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자유 게시판
어떤 경우바른 사람의 이야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권오원
작성일 2007-01-22 07:30
댓글 0건
조회 1,107회
본문
어떤 ‘경우 밝은 사람’의 이야기
국어 대 사전에는 境遇를 “부닥친 형편이나 사정”으로, 새 우리말 큰 사전에서는 “어떤 조건아래서의 형편이나 사정.지경”으로 각각 풀이를 했네.
고향인 江陵 沙川출신으로 나이는 나보다 두살 위이고 같은 학교의 초.중.고를 다닌 나보다 한 학년 위인 친척되는 사람이 있는데……….
서울에서 매달 모이는 고등학교 동창 모임인 “農耕會”의 한 회원이 어느날,
“아니, 그 사람은 우리보다 한해 후배가 아닌가? 고등학교 동문회에 가면 그 사람은 자기 期의 천막에 있지 않고, 매번 우리 다음 기의 천막에서 기웃거리며 어슬렁 거리던데………….” 하길래,
“아니야, 그사람은 분명히 우리보다 한해 선배인데”라고 대답은 했어도 이렇게 물으니 긴가민가 하기도 하도, 영 찜찜하던 차에………..
“우리 형님은 아마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일 껄”
이라고 3년전에 서울의 한 호텔에서 있었던 친척의 결혼식에 우연히 한 테이블에 앉았던 나보다 한해 연배이며, 이사람과는 같은 학년이지만 나이로는 한살 아래인 사촌동생이 이야기 하길래,
“아니, 왜, 고등학교 동창모임에는 참석하지 않는가?”하고 물었더니,
“담배 피우고, 고스톱하는 것이 싫어서”라고 하길래,
“강릉에 있는 고등학교를 나와서, 거기서 열리는 동창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강릉 같이 크지 않은 도시에서, 그럼,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사는가? 이제는 나이도 있고 한데” 라고 했더니,
“국민학교 모임에는 나가지” 라고 이야기를 하더군……..(사천국민학교 동창모임에는 나간다……고…….!)
문제의 이사람이 2001년 3월에 자기 셋째 작은 어머님 장례식의 葬地에서 자기의 넷째 작은 아버님, 자기 사촌 형, 나, 자기, 이렇게 네 사람이 우연히 같이 한 자리에서 한다는 이야기가,
“왜, 웃 작은댁(우리의 사천 옛집을 指稱) 큰 할아버지(내 큰 형님을 지칭)는 이자리에 꼭 참석해야 하는데 참석을 하지 않았느냐고 몇번이고 되풀이 해서 성토?를 하길래”
“야, 이제 좀 그만해라, 참석하지 못할 이유가 있어서 참석을 못 했겠지”라고 대꾸를 하니,
“야, 아저씨(나를 指稱)가 대신 참석했잖아, 그럼 됐지. 그만 둬라.” 라고 이제는 고인이 되신 이사람의 넷째 작은 아버님이 나무라는 투로 말씀하시니 그제서야 그치더군. (나는 촌수로는 할아버지가 되는데 호칭하기가 뭐하니 그저 편하게 아저씨라고 부르지)
(짐작으로 이 사람과는 이 장례식이 거의 30여년만의 만남인데 그동안 쌓아 온 이야기가 얼마나 많았겠는가? 좋은 이야기는 하는 사람도 좋고, 듣는 사람도 좋고, 同席한 사람들에게도 듣기 좋은 법인데 그 많은 좋은 이야기는 몽땅 제쳐두고 하필이면 자기한테는 “경우”있는 얘기인지는 모르지만 들어야 하는 사람인 ‘나’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이렇게 막말을 쏟아 내다니? 이사람과는 중고등학교시절 약 2년여 지금 장례를 치루고 있는 이사람의 셋째 작은집의 한 방에서 네 학생이 딩굴면서 학교를 같이 다녔고, 내가 중학교 2학년(이사람은 3학년) 겨울 방학에는 동네에서 診脈도 하고, 湯藥도 조제해 주고, 鍼도 놓고 하던 의원집이던가의 宅號를 가진 할아버지한테서 같이 천자문도 배웠는데……… 까지 이르니, 이사람, 혹, 뭐가 잘못된 게 아닐까 하는 疑懼心과 함께 참으로 浮薄한 사람이군 하는 생각도 드는데……….)
장례를 치루고 서울에 올라와서 큰 형님께 이 이야기를 하였더니,
“아니, 그 사람 제 정신이야? 그렇게 “경우”가 밝다고 하는 사람이 法道도 제대로 모른단 말이야” 라고 벌컥 역정을 내시는데,
“자, 봐라, 내가 親喪(내 큰 아주머니가 2월 24일에 타계하심을 이르는 말)을 당한지가 한달도 않되는데 아무리 일가 집안이라도 어떻게 葬禮에 참석을 할수 있느냐? 그래서 참석을 못 했지”라고 하시는데, 아주 합당하고 경우에 맞는 말씀이 아닌가?
내 큰 아주머니를 사천 先塋에 모셨는데 자기 사촌들을 포함한 모든 일가 친인척들이, 심지어 이사람의 사촌 매부 내외분 까지도, 장례식에 참석했지만, 이사람만 무슨 연유였는지는 몰라도 참석을 하지 않았는데………..내가 저지르면 romance고 남이 저리르면 不倫인가?
또, 이달 5일에 금년 82세로 타계하신 이사람 형님의 장례식에 다음 날 참석했을 때 우연히 이사람의 예의 그 사촌 형님 내외분, 나, 이사람이 殯所에 함께 한 자리에서 지난 11월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있었던 내 큰 조카의 장남 결혼식 이야기를 하면서 비난을 하는데, “請牒狀을 보냈느니 안보냈느니, 결혼식후에 인사장을 보냈느니 안보냈느니” 시비를 하길래(즉, 자기는 참석 대신 祝議金을 인편에 보냈다고 生色을 내자는 의미?였는지는 몰라도 방법치고는 拙劣하고, 幼稚하고, 恥事하지 않은가)
“나름대로 사는 방법이 다 다르니, 네 얘기만 옳다고 하지 말게”라고 대꾸를 해 주었더니, 옳?은 소리는 해야 한다나 어쩐다 하면서 계속 數多를 떨더군.
