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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이 간 바가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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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권오원
작성일 2006-11-27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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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86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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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이 간 바가지를………
일전에 한 모임에서 이런 의견을 나눈 적이 있었네. 언젠가 이 지구가 멸망한다면 그 원인이 무엇이 될까라는 한 참석자의 제의에, 座中에 있던 이들이 이런 저런 의견을 얘기했었었는데, 어떤 이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해답을 찾으려 했고, 어떤 이는 과학적인 관점에서 그 이유를 찾으려 했고, 또 어떤 이는 환경파괴와 오염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 했는데 모두 다 설득력이 있는 해답이였었네.
또, 좌중의 공통된 의견의 하나는 오늘날의 기후변화는 우리 또래가 어렸을 때 겪었던 그런 기후와는 전혀 다르다는 의견이였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들이닥치는 강추위에 폭설에, 폭염에 긴 가뭄에, 강풍을 동반한 집중 호우에 더하여 서서히 그러나 꾸준히 진행되는 지구 溫暖化는 생태계를 뿌리부터 바뀌고 있는 중이라고…… 겨울철에 우리들이 경험했던 三寒四溫은 이제는 이 말 자체를 아주 쓸수 없게 되었음은 물론이려니와 이런 날씨를 다시는 겪을 수 없게 되었다는 의견들이였고, 확연하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로 나누어지던 우리나라의 아름답던 기후는 이제는 춥고, 덥고의 兩 季節 뿐이라는데……..
영국의 산업혁명이후에 서구 列强들의 공통된 관심사는 다량으로 쏟아져 나오는 생산품들의 소비처 찾기였고, 이런 소비처를 찾는 일이 경쟁적으로 이루어 진 형태가 바로 식민지화 정책이였는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런 형태의 소비처 찾기는 방법만 달리 한 채 계속되고 있다고 보아야지? 부산물로 얻은 것이 도시로, 도시로 몰려드는 일손들의 잠자리를 해결하기 위해 지은 숙소가 영국식으로는 flat(미국식으로는 apartment)였고, 이 아파트 주거형태가 유독 우리나라에서 가장 적절한 주거문화로 확실하게 자리매김을 한 것은 아파트에 우리의 전통 난방구조인 온돌을 接木한 것이라는군.
예나 지금이나 우리들이 흔히 접하는 무슨 무슨 경제이론이나, 무슨 무슨 경영이론의 핵심은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물품을, 더 싼 값에, 더 많이 생산해서 소비를 부추기는 이론인데 이런 이론에 근거하여 지구상에 있는 크고 작은 모든 공장에서 공통적으로 하는 일이 더 좋은 물품을, 더 좋은 값에, 더 많이 생산해서 소비를 더 촉진시키는 일이 아닌가? 그러니 우리모두는 부지부식간에 그네들의 부추김에 놀아?나서 하지 않아도 될 소비를 더 많이 하고 있는 꼴이 아닌가?
미국 어느 한 대학에서 실험을 했는데, 사람, 개, 고양이에게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주고 마음껒 먹으라고 한 후에 위를 해부해 보았더니, 개와 고양이는 음식물이 위에 약 80% 들어 찬 반면에, 사람의 위에는 解剖刀가 들어갈 틈이 없이 꽉 차 있더라더군!
내 아버님이 살아 계실 때 우리들이 때로는 음식을 허겁지겁 먹을라 치면 늘 하시는 말씀이, “얘들아, 음식을 그렇게 급히 먹으면 체하니라. 그리고, 음식은 한 숟가락 더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匙箸를 놓아라. 그게 定量이니라”고 하셨는데 正鵠을 찌른 지적이라고 지금도 살아가면서 삶의 龜鑑으로 삼고 있지만, “한 숟가락 더 먹으면 탈이 나고, 또 한 숟가락 덜 먹으면 탈이 나지 않는 다고”도 하셨는데, 이 말씀이 어찌 음식을 먹고 마시기에만 限한 이야기가 될수 있겠는가? 여러나라에서 겪고 있는 비만문제는, 先天性을 감안하더라도, 食貪에서 오는 한 숟가락 더 먹기의 過가 아니겠는가? 先人들은 늘 過猶不及한 삶을 살라고 권유해 왔지만……….
