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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제2세대 선배님들이 일으킨 동문회의 문예부흥 (3)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재경동문회
작성일 2008-05-04 02:53
댓글 0건
조회 867회
본문
========================================================
재경 5월 5일 행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협조 당부 (3)========================================================
5월 3일(토) 휴일이지만,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바쁜 하루였습니다.
밖의 날씨는 한여름처럼 무지 무지하게 무덥습니다. 그래서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현재시간이 어느덧 새벽 2시 40분이니깐, 이제 내일이 바로 5월 5일이군요.
걱정이 되어서 집 밖으로 잠시 나갔다왔는데, 하늘에 별은 보이지 않습디다.
그러나 일기예보에는 5월 5일 영남지방에만 오후 한때 비가 온다고 했으니 다행입니다.
행사를 앞둔 탓인지? 잠이 오지 않아 제3편이나 마무리하고 눈을 붙일까합니다.
----------
재경동문회를 이끈 제2세대(아버지 세대 : 20회~ 30회의 선배님들 주축)의 선배님들이 그동안
모교와 동문회를 위하여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특히 젊은 동문님들께 누군가 알려 드려야만
할 것 같아서 3편이라는 이름하에 이자리를 통해 주요공적 사항 몇가지만 기술합니다.
( 1976년 재경동문회의 첫 가족체육대회가 열리던 시절부터 2000년까지 )
▶ 모교 축구부의 45인승 버스를 구입하여 제공
▶ 모교 축구부 숙소 및 동창회 콘네이더 박스 회의실 건축비 지원
▶ 졸업생중 재경으로 진학한 대학생들에게 매년 3~4명 선발, 10여년간 장학금 지급
▶ 모교 재학생 도 및 전국실기대회 출전 비용 지원 / 실습용 기자재 구입 기증
▶ 처음으로 모교에서 재경동문들 여름캠프 운영 (학교 운동장과 교실에서 1박 2일)
▶ 총동문회 테니스회와 재경동문회 테니스회 매년 고향에서 정규전 실시 교류와 친목강화
▶ 기타 그외 모교와 축구부 등의 발전을 위해 항상 협조 활동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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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세대 선배님들이 부흥시킨, 동문회의 르네상스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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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를 우리 재경동문들은 동문회의 문예부흥기. 르네상스 시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주역은 조직 구분상 아버지 세대로 불리우는 20회~ 40회의 동문들님이셨으며 그 중앙에는
언제나 제19회 홍순길 선배님이 계셨습니다.
이분이 재경동문회 제6대 회장님을 맡으신 시기에 그분의 연세는 40대 후반인 지금의 우리 동문들
기수로 친다면 45회 정도의 연세셨습니다.
우리나라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산업화를 구축하고, 이어 중동지역 개발붐이 한창이던 시절
뛰어난 아랍어의 구사와 더불어 중동지역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왕족들과 친분이 두터운 탓에 그 개척의
첨병 역할을 담당하셨던 홍순길 회장님께서 당시 해외건설 협회장님으로 부임하시면서 재경동문회의
체육대회 행사는 더욱 기틀이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절 우리 선배님들 중엔 산업은행 총재를 하시던 김흥기(23회) 선배님과 또 상공부 차관을 하신
홍성좌(23회) 선배님을 비롯하여 건설업으로 자리를 굳히신 권오식(23회) 3인방 선배님을 비롯하여
당시 대한상공회의소의 관리이사님으로 재직중이시던 이명원(27회) 선배님 등이 떡 버티고 계시며
후배들을 이끌고 계신 가운데, 젊은 36회와 37회 재경 선배님들이 期모임에서 벗어나 재경동문회로
큰 발전을 도모코자 체육대회 행사를 처음으로 주창하셨으며, 이를 34회 박병설 회장님을 비롯하여
많은 34회와 35회 선배님들이 뒷받침 하시면서 재경동문회는 서서히 용트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재경동문회에서는 후배들을 위한 장학금 모금운동을 전개했고, 여기서 오늘날의
재경동문회 장학금의 큰 몫이된 최길순(37회. 現 재경산악회 회장) 장학금도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재경동문회는 오직 체육대회 행사를 통하여 발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객지에서 생업에 종사하면서 겪는 어려움과 스트레스는 체육대회를 통해 풀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에 500여명에서 1990년대엔 1,000여명으로 체육대회 참가자는 점차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대 중반 처음 시작된 경희대학과 충암고등학교에서 개최되었던 재경동문회 체육대회 행사에는
시작초기인 처음부터 우리 고향 본가의 동문들이 대거 上京하시어 참석하셨습니다.
처음에는 행사준비도 어렵고 또 경비의 갹출도 어려워 기수별로 돌아가면서 약 10여년간 체육대회를
36회, 37회, 34회 순등으로 비교적 모임이 활성화된 기수 중심으로 반복하여 시작했었습니다.
