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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은 닳을 수 있어도 이름은 없어지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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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筬(1548年 明宗 3~1612年 光海君4)은 父親 草堂 許曄과 첫째夫人인 韓氏와 사이에서 태어난 長子로 許蘭雪軒의 큰오빠이자 許篈, 許筠의 異腹兄弟로 號는 岳麓이다.
豊臣秀吉이 日本을 統一後 倭의 動態를 살피기 爲해 朝鮮通信使가 決定되었는데, 黃允吉을 正使, 金誠一을 副使, 許筬을 書狀官으로 差出되어 敵情을 살핀 後 이듬해 돌아와 御前會議에서 黃允吉은 그간의 實情과 形勢에 對해 "앞으로 반드시 兵禍가 있을 것이다."라고 日本의 侵略을 豫告하였으나, 副使 金誠一은, "전혀 그러한 兆朕이 없다."고 相反된 報告를 하였다.
豊臣秀吉의 印象을 묻는 質問에도 西人 黃允吉은, "눈에 光彩가 있고 膽略이 남달라 보였다."고 한데 比해 東人 金誠一은 "눈이 쥐와 같고 생김새는 원숭이 같으니 두려울 것이 못 된다."고 다르게 對答하였다. 이때 通信使로 書狀官이었던 許筬은 金誠一과 같은 東人임에도 不拘하고 西人이었던 黃允吉의 主張에 贊成을 한다.
이처럼 金誠一은 黃允吉과 엇갈린 主張을 하여 日本 防備策에 統一을 가져오지 못하였으며, 宣祖는 副使 金誠一의 말만 듣고 外侵에 對한 準備를 疏忽히 하였다. 2年後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宣祖는 黃允吉의 말을 믿지 않았음을 크게 後悔하였다고 한다.
當時 柳成龍이 金誠一에게 戰爭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責任질거냐고 質問을 던지자, “나도 어찌 倭敵이 侵略하지 않을 것이라고 斷定하겠는가. 다만 온 나라가 動搖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 그런 것이다.”라며 免避性 發言을 하였다.
許筬은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自請하여 軍兵募集에 盡力하였다. 最終官職은 正憲大夫 吏曹判書를 거쳐 知中樞府事에 이르렀고, 死後 崇政大夫 議政府 左贊成에 贈職 追敍되었다. 宣祖의 遺敎를 받게 되어서 世人들이 顧命七臣이라 稱했다. 光海君이 生母를 追崇하려고 할 적에 公이 禮經을 證據로 삼아 다투다가 削黜되었는데, 仁祖 때에 贊成에 追贈되었다.
死後 墓地銘을 쓴다. “德은 크고 信條는 높았어라. 돌은 닳을 수 있어도 이름은 없어지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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