.5
중 령 180 상 사 75 이 병 37.5
소 령 165 중 사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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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월당시의 환율(미화 1$당 : 1967년 4월 29일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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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원): 272.55 월남(동=피아스타): 118.00 일본(엔): 36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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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에서 사용되던 "군표(軍票)"---전투수당을 진짜 달러대신 군표로 줬다)
(베트남 화폐=동(피아스트)
군표는 원래 부대내 PX에서 밖에 사용못한다.
미국 본토 달러대신 만들어진 임시 군용(軍用)화폐이기때문이다.
그러나 어디가서도 이 군표는 버젓이 통용됐다.
간혹 월남돈인 피아스타(동)와 바꿔서 사용하기도 했는데
다만 이경우 바꾸는 환율때문에 간혹 실갱이가 있긴하지만-
나트랑에 있는「아리랑식당」에 가면 군표는
본토 달러와 마찬가지로 대 환영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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