그러다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재경동문회가 총괄하는 대규모의 체육대회 행사로 발전 되었지요.
재경의 동문회가 주관하는 행사를 시행하면서 임원회가 탄탄해졌습니다. 결국 체육대회를 준비하기
위한 임원회의를 하면서 각 기수별 임원진이 확고히 구성되었습니다.
임원회의에서는 체육대회를 준비하면서 자연스럽게 모교를 위한 지원문제 등도 논하게 된 것입니다.
1980년대 중반엔 재경의 23회 김흥기(前 산업은행총재)선배님을 모교총동문회의 회장으로 취임하시어
다년간 모교 총동문회를 이끌기도 하시면서 고향 본가인 총동문회의 어려운점도 잘 아시게 되었지요.
우리 재경동문회에서는 홍순길(재경 제6대회장, 7년 연임) 회장님 시절, 모교 축구부 합숙소 지원과
또한 현 동창회 사무실 건물 등의 일부 비용을 재경동문회에서 마련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홍성좌(재경 7대회장)회장님과 권오식(재경 8대회장) 회장님 시절에도 모교출신중에 대학에
진학하는 우수 학생을 선발하여 장학금을 꾸준히 지원하셨으며, 모교의 학습기자재 지원을 비롯하여
재학생들의 기능대회 출전비용까지도 지원하는 등 노력을 다해 왔습니다.
이 모든 것은 재경동문회가 재경종합체육대회를 치루면서 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의견을 수렴하여
시행해 온 것임을 밝히는 바입니다.
재경 동문들은 비록 서울에서 단칸방에 월세와 전세를 살아도 각자 十匙一飯 주머니를 털었습니다.
잘 아시듯 “서울에 사는 동문들은 다 잘사는 동문들이 절대로 아닙니다.”
고향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먹을 것을 찾고자 생존을 위해 上京한 동문들도 수없이 많습니다.
타향에서의 치열한 경쟁과 또한 오염된 환경으로 인하여 병(病)을 얻어 낙향하시는 많은 동문들도
계셨으니깐요.
어떻든 재경동문회는 화려한 전력 그리고 막강한 파워를 지니신 제2세대 선배님들의 활발한 활동으로
인하여 부흥기를 맞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기를 재경강릉농공고동문회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재경동문회를 이해하시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 주절 주절 너무 떠들었군요.
내용이 길어서 이만 줄입니다.
제4편에서는 제3세대로 불리는 아들세대의 활동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글쓴이 : 재경 44회 李 相卿)
재경 5월 5일 행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협조 당부 (3)========================================================
5월 3일(토) 휴일이지만,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바쁜 하루였습니다.
밖의 날씨는 한여름처럼 무지 무지하게 무덥습니다. 그래서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현재시간이 어느덧 새벽 2시 40분이니깐, 이제 내일이 바로 5월 5일이군요.
걱정이 되어서 집 밖으로 잠시 나갔다왔는데, 하늘에 별은 보이지 않습디다.
그러나 일기예보에는 5월 5일 영남지방에만 오후 한때 비가 온다고 했으니 다행입니다.
행사를 앞둔 탓인지? 잠이 오지 않아 제3편이나 마무리하고 눈을 붙일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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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동문회를 이끈 제2세대(아버지 세대 : 20회~ 30회의 선배님들 주축)의 선배님들이 그동안
모교와 동문회를 위하여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특히 젊은 동문님들께 누군가 알려 드려야만
할 것 같아서 3편이라는 이름하에 이자리를 통해 주요공적 사항 몇가지만 기술합니다.
( 1976년 재경동문회의 첫 가족체육대회가 열리던 시절부터 2000년까지 )
▶ 모교 축구부의 45인승 버스를 구입하여 제공
▶ 모교 축구부 숙소 및 동창회 콘네이더 박스 회의실 건축비 지원
▶ 졸업생중 재경으로 진학한 대학생들에게 매년 3~4명 선발, 10여년간 장학금 지급
▶ 모교 재학생 도 및 전국실기대회 출전 비용 지원 / 실습용 기자재 구입 기증
▶ 처음으로 모교에서 재경동문들 여름캠프 운영 (학교 운동장과 교실에서 1박 2일)
▶ 총동문회 테니스회와 재경동문회 테니스회 매년 고향에서 정규전 실시 교류와 친목강화
▶ 기타 그외 모교와 축구부 등의 발전을 위해 항상 협조 활동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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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세대 선배님들이 부흥시킨, 동문회의 르네상스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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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를 우리 재경동문들은 동문회의 문예부흥기. 르네상스 시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주역은 조직 구분상 아버지 세대로 불리우는 20회~ 40회의 동문들님이셨으며 그 중앙에는
언제나 제19회 홍순길 선배님이 계셨습니다.