(옳고 그름의 기준을 어디에 두는 것이 옳은지는 몰라도, 참 답답하다는 생각을 떨칠수가 없었다네.)
(이날<1월 6일>은 마침 토요일이라 내가 꼭 참석해야 하는 모임의 등산에 30여명이 눈이 내리는 佛巖山을 三育대학교에서 올라 불암사로 내려와서 태릉 배밭에서 음식점을 하는 직장 동료였던 친지의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는둥 마는둥 하고, 샤워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옷도 갈아 입지 못하고,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철역사에 마련된 locker에 등산背囊을 넣어 두고 허둥지둥 뻐스에 올라 강릉 峨山병원에 도착하니 밤 12시가 거의 다 되었더군.)
아무리 살기 좋은 세상에 살고 있고, 또 평균수명이 해마다 늘어나는 세상이라 하더라도, 사람이 70에 이르면 적은 나이도 아니어서 옛 어른들은 인생 칠십이면 古稀來라고 하였고, 稀壽라고도 하는데 族譜에 보니 이사람도 금년 7월 5일이면 70이 되는 적지 않은 나이인데…………
Nigeria의 Lagos(옛 首都. 현 수도는 Abuja)지사에서 일년의 주재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현지인들이 만든 木刻 하나를 기념으로 사왔는데 그 목각의 조각이 아주 재미 있다네. 통나무 하나를 깍아서 큰 고리環로 하고 세마리의 원숭이를 매듭없이 그 고리안으로 연결하여 걸었는데 한 마리는 눈을 가리고, 한 마리는 귀를 가리고, 나머지 한 마리는 입을 가린 모양인데 우리나라에서도 예전에는 시집을 가면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장님 3년의 세월을 보내야 비로소 한 사람의 주부로 떳떳한 위치를 확보한다는 이야기인데, 進化論的인 입장에서 보면 인류 최초의 조상은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다지 않는가? 이런 연유에서인지, 인류가 기본적으로 공유하는 문화는 육대주의 구분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라네.
개인적으로는 요사이 내 또래가 담배를 피우면 담배를 즐기라고 한다네. 그걸 끊지도 못하면서 끊으려고 애쓰면 애쓰는 만큼 거기에서 오는 stress가 오히려 더 부담이 될터이고, 그걸 즐기면 즐기는 만큼 사는 재미가 더 크지않나 하는 생각이라네. 나는 지난 5월부터 하루에 5잔 정도 마시던 커피를 의사의 권유로 끊고 사는데, 담배던 커피던간에 嗜好品이니까 내 기호에 맞지 않는 다른 사람의 기호는 인정하고 같이 살아야지 하는 생각이라네. 로마사회의 특징을 ‘多樣性의 社會’라고 한다면, 오늘의 미국사회가 다민족, 다문화, 다언어, 다풍습, 多宗敎의 사회로 구성된 다양한 사회로, 이 다양성이 미국으로 하여금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hyper power’로 군림하는 이유가 아닐까 하네.
劃一性은 單線的인 思考를 낳고, 단선적인 사회는 열린마음 보다는 닫힌마음의 사회로 이끈다고 하는군.
경우는 위의 풀이에서도 보았듯이 반드시 전제조건을 전제한다는 것인데, 내가 혼자 사는데 무슨 경우를 따질 필요가 있겠는가. 그 전제조건이란 ‘나’이외에 ‘남’의 존재인데, 경우를 따질 때에도 나 이외에 남의 입장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는 이야기네. 易之思之란 말이지. Pascal, Blaise은 그의 저서 “Pensees”에서, 어떤 사안이 일어나면 한 面만을 보고 그 사안의 전체인양 이야기 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서울 한 복판에 있는 남산은 보는 向에 따라, 보는 시간에 따라, 보는 계절에 따라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습이 각각 다 다르다는 이치라네.
위에 예로 든 사람은 자기의 사고와 행동이 표준이라고 착각을 하며 산다는 생각이라네. 왜 이런 착각이 일어날까? 이 사람은 자기의 귀는 막아놓고 눈은 닫고 ‘입’ 하나만 열고 살기 때문이라네. 귀를 열어 놓고 살아야 남의 이야기도 듣게 되고, 눈을 뜨고 살아야 세상이 돌아가는 추세를 보면서 사는데 이 두 기관은 몸에 달고는 살지만 쓰지 않으니 용불용설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거의 無用之物이 된 셈이지!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나이가 들면 모든 陽氣가 입으로 모인다는 이치와 같은 脈絡이라네.
이런 閉鎖的이고 甕固執的인 사고는 자기를 스스로 어떤 정형화된 사고의 틀속에 박아 놓기 때문에 그 속에서 헤여나지 못하게 되고, 그러므로 점점 더 거기에 깊이 깊이 빠져 독선적이며 아집적이 된다고 하네. 세상살이의 기본은 夫婦關係를 포함해서 남과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이며, 주고 받는 去來인데, 이런 類의 사람들은 남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남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하네. 나를 남이 받아 주어야 한다면 나도 남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피차 fair하고 reasonable한 삶이 아닌가?
대학 동창중에 한 사람은 영어교사직에 평생을 있었던 사람인데 언제인가 모임에서 들으니 TV를 티부이로 발음을 하던데, 이사람도 위의 사람과 비슷한 점이 아주 많은 것이, 자기가 언제나 무슨 일이건 간에 옳고 바르다는 거지! 이사람은 위에 예로 든 사람과는 달리 평생을 학생들을 상대로 자기대로는 가르쳤기 때문에 자기의 생각과 행동이 어떤 상황이던간에 늘 표준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라네.
