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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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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은 모춘(暮春)이라 청명곡우(淸明穀雨) 절기로다.
춘일(春日)이 재양(載陽)하여 만물이 화창(和暢)하니
백화는 난만하고 새소리 각색이라!
계절이 하도 좋아 약 150년 전 조선시대의 실학자 정약용 의
둘째아들 정학유(丁學遊)가 지은農家月令歌의 3月令 중에서
일부를 적어봤습니다.
세시풍속과 농촌사회의 실상을 잘 읊어놓은 조선시대의
대표 시가(詩歌)작품이라 흙냄새가 그리울 때마다 감상하며
先人들의 멋스러움에 감탄하곤 합니다.
아마도 江陵 村출신이라 어쩔 수 없나봅니다.
同門 先後輩님 여러분들도 좋은 계절을 맞이하시길 所望합니다.
몇 일전 수유리에 계시는 20期 김영택 선배님 댁을 인사차
방문 했다가 선배님으로부터 「최용근(崔容根) 교장 선생님을
겨우 지금 생각합니다.」란 제목의 A4용지 3枚분량의 짧은
회고문(回顧文)을 받았습니다.
김영택 동문님은 일제 강점기 모교의 校歌 再現 및 최용근 교장
선생님의 공적을 기리며 김同門님을 求心點으로 그분의 추모 사업을
뜻있는 동문들과 함께 進陟中에 있으며 이 회고문을 여러 동문들이
함께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저에게 주셨으며,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다
라고 생각하며 그 내용을 그대로 적어 드립니다.
최용근(崔容根) 교장 선생님을 겨우 지금 생각합니다.
우리 강릉농업학교는 교가에서 뚜렷하게 기술된 것과 같이
온 누리에 뽐내는 금강산의 무릎에 안긴, 임영(臨瀛)벌 한복판에
자리 잡고, 1928년 개교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80여 년 동안
영동지방에서 나라의 기둥이 되는 믿음직한 많은 인재를 길러냈습니다.
이러한 금 방석 같은 배움의 터가 우리 고장에 있었다는 것은
우리가 큰 그릇으로 자라날 수 있도록 아름다운 산수(山水)의
환경이 있다는 것과 친부모와 같이 우리의 장래를 항상 걱정하시고
적기에 충분한 양분을 흡수 할 수 있도록 동분서주 하시면서
보살펴주신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6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그 옛날을 돌이켜 보면서 지금 겨우 알게 된 것 같습니다.
회고하건데 1945년 8월 중순, 우리학교는 전 후반을 교대로
15일간의 여름방학에 들어갔습니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했다는 방송을 듣고, 강당에 집합한 우리는
당시의 일본인 도도가와(都外川)교장 선생님의 짤막한 훈화를 듣고
해산했습니다. “이 시간 이후 일본인 선생(敎論)들은 여러분의
교육에서 완전히 손을 뗀다. 조선인선생님의 지도를 받아라.“
교실에 돌아와서 다시 일본인 담임선생님의 구체적인 말씀을
들었습니다만, 어린마음에 크게 당황했습니다.
다음날부터 최용근 선생님이 교장선생님(후에 정식발령)이 되시어
서병소(徐丙昭)선생님과 합심하셔서 학교에서는 처음 들어보는
「우리말」로 전교 학생들을 보살펴 주셨습니다.
최용근 교장선생님은 1939년 江農의 6회 졸업생으로
일본의 모리오까 고등 농림전문학교를 졸업하시고
가장 어려운 시기에 모교 교사로 봉직 하셨습니다.
그 후 수원농대(現 서울農大)전임교수로 봉직 중 도교육청으로부터
강농의 교장선생님으로 정식발령제의를 받자 교수직도 포기하시고
1948년 5월 5일부터 1954년 9월 1일까지 강농의 제 6대 교장
선생님으로 정식발령을 받아 근무하셨습니다.
최 교장 선생님 자신도 경험하시지 못하셨던, 이 엄청난
공동화(空洞化)의 과도기를 크게 걱정 하셨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다음날부터 모든 학생들은 등교하지 않았으며 사실상
완전 휴교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치안과 행정이 마비된 무법천지
하에서 목적 없는 불순분자들은 학교 무기고에서 훈련용 99식 소총으로
무장하여 패를 갈라 날 뛰었습니다.
