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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아제 바라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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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을 위해 뼈를 깎고 피울음을 토했던 그들의 절규-
수십년 세월을 고행으로 담금질한 그들의 몸부림-
오로지 자신과의 싸움에서 채찍으로 버틴 그들의 외로움-
그리고 끝내 들어선 '여여(如如)함'의 경지는 과연 어떠한 흔적을 남기었을까.
바람은 실체가 없어도 없는것이 아니다.
가고 옴이 허허(虛虛)로우니 경계가 없고 경계가 없으니 막힘 또한 있을리 없다.
그래서 그와 동행하는 길은 자유로웠다.
.
양자강을 일위도강(一葦渡江)하여 1,500년전 동쪽으로 온 달마(達磨)를 먼저 만났다.
숭산 소실봉에서 바위벽을 앞에두고 9년동안을 면벽좌선 했단다
그가 거처하던 달마굴에는 얼굴과 수염 좌선하던 모습의 윤곽이 보인다.
오랜 새월동안 꿈쩍도 않던 그의 그림자가 바위에 물든 것이라니 놀랍고 놀라울 뿐이다.
깜깜한 그 어둠속에서 달마는 '있음'과 '없음'의 경계를 허물었다,
한마음이 자유로워 진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바위가 되고, 바위가 내가 되는 경지에 들었을 것이다.
바람이 달마에게 까탈을 부렸다.
"달마여! 그대가 마음의 공덕이 있고 없고를 굳이 밝히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들 아름답고
착한 진리의 화현(化顯)들입니다. 마음은 사람에게 내려온 하늘이니, 그 하늘은 딲는것도
아니요 시비할것도 아닌즉 오직 누려야 할 삶일 뿐인데...."
달마가 그냥 빙그레 웃었다.
염화시중(捻華示衆)-'가섭'이 부처가 내민 꽃을보고 아무말 없이 빙그레 웃었다는 그 웃음-
이윽고 달마의 낭낭한 계송이 뒤딸았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아아,피안(彼岸)의 깨달음에 도달하였네)」
.
어느해 겨울이 였다.
마흔살이나 된 신광(信光)이라는 스님 하나가 달마동을 찾아 왔다.
유교와 도교에 정통한 석학이였으나 삶의 밑바닥에 깔린 불안(不安)은 어쩌지 못했다.
눈이 펄펄 내리는 동굴밖에서 그는 꼬박 사흘 밤을 샜다. 드디어 달마가 물었다
"무엇을 구하느냐?"
"뭇 중생을 건져 주십시요"
"만약 하늘에서 붉은 눈이 내리면 법(法)을 주겠다"
달마는 그렇게 거절했다, 그러자 신광은 칼을 뽑아 자신의 왼팔을 잘랐다. 사방으로 피가
튀고 주위의 눈발이 붉게 물들었다. 이에 달마가 말했다.
"부처나 보살도 몸으로 몸을 삼지 않는다.목슴으로 목슴을 삼지 않으니 법을 구할만 하다"
그가 바로 바람과 내가 만난 2조 (二祖) 혜가(慧可)였다.
바람이 이번에는 혜가에게 시비를 걸었다.
"굳이 팔을 짤라야 했는가?"
혜가가 손을 들어 허공을 가르킨다.
"공(空)의 세계에는 고통도 없고 고통의 원인도 없으며 생(生)도 없고 늙고 죽음의 소멸도
없으니 육신이 있고 없음도 이와같을 진대 애초에 그 원인 또한 있겠으랴"
바람이 어깨를 으쓱하며 나를 돌아본다. 도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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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걸림돌은 나의 몸과 마음이다.
그걸 비워야만 온 우주의 몸과 마음-본래 진면목이 들어 난다.
전생의 업장으로 몹쓸병에 걸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하여 혜가를 찾았다가 법통을 이어받은
3조(三祖) 승찬(僧燦), 나를 묶는이는 나밖에 없음을 깨닫고 달마로 부터 내려온 가사와 법
을 받아 4조(四祖)가 된 도신(道信), 그리고 불성(佛性)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는 선문
답으로 자질을 인정받은 5조(五祖)홍인(弘忍)을 차례로 만나는 동안 바람과 나 둘이는 어느
덧 자신을 무아(無我)로 몰입 시키고 있었다.
