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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질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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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성남 작성일 2007-03-13 11:41 댓글 0건 조회 1,10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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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문화 회고](4)6·25 전쟁
 ( 문화면  2007-3-13 기사 )
 
 

 
 -강릉 단오제는 열렸었다

 지금은 학년 초가 3월로 되어 있으나 광복 후에는 학년 초가 9월로 되어 있었다. 1950년 6·25전쟁이 나던 해 8월 말이 필자의 대학 졸업기이다. 졸업 2개월 전에 전쟁이 벌어져 서울에서의 하숙생활을 접고 7월11일에 중고 자전거 한 대를 구입하여 인민군대의 대부대가 남으로 이동하는 경강국도를 자전거를 타고 나흘 만인 7월14일에 고향에 이르렀다. 그때의 경강 전 국도에 포장된 곳은 한 곳도 없었고 전부가 자갈이 깔려 있어 겨우 도로 가장자리 자갈이 없는 곳을 골라 타기도 하고 끌기도 하며 고향에 이르렀다.

 도중에서 여러 번 인민군대의 대부대가 남으로 이동을 하는 행렬을 만났다. 그런데 그 행렬을 살펴 보니 제대로 인민군의 군복을 갖추어 입은 사람도 있으나 상당수의 군인은 중학교 교복을 입은 앳된 중학교 학생들이었다. 중학생까지 전쟁에 동원한 것을 보니 인민군도 병력이 모자라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어 고향에 가서 앞으로의 처신에 대하여 고민해 보았다.

 사백(舍伯)은 공직에 있어 시내에서 따로 살았고 양친은 누대 살아온 본가에 살고 계셨기에 본가에서 은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본가 사랑채를 동네 좌익이 점거하고 있기에 본가에서 기거할 처지가 못되어 야음을 타서 시내 사백에게로 옮겨 그 지하실에서 9·28의 수복을 맞았다. 총성이 멎은 뒤 국군을 환영하려고 남대천 제방에 나갔더니 수염이 텁수룩한 친구들이 여기 저기 눈에 띄어 서로 난중에 용케 살았음을 축하하였다. 이런 기쁨도 잠시 그해 12월에 기약 없는 피란 길에 올라 국민방위군 제6단의 주둔지인 울산에서 겨울을 나고 4월에 강릉까지는 수복이 된다 하여 천리길을 도보로 북상, 귀향해 보니 집은 전화를 면하여 옛 모습대로 남아 있었다.

 1951년 8월30일이 대학의 졸업 날짜이고 공교롭게도 같은 날 강릉농업고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고등학교에 부임한 첫 시간 교실에 들어가 국어수업을 시작하려는데 “선생님 질문이 있습니다”하며 한 학생이(이 학생의 이름은 지금도 외우고 있다.) 말을 했다. 그러기에 “무슨 질문인지 해봐.” 고등학교 학생들이 첫 부임하는 애송이 교사를 질문공세로 당황케 한다더니 바로 이거구나 생각이 들었다. “추천이라고 한자로 어떻게 씁니까?”라기에 “추자는 가죽혁 변에 가을 추를 쓰고 천자는 가죽혁 변에 옮길 천자를 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니 흑판에 써 주십시오”라기에 “고등학교 학생이 그것도 몰라”라고 한마디 하면서 흑판에 ●韆(추천)이라고 써주면서 한자의 음과 훈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것이 필자 40년 교단 생활의 첫 수업이었다.

 교사는 전쟁통에 다 불타 버렸고 수업은 그 전 기숙사로 쓰던 건물이 다행히 그대로 남아 있어그 건물을 교실로 썼다. 책상과 의자는 학생 개인이 겨우 앉을 수 있을 정도의 아주 작은 것을 만들어 엉덩이만 겨우 걸칠 수 있었다. 학교에 참고할 도서가 있을리 없는 상황에서 집에 文世榮(문세영)의 `조선어사전'이 남아 있어 그 신세를 많이 졌다.

 학교 산 넘어에 있는 공군부대에서는 매일 몇 차례씩 북쪽으로 출격하는 전폭기의 이·착륙하는 굉음이 들렸고 어쩌다 그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불안하기 그지없는 것이 그때의 상황이었다.

 휴전 막바지 생사를 건 전쟁이 치열한데 강릉에서는 단오행사가 한창이었다. 강릉 남대천 다리를 통해 삼척으로 부상병들을 실은 군용트럭이 수도 없이 먼지를 피우며 달려 가는데 그 트럭이 다니는 국도 바로 옆에서는 단오의 축구경기가 한창이었다. 참으로 우리 민족 우리 역사는 불가사의한데가 있는 민족이요 역사라 생각했다. 전쟁으로 수많은 젊은이가 피를 흘리며 실려가는데 한쪽에서는 축구경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으니 우리에게 있어서는 전쟁과 평화가 한 스크린에 겹쳐져 있어 어느 것이 실상이고 어느 것이 허상인지 분간키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함인섭 춘천농과대학장님이 강릉에 오셔 만나자고 해서 뵈었더니 춘천농과대학이 전시이기에 강릉에 분교를 두기로 했으니 강의를 맡으라는 분부셨다. 그때 필자의 나이 26세로 대학에서 강의할 학문이 못 된다고 극구 사양했으나 때가 전시여서 어느 곳 하나 정상인데가 있느냐시며 맡기고 가셔 분교가 없어질 때까지 강의를 하였다. 그때는 수업을 용강동의 방송국 건물에서 한때 하다가 지금의 농촌한정식 터에 있었던 건물에서도 했고 노암동 김진환씨 사랑채에서도 했다.

 최승순 율곡학회 이사장
위글은  최승순  대선배님께서 강원일보에 화요일마다 회고하신 내용입니다.
몇일전 율곡학회 에서 이사장님 강의가 있어 들엇습니다.
80의고령에도 불구하시고 정정하신 모습을 보니 너무반가왔습니다
질문 하신 선배님 어느분이신지 제가여쭤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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