이러한 판국에서 각 학과목을 담당할 선생님도 없었지만,
일본인 밑에서 일하던 사람은 모두 친일파라고 배척했고,
민족사상이 투철한 사람만이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대중심리가 강도 높은 불문율로 대두되는 상태에서, 최 교장 선생님은
우선 학과목을 담당할 선생님들을 강릉시내에 모았으며
소수의 학생들을 상대로 교과서도 없이 수업을 정상화 시키면서
교가 4절에 있는 것 과같이「자치와 협동을 불변의 도리로 삼고」
등교한 모든 학생들을 강당에서 합숙시키면서 불순분자들의 교내 난입을
자력으로 지켰습니다.
사회는 아직 어두운 구름에 쌓여 있었지만 교장 선생님의 노력으로
뜻 있는 학부형들이 최 교장 선생님을 중심으로 협조했기 때문에
우리 학교만은 빠른 시일에 정상수업 궤도에 진입 할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약 1년 후 학교가 어느 정도 정상화되는 것을 보시고,
수원농대와 서울에 수시로 출장하시어 몸소 선생님들의 신원보증을
서시면서 고명하신 선생님들을 많이 모셔왔고 이에 모교는 어려운
정치적 환경 속에서도 최신예(最新銳)교수진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명실 공히 영동 제1의 학교 전통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최 교장 선생님은 당신보다 훌륭한 석학(碩學)들을
전국에서 모셔 오셔서 우리들을 길러주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여러분도 잘 아시는 영어를 담당하셨던
조순(趙淳)선생님과 우리나라 동양 화단(畵壇)의 거성이었던
묵노(墨鷺)선생, 유명한 시인(詩人) 황금찬(黃錦燦)선생님이 계셨습니다.
1945년 봄 미국이 교육원조의 일환으로, 한번에 2,000개의 계란을
부화시킬 수 있는 부란기(孵卵器) 3대를 한국에 기증했는데,
그 한 대는 서울농업학교(現 서울市立大)에 또 한 대는 경남
진주농업학교(現진주産業大)에, 나머지 한 대는 최 교장 선생님이
수원으로 직접 가셔서 모교로 가지고 오셨습니다.
당시 교과서에 나오는 부란기는 석유불의 크기를 조절하며
수작업을 요하는 계란20개를 부화시킬 수 있는 용량이 고작이었는데,
전기자동제어식 부란기는 교과서에서 본 것의 100배에 달했고,
전자동으로 기내의 습도는 물론 2시간에 한 번씩 계란을 자동으로
굴려주어 무정란이 아니면 100% 부화되어 한번에
2,000마리의 병아리가 나왔습니다.
이 엄청난 최신식 부란기를 모교로 가지고 올 수 있었던 뒷면에는
江農을사랑했던 최 교장 선생님의 진폭(振幅)넓은 활동을
지금 되새겨보고, 감루(感淚)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 말에 사부동체(師父同体)라고 했습니다.
또 밭에 심어놓은 곡식은 농부의 발자국소리를 듣고 자라며,
집의 낳아놓은 돈아(豚兒)는 저 아비 기침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걱정 없이 살고 있는 것은
그 옛날 아무도 모르게 발걸음과 기침소리로 우리를 길러주신 분들의
정성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한 그 분이 60년이 지난 훗날 공적의 표시를 바라고 앞에서 말한
사랑을 제자들 에게 베풀어 주신 것은 더욱 아니라고 믿습니다.
입암골 월대산 곁에서 경포의 기수호(汽水湖)를 굽어보면서,
나라의 기둥 되는 길을 닦던 우리 모두가 뜻을 모아 우리 모교의
전통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고 굳세게 이어가도록 노력해주시고
사랑해주신, 고 최용근 교장 선생님의 깊은 뜻을 오래도록 기릴 수 있는
추모 사업에 동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07년 3월 27일
강농 20기 김 영 택 올림
친애하는 강농 동문께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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