처음에 예로 든 사람은 평생을 공직에 있었기 때문에 어떤 업무를 수행했던간에 그 조직의 문화라고 해야 할 보이는 내적인 법.규정과, 보이지 않는 울타리에, 그 조직의 역사와, 전통과, 관행이 이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생각의 틀frame’을 제공 했다하더라도, 개인적으로는 상식이 법.규정보다는 上位槪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중에 하나라네. 세금으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무슨 일만 일어났다 하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일손 부족, 예산 부족, 관계법령의 미비”를 드는데 이사람들의 생각도 이런 정서에 뿌리를 두는 것이지?
위에 예로 든 두사람의 공통점은 이미 이야기 한대로 입만 달고 사는 사람들인데, 이런 사람들이 혹 해외에 볼 일이 있어 갔다면 공통적으로 하는 행동이, “로마에 가면 로마 사람들이 하는대로 하라”는 말을 책에서 보았거나 들었더라도 이말이 행동과는 연결이 안되고 따로 따로 논다는 것이라네. 이런 류의 사람들일수록 ‘身土不二’를 神主단지 모시듯이 모시면서 김치나 고추장이 없으면 밥은 아예 먹을 생각도 못하고, 남의 나라 음식은 이렇고 저렇고 하면서 영 입에 맞지 않는다고 투덜거린다거나 하면서, 남의 나라를 내 기준대로 보고, 느끼고, 판단하기 때문에 오대양 육대주를 두루 다 다녔다고 하더라도 남는 것이라고는 오직 사진 몇 장 밖에 없다는 것이라네.
100여년 전의 舊韓末의 鎖國과 100여년 후인 지금 이사람들의 생각에 다른점이 있겠는가? 세계화니, FTA(자유무역협정)니 하는 말들은 다른 行星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쯤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이런류의 사람들이 한달에 책을 몇권이나 읽는지 알수 없지만 년전에 어떤 보도를 보니 우리나라 성인의 약 1/3이 일년에 책을 한권도 읽지 않는다고 하더군. 열린 마음가짐의 사람들은 늘상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많고 그 추세를 받아들이는 창구도 다양한데, 책 읽는 것도 그 중에 하나지만, 이런 사람들처럼 닫힌 마음의 사람들은 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시비꺼리만 찾기 바쁘다보니 엉뚱한 일에 시간과 정력을 다 소비하는 셈이지.
이런류의 사람들일수록 남을 칭찬해주면 자기 코가 비뚤어진다거나, 눈이 돌아간다거나 하여튼 체면이 이만저만 손상되는게 아니라고 늘 被害意識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라네. 말 한마듸로 천냥 빚을 갚는다고 하잖은가? 따라서, 이런 사람들에게서는 비종교적인 의미라도 베푸는 일에는 그 일이 어떤 일이던 간에 아주 吝嗇하다고 하네. 또, 이런 사람들일수록 어떤 경우를 따지기를 좋아하지만 따진 경우에 반드시 뒤에 따르게 되는 예의는 전혀 알려고도 하지 않고 고려하지도 않는다고 하는군.
세상사람들이 사는 목표야 대체적으로, “더 많이, 더 높이the more and the better”에 둔다고 한다면 그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이야 百人百色이 아니겠는가? 모든 思考에는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하고 또 장려되어야 하는데도 이런 사람들일수록 맞느냐 틀리느냐, 옳으냐 틀리느냐의 사고방식에 찌들대로 찌들어서 세상을 보는 눈은 오로지 한가지 방법 밖에 없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이라네. 이런 틀의 사고를 갖게 된 것이 보기에 따라서는 우리의 ‘二分法的인 思考의 틀’을 주입만 하는 교육에도 그 원인이 있다고 볼수 있지만, 지금 그 나이까지 살아 오면서 켜켜히 쌓아온 보고, 듣고, 배우고, 겪고 한 세월의 지혜가 부족분을 메워주고 相殺해 줘야 하는데도……...
사실 말이지만 한국사회에서 특히 남자들의 세계에서는 담배 피우고, 고스톱치는 것이야 아무때나 아무곳에서나 흔히 볼수있는 광경이 아닌가? 말하자면 하나의 문화인 셈이지! 내기나 賭博은 인류역사와 그 軌를 같이 하지 않은가? 개인적으로도 80년대 후반까지는 담배도 하루에 세갑은 피웠고 고스톱도 많이 쳤네. 남자들이 모이면 사실 모두 함께 시간 보낼 꺼리가 뭐 그리 많은가? 고스톱 치기를 장려 할 일은 아니더라도, 고스톱을 칠 때 간혹 피 바가지에, 광 바가지에, 쓰리 고 까지 더하는 대형참사라도 일어나면 당하는 사람이야 죽을 맛이겠지만 이를 이끈 사람이야 한번 뻐길만하지 않은가?
골프시합에 참여했다하면 골프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골프의 至尊인 Tiger Woods도 이웃집에 사는 친구인 Mark O’Meara와 심심풀이로 일달라짜리 내기 골프를 친다지 않는가? 타이거는 자가용 비행기로 세상을 누비며 삶을 즐기는 億萬長者라네! 이런 억만장자까지도……! 작은 돈이라도 주머니에 들어왔다 나갔다 하면 담배맛도 더 나는 법이 아닌가?! 나가니 쓰려서 한대 더 피우고, 들어오니 좋아서 한대 더 피우고………이런 문화를 홀로 거부한들 그거야 螳螂拒轍꼴이 아니겠는가?
太初에 세상이 열리고 하늘과 땅, 낮과 밤, 음양이 존재하기 시작하면서 世上事에는 언제나 極과 極이 共存해 오지 않았는가? 天地가, 晝夜가, 日月이, 陰陽이, 雌雄이, 貧富와, 高低와, 長短이, 美醜와, 똑똑함과 어리석음이, 뚱뚱함과 홀쭉함이, 一神敎와 多神敎가, 탄생과 죽음이, 기쁨과 슬픔이, 幸福과 不幸이, 春秋와 夏冬이, 貴賤과 上下가, 明暗과 多少가, 常識과 沒常識이, 左右와 黑白이, 强弱과 老幼가, 合理와 不合理가, 公正과 不公正이, 合法과 不法이, 順理와 逆理가, 常識과 沒常識이, 輕重과 緩急이, 知慧와 覇氣가, 열림과 닫힘이, 東西와 南北이, 左翼과 右翼등이 같이 상생을 하면서 공존하는 것이 自然의 攝理이며, 세상사며, 이 극에서 저극으로 가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 삶의 보람이고 喜悅이 아닌가?
