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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최용근 교장 선생님 동상 건립 회고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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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24회 김연식 작성일 2009-09-24 15:58 댓글 0건 조회 1,18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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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故 최용근교장 선생님 동상건립 추진위원회애서 회고담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준비
했던 내용이며 지난 9월18일 강릉 입암동 하나웨딩 홀에서 있은 결성대회에 참석해서 회고담으로
발표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담은 내용은 제24회 졸업생과 제 개인의 입장에서 본 회고담 이지만
  특히 당시의 모교와 최교장 선생님을 잘 모르시는 다수의 강농 후배님들의 이해를 돕고저 모교
홈패이지 계시판에 올립니다. 적극적인 이해와 참여 있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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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강농 졸업생 모두가 존경해 마지않는,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조익현은사님, 조순은사님, 최용한은사님, 존경하는 권오식 준비위원장님을 비롯한 선배님, 그리고 친애하는 후배 여러분!

저에게 최용근 교장 선생님의 회고담을 말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1947년부터 51년까지 5년간을 강농 24회로 재학했으며 42년이 지난 1993년 2월에서야 명예 제1호로 발행된 졸업장을 받은 김연식입니다.

강농고 5학년을 수료하고 일찍이 모교와 고향을 떠났기에 졸업할 때까지의 당시의 학교 분위기도 잘 모르고 해서 회고담을 사양하려 했으나 한편 생각하면 저 나름대로 평소에 갖고 있던 모교에 대한 애교심과 은사님들에서 받은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늘 간직하고 있었기에 부족함이 있더라도 2만여 동문 여러분과 특히 후배들에게 우리가 재학했던 당시의 자랑스런 모교상을 말해주고 최용근 교장 선생님의 동상건립을 왜 지금 해야하는지를 말씀드리기로 했습니다.

앞서 두분 선배님께서 말씀하신 추모에 관한 충분한 회고담을 들었고 유인물을 통해 최교장 선생님의 학력, 이력, 그리고 모교와 우리 사회를 위해 남기신 업적에 대해서도 행장기를 통해서 모두 보셨습니다.

가능한 중복을 피하고자 합니다만 그래도 각자의 입장과 보는 시각에 따른 생각이 있기 때문에, 제가 말하고자 하는 순서는 먼저 저의 24회 졸업생이 본 선생님에 대한 추모의 회고담을 5가지로 요약 정리하고 선생님의 제자 사랑에 대한 저의 동기들이 말하는 사례들을 간단히 말씀드리고 이어서 저 개인의 입장에서 모교와 최교장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제자 사랑과 은혜에 대해 기억나는 몇가지 사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저의 24회 졸업생이 보는 최용근 교장선생님의 회고담입니다.

첫째, 선생님은 온몸과 온열정을 다 받쳐 강농 발전의 기틀을 잡아 주셨고 독특한 우리 강농만이 갖고 있는 교풍과 전통을 확립해주신 분으로서 공립학교이면서도 단순히 지나가는 교장직이 아닌 강농교의 창업자적인 품격을 느끼게 해주는 족적과 image를 남겨주셨습니다.

둘째, 당시에 비록 시골의 농업학교이지만 전국에 있는 인문계를 포함한 모든 고등학교와 비교해서 전혀 손색이 없는 농학뿐만 아니라 인문사회과목을 담당하시는 우수한 교사진을 확보해서 인재육성의 기반을 세우시고 면학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크게 공헌하셨고 스스로도 선생님의 학력, 이력에서 보듯이 두뇌 우수하고 대학교수를 지내신 매우 학구적이신 분이셨습니다.

이러한 강농의 학풍이 당시의 강원도 일대와 영동지역에서 제일가는 고등학교로 정평이 났었기에 우수한 인재들이 각지에서 모여들었고 열성적이고 엄격했던 은사님들의 교육을 받고 배출된 당시의 졸업생들은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특히 강원도와 영동지역의 곳곳에 배출되어 자리함으로서 국가와 지역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한 강농 졸업생들의 전성시대를 구가했다고 봅니다.