.
어느날 한 학승이 혜능(慧能)을 찾아왔다.
"글을 모르는 일자무식인 그대가 어찌 진리를 안단 말이요?"
혜능은 한마디로 상대를 승복시켰다.
"진리는 하늘의 달과 같다. 달을 보는데 손가락을 꼭 봐야 하는가?"
이것이 유명한 선종의 불립문자(不立文字)-
달마가 싹티워 온 선종(禪宗)을 활짝 꽃피운 6조(六祖) 혜능의 법문이다.
달마와 혜가에게 깐죽이던 바람이 다시 혜능에게 찝쩍인다.
"정말 글을 몰라도 성불 합니까?"
혜능이 어린아이 달래듯 다둑거린다.
"글은 다만 남에게 보이는 수단일뿐, 깨달음은 내 마음이니 굳이 나타낼 필요가 있는가"
.
머쓱해진 바람을 달래며 내려오는 길에 숱한 혜능의 손가락을 만난다.
그리고 한가지는 확실히 깨쳤다. 그 너머에 달이 있다는 사실을-
바람이 이번에는 나를 대놓고 치근 거린다.
"어디? 어디있어?"
내가 누구인가. 초조 달마에서 6조 혜능까진 만나고 온 소요거사가 아닌가.
"자네 발꿈치를 조금 들어보게"
그래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바람을 위해 조주(趙州)선사의 저 유명한
화두를 넌즈시 일러 줬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 제자에게 선사는 말없이'뜰앞의 잣나무'
를 가르켰다.
조주스님은 불법(佛法)이 자신의 밖에 있지않음을 일러주기 위해 바로 눈앞에 보이는 흔한
잣나무를 가르켰던 것이다. 그런데도 미련한 속인은 조주스님이 가르켰던 그 잣나무가 어느
것인지 찾아내려 두리번 거린다.
.
바람과 함께 지친 마음을 끌고 내려오는 언덕 저넘어로 달마가 온 서쪽하늘이 희뿌였고
조그만하게 보였다.
열려있다고는 하지만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찾을수 없는 길-
삼생(三生)의 윤회속에 얽매여 지향없이 떠도는 어리석은 중생이 찾아 헤매는 <아뇩다라
삼먁삼보리(완전한 께달음)>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임제(臨濟)선사의 그 무엇에도 구애되지 않는 참사람-
'무위진인(無位眞人)의 경지는 어디에 가야 찾을수 있단말인가.
그 많은 업장 어느 하나라도 소멸하지 못하고 무거운 짐에 눌려 허우적 거리는 내 육신이
너무 가여워 '다라니경'의 참회진언(懺悔眞言) 이 몇번이고 절로 터져나왔다.
「옴 살바 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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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윤기님의 댓글
김윤기 작성일
소 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아아,피안(彼岸)의 깨달음에 도달하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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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 깨닿음의 주인란 말인가?
피안(彼岸)이란 나약한 자아(自我0)의 가상적인 도피처에 지나지 않음이며
무아(無我)의 지경에 이름도 허구이고 착란일 뿐,
"나(주체)"라는 존재를 부정함으로서 오감으로 받아 드리는 희로애락과 병로생사에 대한
불안한 대상(對相) 일체(一切)를 부정하려는 환각상태로 몰입하는 것이 깨닿음의 길이라면,
그 경지가 깨닿음이라면
나는 내 한끼를 때우기에도 모자라는 라면 한봉지와도 바꾸지 않을 것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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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임제(臨濟)선사의 그 무엇에도 구애되지 않는 참사람-
'무위진인(無位眞人)의 경지는 어디에 가야 찾을수 있단말인가.
그 많은 업장 어느 하나라도 소멸하지 못하고 무거운 짐에 눌려 허우적 거리는 내 육신이
너무 가여워 '다라니경'의 참회진언(懺悔眞言) 이 몇번이고 절로 터져나왔다.