어떻게 남보고 내 방식대로 세상을 살라고 할 수 있으며, 더구나 이를 강요할 수 하는가? 어떻게 남보고, “너는 왜 나처럼 생기지 않았느냐”고 敢히 말 할 수가 있겠는가? 내가 배 부르다고 남도 배 부른가? 내가 ‘아’하고 소리를 지르면 남도 따라서 ‘아’하고 소리를 따라 질러야 하는가? 남이 장에 간다고 나도 거름지게를 지고 장에 같이 따라가야 하는가? 내가 술을 좋아한다고 술을 안하는 사람에게 强勸할 수 없듯이, 내가 술을 안한다고 남에게 술을 하지 말라고 할수 있겠는가? 세상살이가 이길이 아니면 안되고, 이방법이 아니면 안되는 경우가 있다고는 해도, 이 길과 이 방법에만 집착하는 强迫觀念으로는 井底蛙가 볼수있는 한 조각의 하늘과 무엇이 다를까?
결혼후에 축의금을 받은 명단을 보고 소위 인사장을 보내는 것 만큼 허례와 허식의 전형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종이가 아깝고, 우편료가 아깝다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다네. 인쇄된 내용은 한결같이 千篇一律적인데다가 받는 사람의 이름을 自筆로 써 넣은 것도 아니고, 보내는 사람이 서명을 했거나, 날인도 하지 않은 그야말로 고마움을 표하는 마음이나, 정성을 눈꼽 만큼도 찾아 볼수 없는 이런 인사장을 받지못해 안달을 한다면……... 차라리 婚主가 賀客에게 따뜻한 전화라도 한 통 걸어 준다던가, 情感이 넘치는 글월을 만들어서 보내주는 것이 더 좋은 일이고 따뜻한 감사의 표시가 아닐까 하네만.………
사람들이 모이는 집단에는 가정에서부터 한 나라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독특한 문화가 있게 마련이고 각각의 문화는 각각의 특징이 있지만, 나나 우리의 문화가 다른 문화보다 優位에 선다고 이야기할수 없듯이 나나 우리의 문화를 남에게 강요 하는것은 더더구나 할수 없는 일이 아닌가? 불란서의 늙은 여배우인 브리지드 바르도가 우리의 전통적인 ‘개장국문화’를 비난하듯히 하면 되겠는가? 개장국은 우리의 역사성이 있는 음식문화인데……… 우리의 冠婚喪祭에는 그런대로 아름다운 역사와, 전통과, 良俗의 문화가 있지만 좋은 면이 있는 것 만큼 버려야 할 문화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버려야 하는 것이 浪費와, 虛禮와, 虛飾의 문화가 아닌가 하네.
예를 들면, 全敎組는 ‘敎師들의 評價’를 결사 반대를 한다고 하는데 이는 공부를 하지 않고 교직을 시작할 때 가졌던 지식으로 퇴직할 때 까지 학생들을 가르치겠다는 마음가짐이 아닌가? 요사이 세상은 얼마나 빨리 엄청나게 변하는가? 더더군다나 우리나라는 경제의 70%이상을 해외에 의존하는 형이며, 경제규모는 세계에서 11번째이고, 또 세계에서 11번째로 지난해 12월 5일에는 수출 3,000억 달라를 달성한 경제대국이 아닌가? 이런 나라의 位相에 걸맞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기르자면 선생님들이 학생들보다 더 많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달라지는 세상에 살면서 생각은 60년대에 묶어 놓고 몸은 21세기에서 산다면, 이런 사람들한테서 어떻게 제대로 된 합리적이고 時宜에 맞는 생각과, 몸가짐과, 가르침을 기대할수 있겠는가?
1997년 말에 우리 모두가 고통스럽게 겼었던 외환위기 이후로 우리 사회의 모든 민간부문에는 年功序列이라는 病弊는 거의 사라졌는데도 세금으로 생활을 하는 조직에서는 아직까지 엄연히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것이, 이런 조직의 채용시험에는 늘 고학력의 응시생들이 雲集하는 현상이 이를 웅변하지 않는가?
우리 속담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흉본다”는 이야기가 있고, 오십보 백보라는 이야기는 전쟁터에서 50보를 도망간 병사가 100보를 도망간 병사를 보고 흉본다는 古事에서 유래한 말인데, 이는 보기에 따라서는 우리 모두의 自畵像이기도 하더라도 적어도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이런류의 일에서는 가급적이면 벗어나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라네. 아무리 좋은 말이라 하더라도 그 말을 해야 할 때와 장소가 있는 게 아닌가? 옛 어른들은 凡夫라도 한 마듸의 말을 重千金처럼 가벼이 하지 말라고 하였고, 病從口入하면 口是禍之門에 禍從口出하면 舌是斬身刀라고 했는데………
연초부터 북한은 방송등의 언론매체를 통해 금년 12월 19일 우리나라에 있는 대통령선거에서 특정 정당의 집권을 무조건 막아야 하고 친북좌파정권의 재 탄생을 해야 한다면서 우리나라에게 恐喝, 脅迫, 陰害를 일삼는데 이런 짓거리를 하도록 자리를 깔아준 사람들의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고 하더라도, 북한 정권은 제 나라 사람들조차 배불리 먹이지도 못하는 처지이면서도 이 지구상에서 대표적으로 제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 정권이 아닌가 하네. 이런 일을 두고 동아일보에서는 사설로 이 일을 취급 하면서 末尾에, “너나 잘 해라”로 글을 마쳤더군.