미국의 수필가이자, 시인이며, 자연주의자인 Thoreau, Henry David (1817-1862)는 그의 저서, “Walden: or, Life in the Woods에서, ‘Plain living and high thinking’을 이야기했는데 이는 法頂 스님의 ‘無所有’와 직.간접의 연관이 있는 것 같고, 또 우리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安貧樂道’와도 무관하지 않는 사상이 아니겠는가?
미국의 Indian이나, 호주의 Aborigine이나, 뉴질랜드의 Maori는 소위 문명화된 사람들이 그들의 삶의 터전을 무력으로 빼앗고 마련해준 조그만한 터전에서 지친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이네들의 삶의 본질은 자연에 순응하며, 貪하지 않고, 욕심내지 않고, 자연과 함께 공존.공생하며, 조화와 균형을 이루면서 사는 것이 였는데, 이런 삶이야 말로 온 인류가 希求해오고 있는 유토피아적인 참 삶이 아니였겠는가? 그런데, 이제는, 이런 삶이 먼 훗날 어린세대들에게 들려줄 하나의 옛 이야기로 남게 되었으니!
貪과 過는 사람이라는 동물의 타고난 본성의 하나이며, 이는 다른 동물에서는 좀처럼 볼수없는 인간의 특성중에 하나라고 보는데, 보기에 따라서는 장점이 될수도 있고 또 단점이 될수도 있는 것으로, 장점으로는 서로 경쟁을 시키는 원동력이 되니 모든 부문의 발전에 없서서는 안되는 하나의 因子가 되겠지만, 반대로 단점으로는 필요이상으로 축적하고 소비하다보니 낭비의 근원이 되고 더 나아가서는 자연파괴와 환경오염의 주범이 아니겠는가?
어느 한 집의 목욕실에는, 목욕할 때 쓰는 조그마한 프라스틱 바가지에 금이가자 이집 아낙네는 천원에도 골라 살수 있는 그 바가지를 꿰매서 쓰고 있고, 또 같은 집의 목욕실에는 오래된 알루미늄대야에 금이가자 이집 아낙네는 씹다 버려야 할 껌chewing gum을 그곳에 발라서 새것처럼 쓰고 있더군. 우리 모두가 본 받아야 할 생활의 한 지혜가 아니겠는가?
우리들의 일상 생활의 특징중에 하나는 ‘남 따라하기’라고 하는데, 남이 그것을 먹으면 나도 따라 먹어야 하고, 남이 그 옷을 입으면 나도 따라 입어야 하고, 남이 아파트의 발코니를 뜯어 고치면 나도 따라 고쳐야 마음이 놓인다고 하는데, 전문가들은 발코니의 역할을 사람들의 코, 귀, 눈, 피부등에 비유해서 설명을 했는데 밖에서 몸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먼지, 찬공기, 더운 공기, 소음. 강한 햋볕, 바람등을 이런 기관에서 한번 걸러서 몸속으로 들여보내니 망정이지 만일 이런 器官들이 없다면? 이라고 했더군. ‘남 따라하기’는 일상생활의 또 하나의 過가 아니겠는가?
또, 다른 우리생활의 특징중에 하나는 ‘남 눈치보기’라고 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승용차의 크기라고 하는군. 2005년의 우리나라 일인당 소득수준은 1985년의 일본과 거의 비슷하다고 하는데, 당시 일본의 중형차(2,000cc 이상)의 비율은 2%내외에 소형차는 48% 내외 였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오히려 이와는 반대라고 하는군. 우리나라 승용차의 특징중에 하나는 같은 용량의 排氣量이라 하더라도 車體가 더 길고, 더 넓고, 더 높다고 하는데 이는 ‘옷이 날개’라는 말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이 ‘남 눈치보기’ 또한 생활의 한 過가 아니겠는가.
세금으로 예산을 쓰는 사람들이 연말만 되면 앞 다투어 멀쩡한 人道의 보도불럭을 교체하던 일이 이제는 古典的인 이야기가 되었고, 나라 안팎에서 엄청나게 빨리 달라져 가는 여건과 사태변화에 그때 그때 적절하게 대처하지는 못하고 무슨 일만 벌어졌다 하면 세금쓰기를 경쟁이라도 하듯이 報償할 궁리만 하는 것은, 분명히 세금쓰기의 한 過가 아니겠는가.
