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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은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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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요거사
작성일 2007-10-23 10:05
댓글 0건
조회 907회
본문
「보리고개 밑에서 아이가 흘리는 눈물속에
할머니가 울고 있는것이 보인다
얼마나한 사람은 죽어서 못넘었다
코리아의 보릿고개 않넘을수 없는 운명의
구천미터...」
시인 황금찬은 '보릿고개'가 에베레스트 보다 더 높고 험하다고 묘사했다.
1970년대 초반까지도 쌀은 물론 보리와 밀가루도 턱없이 부족하여 너나없이 허리띠를 졸라
매야 하던 시절이 있었다.
박정희 정부가 통일벼 등 신품종 개발을 서둘러 한해 200만t을 밑돌던 생산량을 간신히 300
만 t 으로 끌어 올렸지만 쌀은 늘 부족했다.
1주일에 하루는 밀가루만 먹는 '분식의 날'이 제정되고 잡곡을 썪어 먹으라는 '혼분식의
노래'라는 것도 만들어져 절미(節米)를 장려했다.
말이 장려였지 실제로는 반강제적인 권유책이였는데 이때 아이들은 학교에 가면 점심때
마다 도시락 검사를 받아 맨 쌀밥만 싸오면 선생님께 혼이 나가도 했다.
원래 가난했던 내 어린시절은 명절때나 제삿날이 아니면 순 쌀밥은 구경조차 할수 없었으니
분식이나 혼식은 하지말래도 할일이었지만 한동안은 농주(農酒)나 제주(祭酒)로 사용하기
위하여 집에서 조금씩 빚는 가용주(家用酒)마져 단속하는 통에 명절 즈음이면 술단지를
움켜들고 으슥한 헛간이나 뒷냇가 등으로 감추러 다니는 웃지못할 풍경도 보고 자랐다.
이러던 쌀은 80년대 부터 남아돌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외국쌀 까지 수입되면서 갈수록 재고가 늘어나고 국민들의 식생활 변화로 소비량
까지 줄어들면서 정부정책은 어느덧 쌀소비촉진으로 돌아섰다.
90년대 쌀가공식품은 허용되었지만 남는쌀의 수출은 계속 금지되니 우리 쌀생산 농가의 타
격은 갈수록 심화되어 유휴경작지가 늘어나면서 농사짓는 자체를 포기하는 지경까지 이르
렀다. 농사(農事)가 천하지대본(千下之大本)이고 농자(農者)가 백성의 근원이던 뿌리의식
이 허무러 지기 시작한 것이다.
1950년 배곯던 시절 만들어진 양곡관리법은 시대착오적이 되었고 이제는 개방시대를 맞아
수출을 통한 돌파구를 여는길 만이 우리 농업이 사는 길이 되었다.
농정(農政)의 대 전환이 불가피 해진 것이다.
농림부가 얼마전 전북 군산의 미곡처리장에서 '철새도래쌀' 53 t 을 첫 수출허가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였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 농업의 자생력은 어디에 있는걸까?
「쌀 자급」이라는 목표가 무의미 해진 지금 증산(增産)보다 세계시장에서 이길수있는
「품질 경쟁력 높이기」가 쌀 산업의 지상과제가 될수 밖에 없다.
요즘 한 백화점 수입농산물코너에 25kg 한포대에 물경 100만원을 호가하는 명품쌀이 등장
했다. '고시히카리'라는 상표가 선명한데 일본말 고시(찰기)와 히카리(윤기)의 합성어 이름
으로 어느새 최고급 쌀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자리매김 하고있다.
값은 둘째 치고라도 물량이 귀해 미국,유럽,한국등에 암시장이 형성될 정도라 한다.
그러나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고시히카리는 재배지인 일본 니카타보다 우리 남한이 더 재배
환경에 적합하다고 한다.
위도는 비슷하지만 강수량이나 태풍,병충해발생도 등이 훨씬 유리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라고 왜 이런 명품농산물을 생산해 내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전남 진도의 30대 한 귀농인인 채원준씨는 소포만 간척지 6만여 평에서 친환경농법으로
'오색(五色)쌀'을 생산해 내 년간 1억원이 넘는 소득을 올리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채씨는 일반쌀로는 경쟁력이 없다고 보고 노화방지와 항암효능이 뛰어 나다는 기능성 검정
쌀을 생산한 것을 시작으로 녹색쌀과 붉은쌀,흰쌀,찹쌀등 이른바 오색쌀을 생산한 것이다.