이분이 재경동문회 제6대 회장님을 맡으신 시기에 그분의 연세는 40대 후반인 지금의 우리 동문들
기수로 친다면 45회 정도의 연세셨습니다.
우리나라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산업화를 구축하고, 이어 중동지역 개발붐이 한창이던 시절
뛰어난 아랍어의 구사와 더불어 중동지역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왕족들과 친분이 두터운 탓에 그 개척의
첨병 역할을 담당하셨던 홍순길 회장님께서 당시 해외건설 협회장님으로 부임하시면서 재경동문회의
체육대회 행사는 더욱 기틀이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절 우리 선배님들 중엔 산업은행 총재를 하시던 김흥기(23회) 선배님과 또 상공부 차관을 하신
홍성좌(23회) 선배님을 비롯하여 건설업으로 자리를 굳히신 권오식(23회) 3인방 선배님을 비롯하여
당시 대한상공회의소의 관리이사님으로 재직중이시던 이명원(27회) 선배님 등이 떡 버티고 계시며
후배들을 이끌고 계신 가운데, 젊은 36회와 37회 재경 선배님들이 期모임에서 벗어나 재경동문회로
큰 발전을 도모코자 체육대회 행사를 처음으로 주창하셨으며, 이를 34회 박병설 회장님을 비롯하여
많은 34회와 35회 선배님들이 뒷받침 하시면서 재경동문회는 서서히 용트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재경동문회에서는 후배들을 위한 장학금 모금운동을 전개했고, 여기서 오늘날의
재경동문회 장학금의 큰 몫이된 최길순(37회. 現 재경산악회 회장) 장학금도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재경동문회는 오직 체육대회 행사를 통하여 발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객지에서 생업에 종사하면서 겪는 어려움과 스트레스는 체육대회를 통해 풀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에 500여명에서 1990년대엔 1,000여명으로 체육대회 참가자는 점차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대 중반 처음 시작된 경희대학과 충암고등학교에서 개최되었던 재경동문회 체육대회 행사에는
시작초기인 처음부터 우리 고향 본가의 동문들이 대거 上京하시어 참석하셨습니다.
처음에는 행사준비도 어렵고 또 경비의 갹출도 어려워 기수별로 돌아가면서 약 10여년간 체육대회를
36회, 37회, 34회 순등으로 비교적 모임이 활성화된 기수 중심으로 반복하여 시작했었습니다.
그러다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재경동문회가 총괄하는 대규모의 체육대회 행사로 발전 되었지요.
재경의 동문회가 주관하는 행사를 시행하면서 임원회가 탄탄해졌습니다. 결국 체육대회를 준비하기
위한 임원회의를 하면서 각 기수별 임원진이 확고히 구성되었습니다.
임원회의에서는 체육대회를 준비하면서 자연스럽게 모교를 위한 지원문제 등도 논하게 된 것입니다.
1980년대 중반엔 재경의 23회 김흥기(前 산업은행총재)선배님을 모교총동문회의 회장으로 취임하시어
다년간 모교 총동문회를 이끌기도 하시면서 고향 본가인 총동문회의 어려운점도 잘 아시게 되었지요.
우리 재경동문회에서는 홍순길(재경 제6대회장, 7년 연임) 회장님 시절, 모교 축구부 합숙소 지원과
또한 현 동창회 사무실 건물 등의 일부 비용을 재경동문회에서 마련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홍성좌(재경 7대회장)회장님과 권오식(재경 8대회장) 회장님 시절에도 모교출신중에 대학에
진학하는 우수 학생을 선발하여 장학금을 꾸준히 지원하셨으며, 모교의 학습기자재 지원을 비롯하여
재학생들의 기능대회 출전비용까지도 지원하는 등 노력을 다해 왔습니다.
이 모든 것은 재경동문회가 재경종합체육대회를 치루면서 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의견을 수렴하여
시행해 온 것임을 밝히는 바입니다.
재경 동문들은 비록 서울에서 단칸방에 월세와 전세를 살아도 각자 十匙一飯 주머니를 털었습니다.
잘 아시듯 “서울에 사는 동문들은 다 잘사는 동문들이 절대로 아닙니다.”
고향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먹을 것을 찾고자 생존을 위해 上京한 동문들도 수없이 많습니다.
타향에서의 치열한 경쟁과 또한 오염된 환경으로 인하여 병(病)을 얻어 낙향하시는 많은 동문들도
계셨으니깐요.
어떻든 재경동문회는 화려한 전력 그리고 막강한 파워를 지니신 제2세대 선배님들의 활발한 활동으로
인하여 부흥기를 맞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기를 재경강릉농공고동문회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재경동문회를 이해하시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 주절 주절 너무 떠들었군요.
내용이 길어서 이만 줄입니다.
제4편에서는 제3세대로 불리는 아들세대의 활동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글쓴이 : 재경 44회 李 相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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