자식들이 어렸을 때 밥상에 같이 앉아 식사를 할 때면 가끔씩 이르는 말이, 이 밥 한 알이 밥상에 올라오자면 꼭 일년이 걸려야 하니, 한 알의 밥알을 값으로 따지지 말고 그 가치로 따져 아주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당부를 하고는 했는데……. 요사이 집 밖에서 식사를 할 때 종종 겪는 일중에 하나는 어른들의 밥 그릇에 밥알이 허옇게 붙은 채로 밥그릇을 남기는 것을 보고는 하는데……. 여름철에는 겨울처럼 지나고, 또 겨울철에는 여름처럼 지나야 가장 현대적인 삶을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어쩌구 저쩌구 해 보았자 소귀에 경 읽기니, 이 또한 다른 형태의 생활의 한 過가 아니겠는가?
의학의 비약적인 발달로 한국만 하더라도 여자는 80세 전후, 남자는 73세 전후의 평균수명을 갖게 되었는데, 앞으로 해가 지날수록 평균수명은 더 늘어 날 테고, 늘어 날 때마다 더more&more 더를 바라는 마음은 변치 않을 테니, 이 또한 욕심위의 過가 아니겠는가? 다른 동물사회에서 적용되는 생존의 가치와 척도는 생산성의 유.무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음에 반해, 인간동물의 사회에서는 생산성과는 무관하게 천명인 목숨의 연장이 인위적으로 이루어 지고 있는 것은, 天命에 反하는 過가 아니겠는가?
사람이라는 동물의 貪과 過가 지금의 이 찬란한 地球文明과 文化를 창조해 냈고, 또 앞으로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갈 원동력이 될 것이 라고 본다면, 이 탐과 과는, 보기에 따라서는, 地球滅亡의 제일의 원인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늘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분수를 지키고 만족을 안다면 모든 일에 분쟁이 없고 삶이 평안하다고 하는데, 미국의 Indian족이나, 호주의 Aborigine족이나, 뉴질랜드의 Maori족 처럼 ‘守分知足’하면서 ‘安貧樂道’한 삶을 살기가 어디 말처럼 그리 쉽겠는가?
夏 童 2006년 11월
일전에 한 모임에서 이런 의견을 나눈 적이 있었네. 언젠가 이 지구가 멸망한다면 그 원인이 무엇이 될까라는 한 참석자의 제의에, 座中에 있던 이들이 이런 저런 의견을 얘기했었었는데, 어떤 이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해답을 찾으려 했고, 어떤 이는 과학적인 관점에서 그 이유를 찾으려 했고, 또 어떤 이는 환경파괴와 오염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 했는데 모두 다 설득력이 있는 해답이였었네.
또, 좌중의 공통된 의견의 하나는 오늘날의 기후변화는 우리 또래가 어렸을 때 겪었던 그런 기후와는 전혀 다르다는 의견이였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들이닥치는 강추위에 폭설에, 폭염에 긴 가뭄에, 강풍을 동반한 집중 호우에 더하여 서서히 그러나 꾸준히 진행되는 지구 溫暖化는 생태계를 뿌리부터 바뀌고 있는 중이라고…… 겨울철에 우리들이 경험했던 三寒四溫은 이제는 이 말 자체를 아주 쓸수 없게 되었음은 물론이려니와 이런 날씨를 다시는 겪을 수 없게 되었다는 의견들이였고, 확연하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로 나누어지던 우리나라의 아름답던 기후는 이제는 춥고, 덥고의 兩 季節 뿐이라는데……..
영국의 산업혁명이후에 서구 列强들의 공통된 관심사는 다량으로 쏟아져 나오는 생산품들의 소비처 찾기였고, 이런 소비처를 찾는 일이 경쟁적으로 이루어 진 형태가 바로 식민지화 정책이였는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런 형태의 소비처 찾기는 방법만 달리 한 채 계속되고 있다고 보아야지? 부산물로 얻은 것이 도시로, 도시로 몰려드는 일손들의 잠자리를 해결하기 위해 지은 숙소가 영국식으로는 flat(미국식으로는 apartment)였고, 이 아파트 주거형태가 유독 우리나라에서 가장 적절한 주거문화로 확실하게 자리매김을 한 것은 아파트에 우리의 전통 난방구조인 온돌을 接木한 것이라는군.