이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千下之大本)」이라는 막연한 자긍심과 낡은 방식의 깃발은 내
려야 한다. 개방이라는 경쟁에서 살아 남으려면 변화된 사고와 기술로 스스로를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시책의 보호일방주의 개선도 필요하지만 우리 농민들
자신의 희망과 열정이 무엇보다 필요할 것이다.
.
땅은 정직하다. 땀흘린 만큼 거둘수 있고 준것만큼 얻을수 있다.
수확의 기쁨은 뿌린자만이 맛볼수 있지 않은가.
우리 고교시절 '시식의 날'을 기억하는 이 있을 것이다.
책가방 대신 뱅뱅돌이 밥공기와 숫가락 하나 딸랑들고 등교하면 목공실앞 빈터에 마련된
아궁이에서는 장작불이 훨훨 타오르고 가마솥에는 소고기국이 설설 끓었다.
하얀 쌀밥을 왕건이가 듬뿍 얹어있는 고기국에 꾹꾹말아 원없이 먹고나면 여름한해
선생님과 학우들과 땀 흘리며 모심고 김매던 추억이 파노라마 되어 스쳐갔던 그 시절-
얼마전 한 신문 오피니언난에 '오이데이를 아시나요?'하는 재미난 글이 있었다.
농협이 우리 농산물의 우수성을 널리 애용하자는 의미에서 5월2일을 오이데이로 정해 오이
소비를 확대하고 농가 소득증진에 일조하려는 취지란다.
그래서 더 알아보니 복숭아데이(말복),구구데이(9월9일 닭의 날),애플데이(10월24일)등도
이미 만들어 농산물 소비촉진에 힘쓰고 있었다.
그것이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위기에 처한 우리 농업과 농촌을 살리는 길이라 여겨지니
잘한 일로 생각된다. 그런데 '쌀데이'는 왜 없을까?
60평생을 농사를 천직으로 살아온 언별리 고향친구 하나가 짓고 있던 전답을 팔아 치우고
시내로 이사 간다는 전화를 받고 며칠을 심란했다.
나와 그가 아주 어렸을적 그의 조부와 부친이 장작을 패서 읍내에 내어팔아 모은 종잣돈으로
마련한 논과 밭이였는데...그도 그 땅을 얼마나 아꼈었는데...
더욱이 마지막 그의 자조썪인 말이 내내 가슴속을 방망이 치듯 휘젖고 다녀서 더욱 아프다.
"...뭔...희망이 있어야지..."
할머니가 울고 있는것이 보인다
얼마나한 사람은 죽어서 못넘었다
코리아의 보릿고개 않넘을수 없는 운명의
구천미터...」
시인 황금찬은 '보릿고개'가 에베레스트 보다 더 높고 험하다고 묘사했다.
1970년대 초반까지도 쌀은 물론 보리와 밀가루도 턱없이 부족하여 너나없이 허리띠를 졸라
매야 하던 시절이 있었다.
박정희 정부가 통일벼 등 신품종 개발을 서둘러 한해 200만t을 밑돌던 생산량을 간신히 300
만 t 으로 끌어 올렸지만 쌀은 늘 부족했다.
1주일에 하루는 밀가루만 먹는 '분식의 날'이 제정되고 잡곡을 썪어 먹으라는 '혼분식의
노래'라는 것도 만들어져 절미(節米)를 장려했다.
말이 장려였지 실제로는 반강제적인 권유책이였는데 이때 아이들은 학교에 가면 점심때
마다 도시락 검사를 받아 맨 쌀밥만 싸오면 선생님께 혼이 나가도 했다.
원래 가난했던 내 어린시절은 명절때나 제삿날이 아니면 순 쌀밥은 구경조차 할수 없었으니
분식이나 혼식은 하지말래도 할일이었지만 한동안은 농주(農酒)나 제주(祭酒)로 사용하기
위하여 집에서 조금씩 빚는 가용주(家用酒)마져 단속하는 통에 명절 즈음이면 술단지를
움켜들고 으슥한 헛간이나 뒷냇가 등으로 감추러 다니는 웃지못할 풍경도 보고 자랐다.
이러던 쌀은 80년대 부터 남아돌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외국쌀 까지 수입되면서 갈수록 재고가 늘어나고 국민들의 식생활 변화로 소비량
까지 줄어들면서 정부정책은 어느덧 쌀소비촉진으로 돌아섰다.
90년대 쌀가공식품은 허용되었지만 남는쌀의 수출은 계속 금지되니 우리 쌀생산 농가의 타
격은 갈수록 심화되어 유휴경작지가 늘어나면서 농사짓는 자체를 포기하는 지경까지 이르
렀다. 농사(農事)가 천하지대본(千下之大本)이고 농자(農者)가 백성의 근원이던 뿌리의식
이 허무러 지기 시작한 것이다.
