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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蘭雪軒은 臨瀛(江陵) 草堂里에서 高麗末 宰相이었던 文靖公 許拱의 血統을 받아 朝鮮 宣祖 때 名望이 높았던 草堂公 許曄을 아버지로, 禮曹參判을 歷任한 愛日堂 金光轍의 따님인 어머니 江陵金氏사이에서 태어났다. 許曄은 死別한 韓氏夫人과의 사이에 두 딸과 아들 筬을 두었고 再婚한 金氏夫人과의 사이에는 篈, 許蘭雪軒, 許筠의 2男 1女를 두었다.
許蘭雪軒보다 15歲 위였던 큰오빠 許筬은 號가 岳麓으로 吏曹·兵曹判書까지 지냈다. 작은오빠 許篈은 號가 荷谷으로 弘文館 典翰을 지냈고 剛直한 性格으로 임금에게 直言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許篈은 蘭雪軒 21歲 때 栗谷 李珥의 잘못을 彈劾하다가 誣告로 歸養갔다가 3年後 放免되지만 不遇하게 지내다가 술에 依해 몸을 망쳐서 蘭雪軒이 26歲 때 客死했다. 그는 蘭雪軒보다 12歲 위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났지만 蘭雪軒의 才能을 아껴주었다.
그리고 同生 許筠은 蘭雪軒보다 여섯 살 아래로 號는 蛟山이고 刑曹·禮曹判書까지 지냈던 人物로 매우 聰明하고 知識이 막힘이 없었으며 改革意識이 뚜렷했다. 許筠은 封建的 社會制度의 改革을 부르짖은 小說 ‘洪吉童傳’의 作者이며, 後日 革命을 準備하다 逆賊의 陋名을 쓰고 50歲에 處刑當했다. 簡單히 말해서 篈, 蘭雪軒, 筠은 모두 自由奔放한 藝術家的 氣質을 갖고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女性들에게는 글을 가르치지 않았던 時代에 오빠 篈은 許蘭雪軒을 自身의 글벗인 三唐詩人 李達에게 詩를 배우게 해 주었다. 그런 環境속에서 자라면서 許蘭雪軒은 일찍이 남다른 글재주를 보였다. 그녀는 이미 여덟 살이던 해에 ‘廣寒殿白玉樓上樑文’이란 長詩를 써서 많은 이로부터 재주를 認定받았다.
열네 살 된 해 許蘭雪軒은 父母가 定해주는 安東金氏의 男子와 夫婦의 因緣을 맺었다. 媤宅은 5代째 繼續 文科에 及第한 門閥이었으나 그녀의 男便 金誠立은 정작 재주와 學識이 不足한 사람이었다. 그는 科擧工夫를 한다고 했으나 별 成果가 없었고, 게다가 아내와 詩를 주고받으며 즐거움을 나눌 만한 偉人도 못 되었다.
反面에 許蘭雪軒은 平凡한 아내로만 滿足할 수 없는 뛰어난 재주와 氣品을 지닌 女性이었다. 非凡한 아내에 對한 劣等感에서인지, 男便 金誠立은 집에 있는 날보다 妓生과 함께 노는 날이 더 많았다. 工夫하러 간다는 핑계로 날마다 妾의 집에서만 노는 男便에게 許蘭雪軒은 “옛날의 妾은 재주가 있었건만, 오늘의 妾은 재주가 없더라”라는 뜻 깊은 便紙를 써 보내 그를 꾸짖어 보기도 했으나, 男便의 放蕩은 그치지 않았다.
許蘭雪軒의 悲哀는 男便의 難捧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男便으로 向하는 愛情까지 보태어 키웠던 아들과 딸이 다 크지도 못한 채 次例로 죽었고, 그 衝擊으로 셋째 아이도 流産했으며, 平和로웠던 親庭도 獄事에 휘말려 오빠 篈과 同生 筠이 歸養길에 올랐다. 스물세 살이던 해에 許蘭雪軒은 어머니 喪을 當한다. 許蘭雪軒에게 닥친 안팎의 슬픔은 그녀를 더욱 외롭게 했다. 多情多感한 그녀는 오로지 詩로써 고달픈 心情을 가누어야 했다.
春雨暗西池(춘우암서지) 보슬보슬 봄비는 못에 내리고
輕寒襲羅幕(경한습라막) 찬바람이 장막 속 스며들 제
愁依小屛風(수의소병풍) 뜬시름 못내 이겨 병풍 기대니
薔頭杏花落(장두행화락) 송이송이 살구꽃 담 위에 지네.
위 詩에서 오랜 기다림은 絶望이 되어 萬物이 生動하는 봄이건만 기다림에 지친 作者의 마음은 아직도 寒氣가 서리는 겨울이다. 봄비는 연못이 背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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