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자유 게시판
허균, 허난설헌의 생가 탐방
페이지 정보
본문
허균, 허난설헌의 - 2007. 7. 17(화) 제헌절 날 오후 4시경 촬영 - 날씨는 흐림
허난설헌
그녀는 세 가지의 恨을 입버릇 처럼 말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여자로 태어난 것..
다른 하나는 조선에서 태어난 것..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
허난설헌의 본명은 초희(楚姬). 별호는 경번(景樊), 난설헌은 호라고 합니다.
(許蘭雪軒, 1563∼1589: 명종 18∼선조 22).
그녀는 어릴 적부터 놀라운 글로 찬사를 받아왔으며,
당시의 마음에 들지않는 사람을 거부할 수 조차 없었던 사회 속에서의 한을
시에 담아 한탄하며 표출하기도 하였습니다.
閨怨(규원)
비단띠 비단치마 눈물 흔적 쌓였음은
임 그린 1년 방초의 원한의 자국
거문고 옆에 끼고 강남곡 뜯어 내어
배꽃은 비에 지고 낮에 문은 닫혔구나
달뜬 다락 가을 깊고 옥병풍 허전한데
서리친 갈밭 저녁에 기러기 앉네
거문고 아무리 타도 임은 안 오고
연꽃만 들못 위에 맥없이 지고 있네
그녀는 미쳐 피지도 않은 나이 15세에 '김성립'과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남편 김성립의 방탕한 생활과 기방 출입은 그녀를 더욱 고독하게 만들고
반면 김성립은 늘 재주가 빼어난 자신의 부인 난설헌에게
열등 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허난설헌의 난초그림
그녀는 죽기 전, 자신의 모든 작품을 태워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난설헌의 글이 너무 아깝고 억울하여 동생(허균)은
모두 태워 버리지는 않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숨막히는 당시 유교 사회에서 철저하게 버림받고 희생당한,
빼어난 미모와 재능의 소유자인 허난설헌의 아픔이 40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녀의 얼마 전해 지지 않는 몇 편의 시와 그림 속에서 배어 나오는 듯 합니다.
**** 퍼옴긴 글임
- 이전글</font color=blue></B>key-k산악회 8월 정기산행 공지 07.07.18
- 다음글제헌절의 의미를 되새겨 보면서 07.07.17
댓글목록
이기동님의 댓글
이기동 작성일
기념관은 2004년 하반기에 신축공사를 하고있는것을 보았는데
내부는 보지못하엿습니다. 내부사진은 없는지요,,,,^^*
♡農心弟兄님의 댓글
♡農心弟兄 작성일
선배님 사진 잘보았습니다.
세가지 한을 입버릇처럼 했다는 말씀에 허난설헌의 이미지가 많이 퇴색되는듯 합니다.
세가지 한이 본인의 욕심과 노력으로 성취되는것이 아니기에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며
그런 현실속에서 더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런지요?
김윤기님의 댓글
김윤기 작성일
기념관 내부도 둘러 보았습니다
웬지 마음이 내키지 않아 내부 촬영은 하지 않았죠
마음이 동하면 그때 촬영해볼 양입니다
가까운 시일내에 경기도 광주시에 있다는 허난설헌의 묘를 찾아볼 기회를 만들어 볼 작정이구요
별다른 뜻보다 흠모의 정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이해인 수녀님도 꼭 뵙고 싶은 분이시죠
먼 발치에서라도 어떻습니까
조규전님의 댓글
조규전 작성일
선배님의 좋은 사진과 뜻 깊은 글을 보노라니 일전에 '터놓고말합시다.'에 올린 한(恨)에 관한 제 글이 생각납니다.
당대의 여류 문인이었던 허난설헌의 글들은 우리나라에서보다 중국에 더 잘알려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허난설헌의 전기를 보면 당대의 삶이 얼마나 험하고 쓰라렸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게다가 허난설헌에겐 남들보다 더 가혹한 운명이 그녀의 일생동안을 괴롭혀왔다는 것도 정설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뇌의 연속선상에서 이어졌던 그녀의 삶에 질곡이 보통인간이 생각치못한 세계까지 보듬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장마비가 잠시 비킨 상태라 마음만은 좀 가벼워지는 것 같습니다.
이 좋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배우고 느껴야 할 부분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김윤기님의 댓글
김윤기 작성일
역사의 현장은 그 역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상식과 그리고 나름의 유추와 상상이 있어야 제맛이 난다
단아한 한복차림에 연당을 거닐던 초희의 모습은 어떠했을지
가부장적 사회에서 서얼의 딸로 태어나 천부적인 시재의 붓을 들어 시와 난을치던 초희.
어스름히 저물어 가는 초당의 솔밭에서 아련히 피어 오르던 저녁연기 처럼
한 시대와 불화했던 허난설헌의 한이 어찌 아련히 전해 오지 않았으랴
역사는 그녀의 한을 묻어 버리지는 못했지만 시재의 예술적 가치를 드러내기엔
아직도 미흡하기만 하다
푸른솔님의 댓글
푸른솔 작성일
선배님
좋은 글과 사진 잘 감상하였습니다.
선배님이 말씀하신 허난설헌의 묘지가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에 있습니다.
무작정 마음이 동하여 찾으실 때 연락을 주십시요
오시면 제가 안내를 하겠습니다.
존안을 뵈옵는 기쁨을 학수고대하겠습니다.
김윤기님의 댓글
김윤기 작성일
푸른솔
녹음이 방초하여 산불 걱정이 없을 요즘같은 날이 좋을듯 싶네
초행길이라 믿는건 그대뿐일세
과객의 한잔 술로 난설헌의 500년 한을 달랠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생가 사진이라도 한장들고 가면 큰 위로가 아니되겠는가
사전에 연통을 넣고 바람처럼 가리다
조덕행님의 댓글
조덕행 작성일
지난 겨울 초교 동창과 그 곳을 둘러보고 바로 앞 이름모를 꽤 유명하단 두부집에서
점심으로 얼큰한 두부전골을 맛나게 비우고 왔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항상 살아있는 배경에 좋은 글로서 마음을 살찌워 주심을 감사드림니다 .
선배님의 정성에 적당히 흐린 날씨가 더욱 선명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탄생 시켰네요.
<초당의 솔밭과 아름다운 정원에 회색 콘크리트 벤치는 언제쯤에나 목조로 변할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