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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筠 死後 그의 代가 끊긴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그의 後孫들 중 一部는 派가 다른 他 門中에 養子로 가거나 他人의 後孫인 것처럼 變姓名을 하고 後孫을 이어왔다. 그러다가 1980年代에 許筠의 奇蹟的으로 살아남은 아들 許宏의 直系 子孫들이 家牒을 通해 許筠의 直系 後孫임을 主張하여 오다가, 1995年 陽川許氏 蛟山公派로 숨겨 진 血統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의 作品인 洪吉童傳은 仁祖反正 直前 柳夢寅 等이 自身들의 文集과 書信 等에 洪吉童傳의 著者가 許筠이라는 記錄을 남김으로써 後代에 洪吉童傳의 著者임이 알려지게 되었다. 一部 學者들 사이에서 肅宗 때의 張吉山 內容이 있는 것을 問題 삼아 許筠作品이 아니라고 主張을 하는 사람도 있으나 後世에 加筆된 것으로 보고 있다.
仁祖反正 以後에도 그가 北人과 大北黨員이었던 탓에 復權되지 못하였다. 正祖 때와 高宗 때에도 그에 對한 復權 輿論이 나타났으나 霧散되었고, 그는 大韓帝國이 滅亡할 때까지 復權되지 못한다.
그는 嫡庶差別의 不當함과 腐敗官僚를 糾彈하는 글을 남겨 社會批判的인 意識을 보여주었다. 그는 嫡子와 庶子 모두에게 公平하고 均等한 機會를 附與해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스승 蓀谷 李達이 庶子로서 出世하지 못한 것이 理由라고도 하고, 許筠 自身이 再娶夫人의 所生으로 庶子들과 다를 바 없는 不遇한 處地라서 이에 共感했다는 說도 있다.
許筠은 儒敎집안에서 태어나 儒學을 工夫한 儒家로서 學文의 基本을 儒學에 두고 있으나 當時의 異端으로 指目되던 佛敎, 道敎와 老莊思想들에 對하여 思想的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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