셋째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축구, 야구등 체육분야에도 역점을 두셔서 젊은이들의 체력연마와 불굴의 투지, 용맹성 그리고 젊은이들의 패기와 기상을 높여 주셨고 전국 고교 축구대회에서 3연패의 위업을 달성함으로서 축구명문고로 자리매김 했기에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강농고 출신이라고 하면 축구 명문고로 알아주고 있습니다.

넷째, 8.15해방을 맞아 혼란기에 좌익분자들의 학교 난입을 막기위해 선생님은 재학생들에게 일본이 무기고에 남기고 간 9.9식 소총을 꺼내 나누어 무장시키고 주야간 학교 주변에 배치해서 좌익분자들의 침입을 막아 학교 안전을 도모했습니다. 6.25전쟁 중에는 작고하신 서병소 은사님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학교에 남아 인민군 치하에서도 우리 국군이 수복 할 때까지 학교를 온전하게 지켜 내셨습니다.

 이렇듯 최교장 선생님은 8.15의 혼란기와 6.25전쟁의 폐허속에서 당시의 은사님들과 재학생이 일체가 되어 학교를 지키고 재건하는데 이바지 하셨습니다.

다섯째, 선생님은 훌륭한 교육의 선각자였을 뿐만 아니라 그후에는 제 3,4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 되셔서 정계에 진출한 후 국회재정분과 위원장 및 예산결산위원장을 맡아 하시면서 여당은 물론이고 야당으로 부터도 존경받는 의정 활동을 함으로서 우리 모교의 6회 졸업생으로서 또 강농교장을 역임하신분으로서 모교의 명예를 드높이신 분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상이 24회 졸업생이 보는 선생님에 대한 추모와 회고담의 5가지 요점입니다.

다음은 저의 24회 동기생들이 말하는 선생님의 제자 사랑에 대한 사례들입니다. 어쩌다 선생님을 만나게되어 인사를 하면 꼭 기억하신 이름을 부르고 부모님의 안부를 물으시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으면 꼭 이름을 물어보십니다. 그래서인지 교장선생님 방에 가보면 벽면에다 당시에는 학생수가 많지않아 전교생의 명단을 학년별로 붙혀두고 수시로 들여다보며 외우고 계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느날 교내 으슥한 곳에서 24회 동급생들끼리 모여 담배를 한참 피우고 있는데 교장 선생님이 우연히 지나시다가 현장을 목격하시고도 못본척 하시면서 지나가셨는데 나중에 담임선생님께 불려가서 꾸중을 들은적도 있었습니다.

한 동기생이 휴학중 군징집영장이 나왔는데 교장선생님을 찾아갔더니 복학 서류를 해주셔서 징집을 면하게되었고 복학해서 다시 학업을 마칠수 있었습니다.

당시 졸업생 가운데는 선생님의 추천과 은덕으로 사회진출과 취직에 도움을 받은 제자가 많이 있다는 등등입니다.

이제부터 저의 입장에서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강농고 모교를 생각하면 선뜻 크게 두가지가 떠오릅니다.

그 하나는 강농인의 정신과 기질, 또 다른 하나는 교가와 응원가입니다.

우선 강농인의 정신과 기질을 정리해보면

첫째, 우직하고 유순, 정직, 성실한 농자적 기질로 모교 교훈이 뜻하는 정직, 근면, 겸손의 인간근본의 미덕을 지니고 있다.
둘째, 애교심과 단결, 협동력이 강하다.

셋째, 선후배간의 끈끈한 정과 의리가 강하고 불의를 용납 하지않는 군자적인 정신과 인간미를 지니고 있다.

이와같은 강농인의 정신과 기질은 최교장 선생님 재직 당시에 교장 선생님을 중심으로 은사님들의 창학정신과 제자사랑에다 당시에 배출된 선배 졸업생들의 애교심이 잘 아울러져서 형성된 독특한 강농인의 기질과 교풍이 전통으로 자리잡아 오늘의 모교와 후배들에게 계승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교가와 응원가입니다.
 강농고 행사와 모든 모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모교의 교가와 응원가는 언제 불러도 강농을 상징하는 명가사, 명곡으로서 부를때마다 웅장함을 느끼게하며 승리를 쟁취하려는 용기와 힘을 용솟음치게하고 우리 졸업생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해줍니다.

