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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최용근(崔容根)교장 행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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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추진위원회 작성일 2009-09-23 23:38 댓글 0건 조회 1,10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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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최용근(崔容根)교장 행장기
 
 선생께서는 1919년 11월 9일 강원도 강릉시 두산동 348번지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강릉이고 아호는 인제(忍薺)이다.

- 중요 약력 -

 1936년 3월  강릉공립농업학교 제3학년 졸업(제6회)
 1938년 3월  춘천공립농업학교 농림학과 제5학년 졸업
 1941년 12월  일본 모리오카(盛岡) 고등농림학교
                  [현 국립 이와데(岩手)대학]임학과 졸업(수석)
 1942년 2월  강릉공립농업학교 교사
 1947년 3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임학과 전임강사
 1948년 4월  강릉농업중학교장(제6대)
 1950년 9월  춘천농과대학 부교수 및 강릉분교 주임교수(겸직)
 1950년 9월  강릉중학교장(겸직)
 1951년 8욀  강릉농업고등학교장
 1954년 5월  대한민국 제3대 국회(민의원)의원 당선(강릉갑구)
 1957년 9월  대한민국 제3대 국회 재정경제분과위원장 피선
 1958년 5월  대한민국 제4대 국회(민의원)의원 당선(강릉시)
 1958년 6월  대한민국 제4대 국회 재정경제분과위원장 피선
 1958년11월  대한민국 제4대 국회 예산결산분과위원장 피선
 1961년 9월  동국대학교 농과대학 임학과 강사
 1964~1972년 정치활동 재개를 위한 지역구 활동

  - 중요 업적 -

∘ 1942년 3월 모교의 교사로 처음 사도의 길에 들어선 선생께서는  항일 불순사상을 학생들에께 전달한다는 협의로 일본 고등계 형사의 미행을 받았으며 나가무라 교무과장과 도도가와 교장으로부터 수차례 경고를 받았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선생께서는 학생들에께 조국없는 민족의 서러움을 전달하고 학생들 과는 우리말로 대화한 것이  알려저 많은 고초를 받았다.

∘ 선생께서는 부임과 동시에 모교는 옥천교사(현 강릉여고)에서 입암동으로 이전이 시작되었던 때다. 현재 모교의 상징 수목인 히마라야삼나무는 12회 졸업생들이 임학과 교사였던 선생의 지도하에 이식한 것이다. 또한 입암동 교사는 북향으로 건축되어 정원 조성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선생께서는 각종 참고문헌과 일본 다이묘 정원등의 설계를 참고하여 정원을 심혈을 기울여 직접 설계하였다.

∘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좌우로 갈라진 이념분쟁은 학원까지 침투되어 어지럽고 혼란한 시기였다. 선생께서는 모든 학생을 강당에 합숙시키면서 불순분자의 교내난입을 막게하는 등 투철한 시대관과 열정으로  학원을 진정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 교내에 있는 수령 60년이상 된 정원수의 대부분은 당시 재학생들이 선생의 지도하에 식재 한 것이다.
옃날 모교 강단 뒤편에 조성된 수목원의 휘귀수목인 고야마기, 섬잣나무, 수양벗나무, 가이스카 향나무, 옥향등은 선생께서 일본에서 구입하여 정원 조성에 사용하였다.

∘ 선생께서는 선배와 지인을 찿아 다니면서 많은 수목을 기증 받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옛정문의 가로수인 자작나무(시라간바)는 대관령에 거주하는 지인으로 부터 기증 받았으며, 선생께서는 항상 마음속에 국내외의 유명한 학교는 자작나무가 많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직접 식목하였다.

∘ 당시의 선배들은 교내 수목의 대부분은 선생의 손길이 거쳐 간것이며, 선생의 열과 성의의 증표라고 회고한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당시를 기억하는 선배 및 증인들이 타계하시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 1947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임학과 전임강사로 1년간 후진 양성에 이바지하였다.

∘ 1948년 4월 약관 29세에 모교 제6대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선생께서는 첫째, 민주주의적인 세계관의 확립. 둘째, 민족국가를 지향하는  자유주의 교육의 실현. 셋째, 개성을 존중하는 자기창조의 수련을 학교경영의 3대 방침으로 정하여 학교의 성장과 발전을 위한 초석을 마련하였다.

∘ 1948년7월1일부터 3일간 성대한 개교 2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다. 중요행사로는 1,000여점의 농산물 품평회 및 과학기기 제작 전람회,  전교생이 참여하는 체육대회, 강릉극장에서 합창부 및 밴드공연, 시가지 가장행열, 교지「영동」의 발간등이 였으며, 그중 일부는 최근까지  그 맥이 이어 오고 있다.

