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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筠은 李爾瞻보다도 더 仁穆大妃 廢母論에 앞장섰는데, 이 때문에 廢母에 反對하는 領議政 奇自獻과 사이가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廢母에 反對한 奇自獻이 歸養에 處해지고 吉州로 流配되자, 그의 아들 奇俊格이 “許筠이 逆謀를 꾸몄다”고 主張하면서 波瀾이 일어난다.
그런 중에 南大門에 “暴惡한 임금을 치러 河南 大將軍인 鄭아무개가 곧 온다…”는 內容의 壁書가 붙는 事件이 發生하는 데 許筠의 心腹 玄應旻이 붙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當時 許筠에 對한 評價는 聰明하고 英發하여 能히 詩를 아는 사람이라 하여 文章과 識見에 對한 稱讚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람됨에 對하여서는 輕薄하다거나 人倫道德을 어지럽히고 異端을 좋아하여 行實을 더럽혔다는 等 否定的 評價를 내리고 있다. 그해 義禁府로 押送된 뒤 鞠問을 받고 漢城府에서 陵遲處斬되었다. 시집간 두 딸은 連坐되지 않았고 그의 아들들은 連坐되어 處刑當한다. 이때 그의 나이 享年 50歲였다.
그에게 陵遲處斬이 執行될 때 無慮 3,000番 以上 살점을 도려낸 뒤 목이 잘려 매우 殘忍하게 죽임을 當했다. 그의 屍身은 收拾되지 못했고 훗날 20世紀初에 이르러 先山 近處에 假墓가 造成되었다.
그의 死後 連坐制가 適用되어 江陵에 있는 아버지 許曄의 墓所도 剖棺斬屍의 對象이 되었다고 한다. 以後 비오는 날이면 許筠의 先塋에는 울부짖는 소리가 나, 어느 선비가 없는 子息으로 생각하라는 內容의 慰靈祭를 지낸 뒤 울음소리가 그쳤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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