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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엽지추(一葉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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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요거사 작성일 2008-10-29 11:34 댓글 0건 조회 91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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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염(殘炎)을 밟고 계절을 추스리더니 차가운 이슬이 어느새 멍들은 나뭇잎을 하나 둘
적신다. 진홍.농황.자주.염갈...10월은 그렇게 자연의 은밀한 동경을 부추긴다.
그어진 경계를 지나면 아무리 몸부림 쳐도 달라질수 밖에 없나 보다

영화사(永華寺) 좁은길을 지나니 길섶 군대군데 시름놓은 낙엽이 낯설은 나그네를 반겨
준다. 가파른 길 양편에는 천자만홍(千姿萬虹)을 앞에 둔 단풍군락이 설익은 무늬를 자랑
하며 어쭙자니 화사하다.
저 한폭의 수채화를 비껴서서 나즉히 조명하는 북편 산하ㅡ
멀리 도시 외곽을 성벽으로 두른듯한 아기자기한 녹색 산세가 백두대간에서 갈라나와 광주
산맥의 끝을 이룬다. 몽환(夢幻)같은 전율이 머리에서 발끝으로 전이된다.
「더위에 밀려온 곱고 한가로운 황혼 그 끝자락에 그리움을 걸쳐놓고
저만큼 물러서 나를 지켜보는 당신의 시선을 느낍니다... 」

왜 무망(無望)하지?
영원한 미제(迷題)가 될지 모를 답 없는 침묵을 묶어둔채 휘적휘적 산정을 향한다.
푸드득 하고 산새 한마리가 길손의 상념을 무자비하게 깨운다.
이 가을 따라 떠나는 철새인듯 날개짓의 각박한 여백에서 어딘가의 나를 찾는다.
그러나 나는 혼자인 것을 금새 알아 버린다.
「옷에 달린 레이스장식을 떼듯이 생활과 마음에서 불필요한 것을 떼어 버리는 정리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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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누구시오?"
"지나가는 과객이 올시다"
"지나가는 과객이 시름하나 덜고 가시오"
천년인가 만년인가 이끼덮힌 바위에는 세월의 모진 풍상이 거울 처럼 반들거리고
250여년 긴 세월을 산성을 지키던 병사들이 두고 온 연인을 그려 죽은 혼인가 백설같은
구절초(九折草)가 너울너울 손짓 한다.
언듯 보아 보이지 않는 요조함은 그래서 애처럽고, 긴가 민가 스며드는 그윽함은 그래서
청순한데 낙락장송 벗삼는 고절함에 절개 또한 그래서 곧고 슬프다.
「꿈을 잃고 숨져간 어느 소녀의 넋이 다시 피어난 것일까
흙냄새 풍겨오는 외로운 들길에 웃음잃고 홀로 섰는 희디 흰빛 꽃 」

잎새를 흔들고 가는 바람소리가 귓전에 웅웅거리고 내가 밟은 풀포기의 비명이 늙은 가슴
을 헤집는다.
오래전 잊어버린 첫사랑의 그림자가 불현듯 덮쳐올때, 그리하여 미쳐 보지못한 내 삶의
잔영들이 토막토막 이어져 억장을 후벼올때, 산정을 오르는 가파른 숨결보다 더 혼절한
본성이 내 영혼속으로 되돌아 와 나를 깨운다.
여름이 타고 남은것.
가을은 그래서 초혼(招魂)이며 방황이다.
동풍은 어디로 밀려나 있는가?
무참히 조각이 난 내 영혼의 간극으로 네가 비집고 들어 왔을때 모든것이 아낌없이 열리
고 불타 오르리니 길섶 구렁에 무심히 나딩굴어 진 잎사귀 하나를 보고도 이것이「가을」
임을 쉬이 알련데....
"괜찮은가? 나는 이대로 괜찮은 건가?"
나뭇잎을 보고 가을을 안다면 육십평생을 동행해 온 나를 보고 나는 얼마나 '나'를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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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六祖) 혜능선사가 입적할때 제자들이 물었다.
"스님 여여(如如)하십니까?"
불가에서는 살아서 든 자리에 죽어서도 든다고 본다.
그래서 '여여함'의 한쪽 '여'는 삶에, 또 다른 '여'는 죽음에 걸치고 있다.
그 사이에 간격이 있느냐 없느냐가 성불(成佛)의 관점이다.
'여'와 '여'간극을 뛰어넘는 깨달음 ㅡ그것이「本來面目」,곧「진리의 자리」인 것이다.
나는 과연 얼마만한 간극속에 서 있는걸까.

침묵해야 할 곳에서 침묵으로 반겨주는 길동무는 영혼을 씻겨준다.
오욕의 궤적을 헐고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은빛꽃은 무한에서 유한으로 이끌어 주는 법열
(法悅)이다.
아름답다.
금새라도 훨훨 날아 오를것 같은 함박눈 같이 이따금씩 깃털 하나가 바시시 무너져 내린다.
굵고 가늘게 세고 부드롭게...갈대의 춤사위는 무게잃은 흰 고물로 쌓이고 쌓여 허(虛)와
무(無)의 환타지를 연출한다.
"저기가 온달(溫達)장군이 백재군을 섬멸했던 보루성터 라우. 바로 그 옆이 약수터와 공기
돌 바위가 있던 자리였지"
얼핏 보아서는 사람인지 갈대꽃인지 분간 할수 없었는데 조그마한 배낭을 어께에 걸친 하얀
노인 등산객 한분이 갈대무리 옆 빈터에 앉아서 목을 추기고 있었다.
"계절이 벌써 이렇게 변했지.엊그제 까지만 해도 푸름 일색이였는데..."
들고 있던 물병을 내게 건네주며 그는 묻지도 않는 말을 듬성듬성 잇는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어. 잠시 다니러 온게지...좀봐..저게 조금만 있으면 흔적도 없이 날
아가 버릴테니까...작년엔 그래도 나 혼자는 아니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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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슨한 오후의 햇살이 이제 막 오색으로 물드는 떡갈나무 잎새를 비비고 틔어 오른다.
산모퉁이를 돌다 말고 한폭의 산수화 깨끗한 품안에 영혼을 씻어내고 싶었는데 갑자기
뚝뚝 떨어지는 가랑잎의 선율에 감금된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던 노인의 독백이 그 선율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핑그르르 잎사귀
에 감돌아 가을의 매마름을 들려준다.

빛나는 태양과 푸른 하늘을 잃고도 절망하지 않는 걸음으로 숲을 지나 다시 오던길로 들어
선다. 석양의 그늘이 바삐 쫓아오고 영화사의 저녁 예불소리가 나그네의 걸음을 재촉한다.
어느새 하루의 끝자락인가.
「이슬 내려 하늘 높고 물맑은 가을
빈산에 홀로 잠못드는 나그네...」

혼자 마시는 술은 그래서 쓸쓸하다.
아니, 부어놓고 마시지 못하는 술은 독(毒)같이 추악하다.
왁자지껄 정담을 나누던 옆자리의 등산객 하나이 그런 내가 측은했는지 독백처럼 말을
건넌다.
"가을은 분명 맞지요? 나뭇잎을 보면...."
내 대답도 독백처럼 이어진다.
"그렀네요. 나뭇잎을 보면..."

「어느 후미진 골목 선술집에서 단풍곱게 물든 어느해 가을 산기슭에 흘렸던 장미의
눈물을 기억하며 마음의 지도를 꺼내놓고 추억을 더듬어 가지만 갸냘픈 신음소리만
귓가에 맴돌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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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속의 글은 인용문임을 밝혀둡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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