夏 童 2007년 1월
국어 대 사전에는 境遇를 “부닥친 형편이나 사정”으로, 새 우리말 큰 사전에서는 “어떤 조건아래서의 형편이나 사정.지경”으로 각각 풀이를 했네.
고향인 江陵 沙川출신으로 나이는 나보다 두살 위이고 같은 학교의 초.중.고를 다닌 나보다 한 학년 위인 친척되는 사람이 있는데……….
서울에서 매달 모이는 고등학교 동창 모임인 “農耕會”의 한 회원이 어느날,
“아니, 그 사람은 우리보다 한해 후배가 아닌가? 고등학교 동문회에 가면 그 사람은 자기 期의 천막에 있지 않고, 매번 우리 다음 기의 천막에서 기웃거리며 어슬렁 거리던데………….” 하길래,
“아니야, 그사람은 분명히 우리보다 한해 선배인데”라고 대답은 했어도 이렇게 물으니 긴가민가 하기도 하도, 영 찜찜하던 차에………..
“우리 형님은 아마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일 껄”
이라고 3년전에 서울의 한 호텔에서 있었던 친척의 결혼식에 우연히 한 테이블에 앉았던 나보다 한해 연배이며, 이사람과는 같은 학년이지만 나이로는 한살 아래인 사촌동생이 이야기 하길래,
“아니, 왜, 고등학교 동창모임에는 참석하지 않는가?”하고 물었더니,
“담배 피우고, 고스톱하는 것이 싫어서”라고 하길래,
“강릉에 있는 고등학교를 나와서, 거기서 열리는 동창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강릉 같이 크지 않은 도시에서, 그럼,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사는가? 이제는 나이도 있고 한데” 라고 했더니,
“국민학교 모임에는 나가지” 라고 이야기를 하더군……..(사천국민학교 동창모임에는 나간다……고…….!)
문제의 이사람이 2001년 3월에 자기 셋째 작은 어머님 장례식의 葬地에서 자기의 넷째 작은 아버님, 자기 사촌 형, 나, 자기, 이렇게 네 사람이 우연히 같이 한 자리에서 한다는 이야기가,
“왜, 웃 작은댁(우리의 사천 옛집을 指稱) 큰 할아버지(내 큰 형님을 지칭)는 이자리에 꼭 참석해야 하는데 참석을 하지 않았느냐고 몇번이고 되풀이 해서 성토?를 하길래”
“야, 이제 좀 그만해라, 참석하지 못할 이유가 있어서 참석을 못 했겠지”라고 대꾸를 하니,
“야, 아저씨(나를 指稱)가 대신 참석했잖아, 그럼 됐지. 그만 둬라.” 라고 이제는 고인이 되신 이사람의 넷째 작은 아버님이 나무라는 투로 말씀하시니 그제서야 그치더군. (나는 촌수로는 할아버지가 되는데 호칭하기가 뭐하니 그저 편하게 아저씨라고 부르지)
(짐작으로 이 사람과는 이 장례식이 거의 30여년만의 만남인데 그동안 쌓아 온 이야기가 얼마나 많았겠는가? 좋은 이야기는 하는 사람도 좋고, 듣는 사람도 좋고, 同席한 사람들에게도 듣기 좋은 법인데 그 많은 좋은 이야기는 몽땅 제쳐두고 하필이면 자기한테는 “경우”있는 얘기인지는 모르지만 들어야 하는 사람인 ‘나’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이렇게 막말을 쏟아 내다니? 이사람과는 중고등학교시절 약 2년여 지금 장례를 치루고 있는 이사람의 셋째 작은집의 한 방에서 네 학생이 딩굴면서 학교를 같이 다녔고, 내가 중학교 2학년(이사람은 3학년) 겨울 방학에는 동네에서 診脈도 하고, 湯藥도 조제해 주고, 鍼도 놓고 하던 의원집이던가의 宅號를 가진 할아버지한테서 같이 천자문도 배웠는데……… 까지 이르니, 이사람, 혹, 뭐가 잘못된 게 아닐까 하는 疑懼心과 함께 참으로 浮薄한 사람이군 하는 생각도 드는데……….)
장례를 치루고 서울에 올라와서 큰 형님께 이 이야기를 하였더니,
“아니, 그 사람 제 정신이야? 그렇게 “경우”가 밝다고 하는 사람이 法道도 제대로 모른단 말이야” 라고 벌컥 역정을 내시는데,
“자, 봐라, 내가 親喪(내 큰 아주머니가 2월 24일에 타계하심을 이르는 말)을 당한지가 한달도 않되는데 아무리 일가 집안이라도 어떻게 葬禮에 참석을 할수 있느냐? 그래서 참석을 못 했지”라고 하시는데, 아주 합당하고 경우에 맞는 말씀이 아닌가?
내 큰 아주머니를 사천 先塋에 모셨는데 자기 사촌들을 포함한 모든 일가 친인척들이, 심지어 이사람의 사촌 매부 내외분 까지도, 장례식에 참석했지만, 이사람만 무슨 연유였는지는 몰라도 참석을 하지 않았는데………..내가 저지르면 romance고 남이 저리르면 不倫인가?
또, 이달 5일에 금년 82세로 타계하신 이사람 형님의 장례식에 다음 날 참석했을 때 우연히 이사람의 예의 그 사촌 형님 내외분, 나, 이사람이 殯所에 함께 한 자리에서 지난 11월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있었던 내 큰 조카의 장남 결혼식 이야기를 하면서 비난을 하는데, “請牒狀을 보냈느니 안보냈느니, 결혼식후에 인사장을 보냈느니 안보냈느니” 시비를 하길래(즉, 자기는 참석 대신 祝議金을 인편에 보냈다고 生色을 내자는 의미?였는지는 몰라도 방법치고는 拙劣하고, 幼稚하고, 恥事하지 않은가)
“나름대로 사는 방법이 다 다르니, 네 얘기만 옳다고 하지 말게”라고 대꾸를 해 주었더니, 옳?은 소리는 해야 한다나 어쩐다 하면서 계속 數多를 떨더군.