이어서 제가 최교장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제자사랑과 은혜에 대해 기억나는 몇가지 사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하나는 50년 6.25전쟁이 나던 해 강농고 1학년이던 저는, 그해 피난 다니느라 놀았고, 9.28수복 후에서부터 51년 2학년말까지 공부하고 고교2년 수료자 자격으로  51년 9월경에 해군사관학교 모집에 응시했을때 국, 영, 수 세과목을 치는 입학시험에서 모교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NOTE만으로 공부한 제가 한참 전쟁중이었기 때문에 갈곳을 찾지못한 전국고교졸업생을 위시한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20대 1이 넘는 치열한 경쟁률을 보였던 입학시험에 합격했으며, 당시 영동지역에서는 6년 졸업자를 위시하여 약 5~60명이 응시했는데 모두 떨어지고 강릉에서는 5년 수료자인 저만 합격했습니다.
이는 당시 모교 은사님들의 가르치심이 얼마나 뛰어났었는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합격통지를 받고 학교를 떠날 때 교장선생님께 작별 인사를 갔는데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옮기면 “해군사관학교가 빳다가 심하다고 하는데 때리면 그만두고 학교로 돌아오라.”라고 하는 격려가 아닌 뜻밖의 말씀을 듣고 “아~선생님은 고교 3학년을 제대로 마치고 명문대학교에 진학해서 학문의 길을 닦기 바라시는구나” 여쭈어보지는 못했지만 저는 그렇게 짐작했습니다.

그러나 4년이 지난 56년 겨울방학때 찾아뵙고 해군소위 임관과 이학사 학위를 받는 졸업식이 4월10일에 있다고 말씀드리니 당시 국회의원이셨는데 졸업식에 참석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실제는 행사초청 대상인 국방위원이 아니셨기 때문에 오시지는 못했지만 졸업하는 저를 말씀으로라도 축하와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또 한사례는 교장선생님과 사모님에 대한 것입니다. 제가 생도시절 휴가나 상경행사로 외출을 나가면 그때는 국회의원에 당선되시어 신설동 언덕쪽 2층집에 살고 계셨는데 선생님 댁을 찾아가 며칠이고 유숙했습니다. 오래 살다보면 부부가 닮는다는데 어쩌면 선생님과 사모님은 그 후덕한 성품이며 체격이나 외모까지도 많이 닮으셨습니다.

사모님께서는 사관생도 정복을 하고 꼿꼿한 자세로 찾아온 제자를 언제나 따뜻하게 맞아주셨고 2층에서 자곤했는데 가끔은 아침밥 먹으러 내려오라고 해서 가면 출근하시는 선생님과 딱 둘만의 겸상을 차려 주셔서 몇번 식사를 같이 한 온정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어느땐가 상경시 들렀는데 국회 방청권을 주시면서 사모님과 같이 와서 방청해보라고 하시기에 당시 서울 시청옆에 있던 국회 의사당에 사모님 모시고 가서 처음으로 국회의사 진행을 방청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와서 그때일을 되돌아보면 최용근 교장선생님과 사모님의 후덕한 인품과 제자사랑이 얼마나 큰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제 회고담을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존경하는 선배님 그리고 후배 여러분!

올해로 81주년을 맞이하는 모교의 자랑스런 역사와 2만여명에 달하는 졸업생을 배출한 우리 모교에 앞서 회고담에서 들은바와 같은 지대한 공헌을 하신 최용근 교장 선생님의 동상을 건립한다는 것은 강농고에 있어서 역사적인일로 그 상징적인 의미가 매우 크며 동상이 건립되어 제모습을 드러내면 모교의 교정에 되돌아오신 최교장 선생님이 교정 정면에 우뚝 서시어 모교를 지켜주시고 모교의 무궁한 미래를 밝혀주실 것입니다.

동상건립 기금은 몇사람이 고액을 내는것도 바람직하지만 2만여 동문 선후배들이 소액일지라도 십시일반의 정신으로 많이 참여해서 모든 동문의 정성을 한데 모아 반듯하게 세워져야 진정한 추모의 뜻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이번 동상건립 추진 사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서 역시 명문고 강농인의 애교심과 응집력은 대단하구나 하는 평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감사합니다.


                                                    2009.  9.  18.

                                              강농고 24회 김 연 식
                                              예 비 역 해 군 준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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