∘ 6.25의 전화로 폐허화 된 모교를 재건하는데 교직원과 학생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학교를 정상화 하는데, 교장으로서 탁월한 리더쉽을 발휘하였다. 특히 6.25의 전화로 학교 내의 귀중한 정원수는 막대한  수난을 당하였다. 특히 9.28수복으로 군인들이 모교의 정원수를 군막사 미화용으로 가져갔다. 선생께서는 각처로 다니면서 정원수를 회수하였고, 강릉 비행장등으로부터 어렵게 반환을 받았지만 많은 고사목이  발생하여 선생께서는 안타까워 하였다. 

∘ 6.25 전후의 열악한 교육 여건에서도  교장으로서 학력제고를 위한 우수교사확보에 동분서주하여 기라성 같은 선생님들을 영입하였다.  당시 모교에 봉직한 교사중에서 후에 교육감 등 교육계의 수장, 대학교수등으로 진출하신 분이 15여명에 달하였다.

∘ 교사들의 후생 복지를 위해 옥천관사와 성덕관사 두곳을 확보하여 교사들의 주거문제를 해결 하였는데 이는 당시 전국에서 유일한 일이였다.
∘ 우수교사 확보와 함께 학생들에게 주말, 월말, 기말고사를 엄격하게 실시하여 학생들의 학력제고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실업학교로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졸업생들의 명문대 합격자가 한해 수십명에 이르렀다.

∘ 실업교육의 진흥과  저변 확대에도 진력하였다. 농장에는 파슬리, 셀러리등의 신품종 야채를 파종하여 새품종 보급에 앞장섰다. 또한  수림원 조성과 연습림 육성에도 힘쓰고, 교내에 제재소를 설치하여  산학 연계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트럭 2대를 구입하여 운송수입으로 학교재정에 기여하였으며 축구 선수등의 이동수단으로 이용하였다.
 
∘  1949년 미국의 교육원조의 일환으로 우리나라에 기증된 3대의 자동 부란기중 1대가 모교로 배정되었는대, 이는 선생의 활약의 결과였다. 최신식 자동 부란기의 설치로 양계 교육에 일대 전기를 마련하였고, 또한 홀스타인 젖소를 구입하여 낙농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양봉 교육도 하여 양봉농의 저변 확대에도 이바지 하였다.

∘체육 진흥책으로 학생 1인 1기 체육교육을 실시하였다. 특히 축구부 활동을 강화하여 재임 기간동안 전국체전등 전국 규모의 축구대회에서 3년패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그리하여 모교의 대외적인 홍보는 물론 학생들에게 단결력과 일체감, 모교 사랑과 긍지를 심어주는데 일조를 하였고 오늘날 강농 축구의  명성은 그때부터 맥락을 이어 왔다고 할 수 있다.
 
∘ 춘천농과대학 분교와 부설 중등교원 양성소를 강릉에 유치하여 우리 고장의 교육인력양성에 크게 기여 하였으며, 재임시 제자중에는 중등  교장만도 30여명이 넘는다.

∘ 교장 재임시의 탁월한 식견과 능력이 인정되어 정계 입문의 적극적 권유에 의해 1954년 5월 강릉 갑구에서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 되었다.
초선의원으로 2년이 안되는 기간에 재경경제분과위원장에 피선되었으며, 농업협동조합법중 개정 법률안등 7개의 법률안을 발의하였고, 강릉시 승격안도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으니 선생의 폭넓은 의정활동은 크게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 1958년 5월 강릉시에서 제4대 국회의원으로 재선되어 재정경제분과 위원장, 예산결산분과 위원장으로 각각 피선되었으며, 한국조폐공사법중 개정 법률안, 한해대책에 관한 건의안등 12개의 법률안을 발의하는등 국리민복을 위해 그의능력과 수완을 십분 발휘하였다.

∘ 4.19 혁명후 약 1년반에 걸쳐 동국대학교 임학과 강사로 산림경제학, 임업기업형태론등을 강의하였는데, 학생들에게 매우 인기있는 강의로 전해졌다.

∘ 교육을 통한 후진양성과 정치를 통한 국민 복지 향상에 주력 하시던 선생께서는 정치활동 재개를 위하여 지역구 정비차 강릉에서 동분  서주 하시던 중 1973년 1월 29일 갑자기 54세를 일기로 타계하셨다.

∘ 강농 60년사에서 시인 황금찬 선생은 권두시(재목:나라의 등불)에서 최교장선생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생략)
                영롱한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
                저 재난이 지나간 뒤
                폐허처럼 변한 학교를
                영원한 사랑의 씨를 심듯
                정성으르 가꾸어 내던 최용근교장
                바람 앞에 나뭇잎같이 민첩했던
                지혜의 별들
                그리고 한 뜻으로 하루같던
                스승님, 스승님들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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