(옳고 그름의 기준을 어디에 두는 것이 옳은지는 몰라도, 참 답답하다는 생각을 떨칠수가 없었다네.)
(이날<1월 6일>은 마침 토요일이라 내가 꼭 참석해야 하는 모임의 등산에 30여명이 눈이 내리는 佛巖山을 三育대학교에서 올라 불암사로 내려와서 태릉 배밭에서 음식점을 하는 직장 동료였던 친지의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는둥 마는둥 하고, 샤워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옷도 갈아 입지 못하고,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철역사에 마련된 locker에 등산背囊을 넣어 두고 허둥지둥 뻐스에 올라 강릉 峨山병원에 도착하니 밤 12시가 거의 다 되었더군.)
아무리 살기 좋은 세상에 살고 있고, 또 평균수명이 해마다 늘어나는 세상이라 하더라도, 사람이 70에 이르면 적은 나이도 아니어서 옛 어른들은 인생 칠십이면 古稀來라고 하였고, 稀壽라고도 하는데 族譜에 보니 이사람도 금년 7월 5일이면 70이 되는 적지 않은 나이인데…………
Nigeria의 Lagos(옛 首都. 현 수도는 Abuja)지사에서 일년의 주재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현지인들이 만든 木刻 하나를 기념으로 사왔는데 그 목각의 조각이 아주 재미 있다네. 통나무 하나를 깍아서 큰 고리環로 하고 세마리의 원숭이를 매듭없이 그 고리안으로 연결하여 걸었는데 한 마리는 눈을 가리고, 한 마리는 귀를 가리고, 나머지 한 마리는 입을 가린 모양인데 우리나라에서도 예전에는 시집을 가면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장님 3년의 세월을 보내야 비로소 한 사람의 주부로 떳떳한 위치를 확보한다는 이야기인데, 進化論的인 입장에서 보면 인류 최초의 조상은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다지 않는가? 이런 연유에서인지, 인류가 기본적으로 공유하는 문화는 육대주의 구분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라네.
개인적으로는 요사이 내 또래가 담배를 피우면 담배를 즐기라고 한다네. 그걸 끊지도 못하면서 끊으려고 애쓰면 애쓰는 만큼 거기에서 오는 stress가 오히려 더 부담이 될터이고, 그걸 즐기면 즐기는 만큼 사는 재미가 더 크지않나 하는 생각이라네. 나는 지난 5월부터 하루에 5잔 정도 마시던 커피를 의사의 권유로 끊고 사는데, 담배던 커피던간에 嗜好品이니까 내 기호에 맞지 않는 다른 사람의 기호는 인정하고 같이 살아야지 하는 생각이라네. 로마사회의 특징을 ‘多樣性의 社會’라고 한다면, 오늘의 미국사회가 다민족, 다문화, 다언어, 다풍습, 多宗敎의 사회로 구성된 다양한 사회로, 이 다양성이 미국으로 하여금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hyper power’로 군림하는 이유가 아닐까 하네.
劃一性은 單線的인 思考를 낳고, 단선적인 사회는 열린마음 보다는 닫힌마음의 사회로 이끈다고 하는군.
경우는 위의 풀이에서도 보았듯이 반드시 전제조건을 전제한다는 것인데, 내가 혼자 사는데 무슨 경우를 따질 필요가 있겠는가. 그 전제조건이란 ‘나’이외에 ‘남’의 존재인데, 경우를 따질 때에도 나 이외에 남의 입장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는 이야기네. 易之思之란 말이지. Pascal, Blaise은 그의 저서 “Pensees”에서, 어떤 사안이 일어나면 한 面만을 보고 그 사안의 전체인양 이야기 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서울 한 복판에 있는 남산은 보는 向에 따라, 보는 시간에 따라, 보는 계절에 따라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습이 각각 다 다르다는 이치라네.
위에 예로 든 사람은 자기의 사고와 행동이 표준이라고 착각을 하며 산다는 생각이라네. 왜 이런 착각이 일어날까? 이 사람은 자기의 귀는 막아놓고 눈은 닫고 ‘입’ 하나만 열고 살기 때문이라네. 귀를 열어 놓고 살아야 남의 이야기도 듣게 되고, 눈을 뜨고 살아야 세상이 돌아가는 추세를 보면서 사는데 이 두 기관은 몸에 달고는 살지만 쓰지 않으니 용불용설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거의 無用之物이 된 셈이지!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나이가 들면 모든 陽氣가 입으로 모인다는 이치와 같은 脈絡이라네.
이런 閉鎖的이고 甕固執的인 사고는 자기를 스스로 어떤 정형화된 사고의 틀속에 박아 놓기 때문에 그 속에서 헤여나지 못하게 되고, 그러므로 점점 더 거기에 깊이 깊이 빠져 독선적이며 아집적이 된다고 하네. 세상살이의 기본은 夫婦關係를 포함해서 남과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이며, 주고 받는 去來인데, 이런 類의 사람들은 남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남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하네. 나를 남이 받아 주어야 한다면 나도 남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피차 fair하고 reasonable한 삶이 아닌가?
대학 동창중에 한 사람은 영어교사직에 평생을 있었던 사람인데 언제인가 모임에서 들으니 TV를 티부이로 발음을 하던데, 이사람도 위의 사람과 비슷한 점이 아주 많은 것이, 자기가 언제나 무슨 일이건 간에 옳고 바르다는 거지! 이사람은 위에 예로 든 사람과는 달리 평생을 학생들을 상대로 자기대로는 가르쳤기 때문에 자기의 생각과 행동이 어떤 상황이던간에 늘 표준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라네.