1950년 배곯던 시절 만들어진 양곡관리법은 시대착오적이 되었고 이제는 개방시대를 맞아
수출을 통한 돌파구를 여는길 만이 우리 농업이 사는 길이 되었다.
농정(農政)의 대 전환이 불가피 해진 것이다.
농림부가 얼마전 전북 군산의 미곡처리장에서 '철새도래쌀' 53 t 을 첫 수출허가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였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 농업의 자생력은 어디에 있는걸까?
「쌀 자급」이라는 목표가 무의미 해진 지금 증산(增産)보다 세계시장에서 이길수있는
「품질 경쟁력 높이기」가 쌀 산업의 지상과제가 될수 밖에 없다.
요즘 한 백화점 수입농산물코너에 25kg 한포대에 물경 100만원을 호가하는 명품쌀이 등장
했다. '고시히카리'라는 상표가 선명한데 일본말 고시(찰기)와 히카리(윤기)의 합성어 이름
으로 어느새 최고급 쌀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자리매김 하고있다.
값은 둘째 치고라도 물량이 귀해 미국,유럽,한국등에 암시장이 형성될 정도라 한다.
그러나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고시히카리는 재배지인 일본 니카타보다 우리 남한이 더 재배
환경에 적합하다고 한다.
위도는 비슷하지만 강수량이나 태풍,병충해발생도 등이 훨씬 유리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라고 왜 이런 명품농산물을 생산해 내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전남 진도의 30대 한 귀농인인 채원준씨는 소포만 간척지 6만여 평에서 친환경농법으로
'오색(五色)쌀'을 생산해 내 년간 1억원이 넘는 소득을 올리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채씨는 일반쌀로는 경쟁력이 없다고 보고 노화방지와 항암효능이 뛰어 나다는 기능성 검정
쌀을 생산한 것을 시작으로 녹색쌀과 붉은쌀,흰쌀,찹쌀등 이른바 오색쌀을 생산한 것이다.
이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千下之大本)」이라는 막연한 자긍심과 낡은 방식의 깃발은 내
려야 한다. 개방이라는 경쟁에서 살아 남으려면 변화된 사고와 기술로 스스로를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시책의 보호일방주의 개선도 필요하지만 우리 농민들
자신의 희망과 열정이 무엇보다 필요할 것이다.
.
땅은 정직하다. 땀흘린 만큼 거둘수 있고 준것만큼 얻을수 있다.
수확의 기쁨은 뿌린자만이 맛볼수 있지 않은가.
우리 고교시절 '시식의 날'을 기억하는 이 있을 것이다.
책가방 대신 뱅뱅돌이 밥공기와 숫가락 하나 딸랑들고 등교하면 목공실앞 빈터에 마련된
아궁이에서는 장작불이 훨훨 타오르고 가마솥에는 소고기국이 설설 끓었다.
하얀 쌀밥을 왕건이가 듬뿍 얹어있는 고기국에 꾹꾹말아 원없이 먹고나면 여름한해
선생님과 학우들과 땀 흘리며 모심고 김매던 추억이 파노라마 되어 스쳐갔던 그 시절-
얼마전 한 신문 오피니언난에 '오이데이를 아시나요?'하는 재미난 글이 있었다.
농협이 우리 농산물의 우수성을 널리 애용하자는 의미에서 5월2일을 오이데이로 정해 오이
소비를 확대하고 농가 소득증진에 일조하려는 취지란다.
그래서 더 알아보니 복숭아데이(말복),구구데이(9월9일 닭의 날),애플데이(10월24일)등도
이미 만들어 농산물 소비촉진에 힘쓰고 있었다.
그것이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위기에 처한 우리 농업과 농촌을 살리는 길이라 여겨지니
잘한 일로 생각된다. 그런데 '쌀데이'는 왜 없을까?
60평생을 농사를 천직으로 살아온 언별리 고향친구 하나가 짓고 있던 전답을 팔아 치우고
시내로 이사 간다는 전화를 받고 며칠을 심란했다.
나와 그가 아주 어렸을적 그의 조부와 부친이 장작을 패서 읍내에 내어팔아 모은 종잣돈으로
마련한 논과 밭이였는데...그도 그 땅을 얼마나 아꼈었는데...
더욱이 마지막 그의 자조썪인 말이 내내 가슴속을 방망이 치듯 휘젖고 다녀서 더욱 아프다.
"...뭔...희망이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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