「옴 살바 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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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이런 고뇌가 어디서 온 것인가?
무아에 이르고 싶다면 자신의 목을 쳤야할 혜가가 아니였나 싶네
업장은 소멸 시키는 것도 소멸 시키려 덤비는 것도 부질없는 것으로 겸허히 받아 드리는 것이라 생각해 봄일세
하늘의 뜻(섭리)을 따라 일체를 맡기는 마음이 깨닿음라고 쉽게 쉽게 단정해 버리면서 말일세
강성남님의 댓글
강성남 작성일
두 선배님의 글 을 보노라면 선승분들의" 선 "문" 답같습다
소요거사님의 댓글
소요거사 작성일
'깨달음'은 자기완성이다.
부단한 용맹정진으로 '참'이라는 화두에서 한줄기 갈길을 찾아나서는 이 깨달음은
「자기부정」이 아닌 「자기인정(自己認定)」이라는 바탕위에서 이루어진다.
만일 인간이 자기를 부정한다면 이 깨달음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깨달음의 긍극에는' 훤한 빛(光明)'이있다고 했다.
번뇌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자아를 어디로 이끌어야 하는가 라는 명확한 답을 얻기에
그것은 환희요 극락이라 했다.
깨달음을 '나 라는 존재부정에서 오는 환각상태라는 관념'은 진리탐구의 일념에 용진하는
많은 구도자들에 대한 편견적 시각에서 온 탓일듯 여겨진다.
임제 선사의 無位眞人 사상도 자기인정의 바탕에서 나온것이 분명할것이고
혜가가 목이 아닌 한쪽팔을 자른 의미도 자신을 버리지 않는 바탕에서 비롯된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선각자들의 지혜를 자신의 깨달음에 인용함은 우리 범부들이 애초에 갖고 태어난 미약함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의 한 방편이라고 생각해 본다면 답은 명확해 지지않을까.
다만 열심히 배우고 익히는 길 뿐이라 생각된다.
"안연(顔淵)이 말하기를 순(舜)임금은 어떤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려는 노력만 있으면 그런
사람이 될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나도 마땅히 그를 모범으로 삼겠다"는 율곡의 <적몽요결>의 가르침이 생각난다.
실생활에서 삼가고 실천하고 마음을 통제하고 다스리면 능히 賢者가 될수있다는 이 말은
우리같은 愚者들에게도 용기를 주는 내용이 아닐수 없기 때문이다.
김윤기님의 댓글
김윤기 작성일
애시당초 진리라 이를 수 있는 절대적 개념도 없었지만 학문으로서의 철학과 실천과 적용을 전제로한 철학 사이엔
이상과 현실의 괴리, 꿈과 현실의 차이처럼 상호 대립하는 엄청난 모순을 느껴야만 하는 나는
우자(愚者)인가 현자(賢者)인가 ?
이 극단의 명제를 대립시켜 놓고 또 한번 자문자답을 던져보게 된다.
달마나 혜자의 깨닿음도 석가의 손바닥 안에 있고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단정한 예수의 주관안에 예수의 진리가 있듯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주관적인 진리를 이미 갖고 사는 것이다.
나의 주장을 구도자에 대한 편견적 시각으로 보다
내가 가진 주관적 진리에 대한 주장으로 이해할 필요를 느낀다.
이러한 주장이 명분을 갖게되는 첫번째 요인이 달마나 혜자보다 친구인 내가 더 그대에게 가까이 있음이며
그들보다 더 소상히 그대를 알고 더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나를 알고 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의 언어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리는 것은
그들의 언어가 나를 위한 언어이고
내 자신을 위한 언어가 나에게는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ㅋㅋㅋ
우자(愚者)자나 현자(賢者)로 구분지을 나는 처음부터 없었고 구분의 대상도 아니다.
백년도 못사는 짧은 인생
9년간 벽면좌선하고도 임종에 이르러 득도할 일이라면
채소밭에 뿌릴 똥지게는 누가 지며 代를 이을 인종의 씨는 누가 뿌리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