처음에 예로 든 사람은 평생을 공직에 있었기 때문에 어떤 업무를 수행했던간에 그 조직의 문화라고 해야 할 보이는 내적인 법.규정과, 보이지 않는 울타리에, 그 조직의 역사와, 전통과, 관행이 이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생각의 틀frame’을 제공 했다하더라도, 개인적으로는 상식이 법.규정보다는 上位槪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중에 하나라네. 세금으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무슨 일만 일어났다 하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일손 부족, 예산 부족, 관계법령의 미비”를 드는데 이사람들의 생각도 이런 정서에 뿌리를 두는 것이지?
위에 예로 든 두사람의 공통점은 이미 이야기 한대로 입만 달고 사는 사람들인데, 이런 사람들이 혹 해외에 볼 일이 있어 갔다면 공통적으로 하는 행동이, “로마에 가면 로마 사람들이 하는대로 하라”는 말을 책에서 보았거나 들었더라도 이말이 행동과는 연결이 안되고 따로 따로 논다는 것이라네. 이런 류의 사람들일수록 ‘身土不二’를 神主단지 모시듯이 모시면서 김치나 고추장이 없으면 밥은 아예 먹을 생각도 못하고, 남의 나라 음식은 이렇고 저렇고 하면서 영 입에 맞지 않는다고 투덜거린다거나 하면서, 남의 나라를 내 기준대로 보고, 느끼고, 판단하기 때문에 오대양 육대주를 두루 다 다녔다고 하더라도 남는 것이라고는 오직 사진 몇 장 밖에 없다는 것이라네.
100여년 전의 舊韓末의 鎖國과 100여년 후인 지금 이사람들의 생각에 다른점이 있겠는가? 세계화니, FTA(자유무역협정)니 하는 말들은 다른 行星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쯤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이런류의 사람들이 한달에 책을 몇권이나 읽는지 알수 없지만 년전에 어떤 보도를 보니 우리나라 성인의 약 1/3이 일년에 책을 한권도 읽지 않는다고 하더군. 열린 마음가짐의 사람들은 늘상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많고 그 추세를 받아들이는 창구도 다양한데, 책 읽는 것도 그 중에 하나지만, 이런 사람들처럼 닫힌 마음의 사람들은 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시비꺼리만 찾기 바쁘다보니 엉뚱한 일에 시간과 정력을 다 소비하는 셈이지.
이런류의 사람들일수록 남을 칭찬해주면 자기 코가 비뚤어진다거나, 눈이 돌아간다거나 하여튼 체면이 이만저만 손상되는게 아니라고 늘 被害意識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라네. 말 한마듸로 천냥 빚을 갚는다고 하잖은가? 따라서, 이런 사람들에게서는 비종교적인 의미라도 베푸는 일에는 그 일이 어떤 일이던 간에 아주 吝嗇하다고 하네. 또, 이런 사람들일수록 어떤 경우를 따지기를 좋아하지만 따진 경우에 반드시 뒤에 따르게 되는 예의는 전혀 알려고도 하지 않고 고려하지도 않는다고 하는군.
세상사람들이 사는 목표야 대체적으로, “더 많이, 더 높이the more and the better”에 둔다고 한다면 그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이야 百人百色이 아니겠는가? 모든 思考에는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하고 또 장려되어야 하는데도 이런 사람들일수록 맞느냐 틀리느냐, 옳으냐 틀리느냐의 사고방식에 찌들대로 찌들어서 세상을 보는 눈은 오로지 한가지 방법 밖에 없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이라네. 이런 틀의 사고를 갖게 된 것이 보기에 따라서는 우리의 ‘二分法的인 思考의 틀’을 주입만 하는 교육에도 그 원인이 있다고 볼수 있지만, 지금 그 나이까지 살아 오면서 켜켜히 쌓아온 보고, 듣고, 배우고, 겪고 한 세월의 지혜가 부족분을 메워주고 相殺해 줘야 하는데도……...
사실 말이지만 한국사회에서 특히 남자들의 세계에서는 담배 피우고, 고스톱치는 것이야 아무때나 아무곳에서나 흔히 볼수있는 광경이 아닌가? 말하자면 하나의 문화인 셈이지! 내기나 賭博은 인류역사와 그 軌를 같이 하지 않은가? 개인적으로도 80년대 후반까지는 담배도 하루에 세갑은 피웠고 고스톱도 많이 쳤네. 남자들이 모이면 사실 모두 함께 시간 보낼 꺼리가 뭐 그리 많은가? 고스톱 치기를 장려 할 일은 아니더라도, 고스톱을 칠 때 간혹 피 바가지에, 광 바가지에, 쓰리 고 까지 더하는 대형참사라도 일어나면 당하는 사람이야 죽을 맛이겠지만 이를 이끈 사람이야 한번 뻐길만하지 않은가?
골프시합에 참여했다하면 골프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골프의 至尊인 Tiger Woods도 이웃집에 사는 친구인 Mark O’Meara와 심심풀이로 일달라짜리 내기 골프를 친다지 않는가? 타이거는 자가용 비행기로 세상을 누비며 삶을 즐기는 億萬長者라네! 이런 억만장자까지도……! 작은 돈이라도 주머니에 들어왔다 나갔다 하면 담배맛도 더 나는 법이 아닌가?! 나가니 쓰려서 한대 더 피우고, 들어오니 좋아서 한대 더 피우고………이런 문화를 홀로 거부한들 그거야 螳螂拒轍꼴이 아니겠는가?
太初에 세상이 열리고 하늘과 땅, 낮과 밤, 음양이 존재하기 시작하면서 世上事에는 언제나 極과 極이 共存해 오지 않았는가? 天地가, 晝夜가, 日月이, 陰陽이, 雌雄이, 貧富와, 高低와, 長短이, 美醜와, 똑똑함과 어리석음이, 뚱뚱함과 홀쭉함이, 一神敎와 多神敎가, 탄생과 죽음이, 기쁨과 슬픔이, 幸福과 不幸이, 春秋와 夏冬이, 貴賤과 上下가, 明暗과 多少가, 常識과 沒常識이, 左右와 黑白이, 强弱과 老幼가, 合理와 不合理가, 公正과 不公正이, 合法과 不法이, 順理와 逆理가, 常識과 沒常識이, 輕重과 緩急이, 知慧와 覇氣가, 열림과 닫힘이, 東西와 南北이, 左翼과 右翼등이 같이 상생을 하면서 공존하는 것이 自然의 攝理이며, 세상사며, 이 극에서 저극으로 가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 삶의 보람이고 喜悅이 아닌가?
