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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꽃은 밤안개에 젖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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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요거사 작성일 2008-09-09 13:55 댓글 0건 조회 1,39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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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아름다운 이유는
봄 여름 겨울보다 더 많은 생각이 스며 있기 때문입니다.
아득한 하늘은 깊히를 짐작할수 없어 아무리 보고 또 봐도 내사랑 '순희'를 닮았습니다.
나는 압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유와 두볼이 붉게 물드는 까닭은 수많은 언어가 응축되어 가을 하늘
처럼 깊히 깊히 갈아앉아 있기 때문임을...

꽃이 할 일은 그곳이 어디이던 요염을 불태워 아름다운 꽃잎을 피우는 일이고
잎이 할 일은 그곳이 어디이던 정염을 불태워 아름다운 단청을 물들이는 일입니다.
이름 모를 풀 이름모를 꽃도 가을이 되면 가슴을 안으로 오그립니다.
가을은 그렇게 우리 순희처럼 깊이를 알수 없게 내곁에 있습니다.
'산허리에 온통 피어있는 메밀꽃 밭'의 사연도 함께 안고 말입니다.

효석(孝石)은 왜 '동이'를 왼손잡이로 그렸을까?
흐드러지게 피어난 메밀꽃 그 속에서 맺은 허생원과 성처녀의 하룻밤 사랑을 두고두고
잊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일까?
깨알같이 잘디 잔 풋사랑의 조각들을 메밀꽃의 한바탕 춤사위로 모아놓아 인연의 모질긴
끈자락을 먼 훗날까지 우리더러 잡아주기를 바랐던 걸까?

흥겹던 잔치가 끝난 자리에는 밤이슬이 촉촉히 내려 앉았습니다.
격의없고 화목한 형과 아우들이 하나 둘 자리를 떠나갔지만 그들이 앉았던 그 자리에는
아직도 따뜻한 온기가 그대로 있습니다.
조금씩 희뿌였던 밤안개가 자정을 넘어서자 온통 하이얀 백색으로 내려앉았습니다.
어디가 메밀꽃밭인지 어디가 안개무린지 사방천지는 보드라운 솜사탕 그냥 그대로입니다.
마치 ㅡ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려 놓은듯ㅡ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밤하늘에 위태로이 걸린 초승달이 잔잔한 미소로 그를 내려다 봅니다.
어디선가 안개를 가르고 다듬이 소리가 들려 올듯합니다.

「이슬내려 하늘 높고 물맑은 가을
빈산에 홀로 잠못드는 나그네
외로운 돛단배에서 등불이 흘러 나오고
다듬이 소리에 달은 더 높히 떠
편지없는 북쪽 기러기만 날아오네
처마밑 지팡이에 기대어 별을 보니
고향하늘 멀리 은하수만 반짝이는구나」 (杜甫/야(夜)

37212444_750x750_thumb.jpg.

풀벌레 소리를 듣고 외로움을 느낄때 사랑을 생각합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고 인연의 덧없음을 느낍니다.
무거운 봇짐을 지고 장터를 떠돌던 한창때의 허생원도 세월의 무상함은 비킬수 없었습니다.
메밀밭 가득한 흥정천 개울가에서 그녀를 만났고
물레방아간에서 애릿한 하룻밤 풋사랑을 맺을때의 그는 어느덧 살아지고
한잔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동이의 부축을 받는 모습을 통하여
효석은 사랑의 외로움과 인연의 덧없음을 함께 말했습니다.

어느새 희어진 머리칼이 얼굴을 뒤덮고 홍안은 간데없이 온통 주름 투성인 동문들의
모습에서 성처녀와 하룻밤 인연을 맺던 물레방아를 물끄럼히 바라보고 서 있는 허생원의
실루엣을 봤습니다.
취중에도 동이가 자기와 같은 왼손잡이임을 재빨리 알아차리고도 헛기침만 커엉 하는
안쓰러운 모습도 봤습니다.
성처녀가 세운 주막집에 들러서 말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연신 술잔만 거푸 기울리는
꾸부정한 모습도 봤습니다.

흐르는 세월 붙잡는다고 아니 가련만은 부질없는 그 욕심이 오늘따라 너무 야속해
목젖 깊숙히 꺼억 하고 설음이 치밉니다.
저 가을이 푸른 멍울을 남기고 떠나갈 즈음
호주머니 깊숙히 두손을 찔러넣은 어느 사내는 이젠 검은 메밀알도 떨어져 앙상한
대궁만 남은 메밀밭을 돌아 외투깃 속에 얼굴을 감추고 떠나갈 것입니다.
외로움은 외로움대로
그리움은 그리움대로 남기고 떠나갈 것입니다.
그래도 이것 하나만은 기억 할테지요.
허생원이 예전과 다름없는 흐드러진 메밀꽃을 바라보며 성처녀와의 인연을 되뇌인 말ㅡ

"생각하면 무섭고도 기막힌 밤이였어..."







ㅡ그렀습니다.
멋지고 기막힌 밤이였습니다.
술한잔 마시지 않았어도 취기는 몽롱해서 웃고 떠들고 춤추는 동문들의 아름다운
모습이 한폭의 몽유도원도 그대로였습니다.
수고하신 gnng 여러분들께 고개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37기 심 대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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