예나 지금이나 우리들이 흔히 접하는 무슨 무슨 경제이론이나, 무슨 무슨 경영이론의 핵심은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물품을, 더 싼 값에, 더 많이 생산해서 소비를 부추기는 이론인데 이런 이론에 근거하여 지구상에 있는 크고 작은 모든 공장에서 공통적으로 하는 일이 더 좋은 물품을, 더 좋은 값에, 더 많이 생산해서 소비를 더 촉진시키는 일이 아닌가? 그러니 우리모두는 부지부식간에 그네들의 부추김에 놀아?나서 하지 않아도 될 소비를 더 많이 하고 있는 꼴이 아닌가?
미국 어느 한 대학에서 실험을 했는데, 사람, 개, 고양이에게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주고 마음껒 먹으라고 한 후에 위를 해부해 보았더니, 개와 고양이는 음식물이 위에 약 80% 들어 찬 반면에, 사람의 위에는 解剖刀가 들어갈 틈이 없이 꽉 차 있더라더군!
내 아버님이 살아 계실 때 우리들이 때로는 음식을 허겁지겁 먹을라 치면 늘 하시는 말씀이, “얘들아, 음식을 그렇게 급히 먹으면 체하니라. 그리고, 음식은 한 숟가락 더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匙箸를 놓아라. 그게 定量이니라”고 하셨는데 正鵠을 찌른 지적이라고 지금도 살아가면서 삶의 龜鑑으로 삼고 있지만, “한 숟가락 더 먹으면 탈이 나고, 또 한 숟가락 덜 먹으면 탈이 나지 않는 다고”도 하셨는데, 이 말씀이 어찌 음식을 먹고 마시기에만 限한 이야기가 될수 있겠는가? 여러나라에서 겪고 있는 비만문제는, 先天性을 감안하더라도, 食貪에서 오는 한 숟가락 더 먹기의 過가 아니겠는가? 先人들은 늘 過猶不及한 삶을 살라고 권유해 왔지만……….
미국의 수필가이자, 시인이며, 자연주의자인 Thoreau, Henry David (1817-1862)는 그의 저서, “Walden: or, Life in the Woods에서, ‘Plain living and high thinking’을 이야기했는데 이는 法頂 스님의 ‘無所有’와 직.간접의 연관이 있는 것 같고, 또 우리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安貧樂道’와도 무관하지 않는 사상이 아니겠는가?
미국의 Indian이나, 호주의 Aborigine이나, 뉴질랜드의 Maori는 소위 문명화된 사람들이 그들의 삶의 터전을 무력으로 빼앗고 마련해준 조그만한 터전에서 지친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이네들의 삶의 본질은 자연에 순응하며, 貪하지 않고, 욕심내지 않고, 자연과 함께 공존.공생하며, 조화와 균형을 이루면서 사는 것이 였는데, 이런 삶이야 말로 온 인류가 希求해오고 있는 유토피아적인 참 삶이 아니였겠는가? 그런데, 이제는, 이런 삶이 먼 훗날 어린세대들에게 들려줄 하나의 옛 이야기로 남게 되었으니!
貪과 過는 사람이라는 동물의 타고난 본성의 하나이며, 이는 다른 동물에서는 좀처럼 볼수없는 인간의 특성중에 하나라고 보는데, 보기에 따라서는 장점이 될수도 있고 또 단점이 될수도 있는 것으로, 장점으로는 서로 경쟁을 시키는 원동력이 되니 모든 부문의 발전에 없서서는 안되는 하나의 因子가 되겠지만, 반대로 단점으로는 필요이상으로 축적하고 소비하다보니 낭비의 근원이 되고 더 나아가서는 자연파괴와 환경오염의 주범이 아니겠는가?
어느 한 집의 목욕실에는, 목욕할 때 쓰는 조그마한 프라스틱 바가지에 금이가자 이집 아낙네는 천원에도 골라 살수 있는 그 바가지를 꿰매서 쓰고 있고, 또 같은 집의 목욕실에는 오래된 알루미늄대야에 금이가자 이집 아낙네는 씹다 버려야 할 껌chewing gum을 그곳에 발라서 새것처럼 쓰고 있더군. 우리 모두가 본 받아야 할 생활의 한 지혜가 아니겠는가?