어떻게 남보고 내 방식대로 세상을 살라고 할 수 있으며, 더구나 이를 강요할 수 하는가? 어떻게 남보고, “너는 왜 나처럼 생기지 않았느냐”고 敢히 말 할 수가 있겠는가? 내가 배 부르다고 남도 배 부른가? 내가 ‘아’하고 소리를 지르면 남도 따라서 ‘아’하고 소리를 따라 질러야 하는가? 남이 장에 간다고 나도 거름지게를 지고 장에 같이 따라가야 하는가? 내가 술을 좋아한다고 술을 안하는 사람에게 强勸할 수 없듯이, 내가 술을 안한다고 남에게 술을 하지 말라고 할수 있겠는가? 세상살이가 이길이 아니면 안되고, 이방법이 아니면 안되는 경우가 있다고는 해도, 이 길과 이 방법에만 집착하는 强迫觀念으로는 井底蛙가 볼수있는 한 조각의 하늘과 무엇이 다를까?
결혼후에 축의금을 받은 명단을 보고 소위 인사장을 보내는 것 만큼 허례와 허식의 전형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종이가 아깝고, 우편료가 아깝다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다네. 인쇄된 내용은 한결같이 千篇一律적인데다가 받는 사람의 이름을 自筆로 써 넣은 것도 아니고, 보내는 사람이 서명을 했거나, 날인도 하지 않은 그야말로 고마움을 표하는 마음이나, 정성을 눈꼽 만큼도 찾아 볼수 없는 이런 인사장을 받지못해 안달을 한다면……... 차라리 婚主가 賀客에게 따뜻한 전화라도 한 통 걸어 준다던가, 情感이 넘치는 글월을 만들어서 보내주는 것이 더 좋은 일이고 따뜻한 감사의 표시가 아닐까 하네만.………
사람들이 모이는 집단에는 가정에서부터 한 나라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독특한 문화가 있게 마련이고 각각의 문화는 각각의 특징이 있지만, 나나 우리의 문화가 다른 문화보다 優位에 선다고 이야기할수 없듯이 나나 우리의 문화를 남에게 강요 하는것은 더더구나 할수 없는 일이 아닌가? 불란서의 늙은 여배우인 브리지드 바르도가 우리의 전통적인 ‘개장국문화’를 비난하듯히 하면 되겠는가? 개장국은 우리의 역사성이 있는 음식문화인데……… 우리의 冠婚喪祭에는 그런대로 아름다운 역사와, 전통과, 良俗의 문화가 있지만 좋은 면이 있는 것 만큼 버려야 할 문화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버려야 하는 것이 浪費와, 虛禮와, 虛飾의 문화가 아닌가 하네.
예를 들면, 全敎組는 ‘敎師들의 評價’를 결사 반대를 한다고 하는데 이는 공부를 하지 않고 교직을 시작할 때 가졌던 지식으로 퇴직할 때 까지 학생들을 가르치겠다는 마음가짐이 아닌가? 요사이 세상은 얼마나 빨리 엄청나게 변하는가? 더더군다나 우리나라는 경제의 70%이상을 해외에 의존하는 형이며, 경제규모는 세계에서 11번째이고, 또 세계에서 11번째로 지난해 12월 5일에는 수출 3,000억 달라를 달성한 경제대국이 아닌가? 이런 나라의 位相에 걸맞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기르자면 선생님들이 학생들보다 더 많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달라지는 세상에 살면서 생각은 60년대에 묶어 놓고 몸은 21세기에서 산다면, 이런 사람들한테서 어떻게 제대로 된 합리적이고 時宜에 맞는 생각과, 몸가짐과, 가르침을 기대할수 있겠는가?
1997년 말에 우리 모두가 고통스럽게 겼었던 외환위기 이후로 우리 사회의 모든 민간부문에는 年功序列이라는 病弊는 거의 사라졌는데도 세금으로 생활을 하는 조직에서는 아직까지 엄연히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것이, 이런 조직의 채용시험에는 늘 고학력의 응시생들이 雲集하는 현상이 이를 웅변하지 않는가?
우리 속담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흉본다”는 이야기가 있고, 오십보 백보라는 이야기는 전쟁터에서 50보를 도망간 병사가 100보를 도망간 병사를 보고 흉본다는 古事에서 유래한 말인데, 이는 보기에 따라서는 우리 모두의 自畵像이기도 하더라도 적어도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이런류의 일에서는 가급적이면 벗어나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라네. 아무리 좋은 말이라 하더라도 그 말을 해야 할 때와 장소가 있는 게 아닌가? 옛 어른들은 凡夫라도 한 마듸의 말을 重千金처럼 가벼이 하지 말라고 하였고, 病從口入하면 口是禍之門에 禍從口出하면 舌是斬身刀라고 했는데………
연초부터 북한은 방송등의 언론매체를 통해 금년 12월 19일 우리나라에 있는 대통령선거에서 특정 정당의 집권을 무조건 막아야 하고 친북좌파정권의 재 탄생을 해야 한다면서 우리나라에게 恐喝, 脅迫, 陰害를 일삼는데 이런 짓거리를 하도록 자리를 깔아준 사람들의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고 하더라도, 북한 정권은 제 나라 사람들조차 배불리 먹이지도 못하는 처지이면서도 이 지구상에서 대표적으로 제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 정권이 아닌가 하네. 이런 일을 두고 동아일보에서는 사설로 이 일을 취급 하면서 末尾에, “너나 잘 해라”로 글을 마쳤더군.
夏 童 2007년 1월
- 이전글◆ 머리숙여 깊은 感謝의 人事를 올립니다.◆ 07.01.23
- 다음글하조대 07.01.2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