우리들의 일상 생활의 특징중에 하나는 ‘남 따라하기’라고 하는데, 남이 그것을 먹으면 나도 따라 먹어야 하고, 남이 그 옷을 입으면 나도 따라 입어야 하고, 남이 아파트의 발코니를 뜯어 고치면 나도 따라 고쳐야 마음이 놓인다고 하는데, 전문가들은 발코니의 역할을 사람들의 코, 귀, 눈, 피부등에 비유해서 설명을 했는데 밖에서 몸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먼지, 찬공기, 더운 공기, 소음. 강한 햋볕, 바람등을 이런 기관에서 한번 걸러서 몸속으로 들여보내니 망정이지 만일 이런 器官들이 없다면? 이라고 했더군. ‘남 따라하기’는 일상생활의 또 하나의 過가 아니겠는가?
또, 다른 우리생활의 특징중에 하나는 ‘남 눈치보기’라고 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승용차의 크기라고 하는군. 2005년의 우리나라 일인당 소득수준은 1985년의 일본과 거의 비슷하다고 하는데, 당시 일본의 중형차(2,000cc 이상)의 비율은 2%내외에 소형차는 48% 내외 였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오히려 이와는 반대라고 하는군. 우리나라 승용차의 특징중에 하나는 같은 용량의 排氣量이라 하더라도 車體가 더 길고, 더 넓고, 더 높다고 하는데 이는 ‘옷이 날개’라는 말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이 ‘남 눈치보기’ 또한 생활의 한 過가 아니겠는가.
세금으로 예산을 쓰는 사람들이 연말만 되면 앞 다투어 멀쩡한 人道의 보도불럭을 교체하던 일이 이제는 古典的인 이야기가 되었고, 나라 안팎에서 엄청나게 빨리 달라져 가는 여건과 사태변화에 그때 그때 적절하게 대처하지는 못하고 무슨 일만 벌어졌다 하면 세금쓰기를 경쟁이라도 하듯이 報償할 궁리만 하는 것은, 분명히 세금쓰기의 한 過가 아니겠는가.
자식들이 어렸을 때 밥상에 같이 앉아 식사를 할 때면 가끔씩 이르는 말이, 이 밥 한 알이 밥상에 올라오자면 꼭 일년이 걸려야 하니, 한 알의 밥알을 값으로 따지지 말고 그 가치로 따져 아주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당부를 하고는 했는데……. 요사이 집 밖에서 식사를 할 때 종종 겪는 일중에 하나는 어른들의 밥 그릇에 밥알이 허옇게 붙은 채로 밥그릇을 남기는 것을 보고는 하는데……. 여름철에는 겨울처럼 지나고, 또 겨울철에는 여름처럼 지나야 가장 현대적인 삶을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어쩌구 저쩌구 해 보았자 소귀에 경 읽기니, 이 또한 다른 형태의 생활의 한 過가 아니겠는가?
의학의 비약적인 발달로 한국만 하더라도 여자는 80세 전후, 남자는 73세 전후의 평균수명을 갖게 되었는데, 앞으로 해가 지날수록 평균수명은 더 늘어 날 테고, 늘어 날 때마다 더more&more 더를 바라는 마음은 변치 않을 테니, 이 또한 욕심위의 過가 아니겠는가? 다른 동물사회에서 적용되는 생존의 가치와 척도는 생산성의 유.무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음에 반해, 인간동물의 사회에서는 생산성과는 무관하게 천명인 목숨의 연장이 인위적으로 이루어 지고 있는 것은, 天命에 反하는 過가 아니겠는가?
사람이라는 동물의 貪과 過가 지금의 이 찬란한 地球文明과 文化를 창조해 냈고, 또 앞으로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갈 원동력이 될 것이 라고 본다면, 이 탐과 과는, 보기에 따라서는, 地球滅亡의 제일의 원인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늘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분수를 지키고 만족을 안다면 모든 일에 분쟁이 없고 삶이 평안하다고 하는데, 미국의 Indian족이나, 호주의 Aborigine족이나, 뉴질랜드의 Maori족 처럼 ‘守分知足’하면서 ‘安貧樂道’한 삶을 살기가 어디 말처럼 그리 쉽겠는가?
夏 童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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