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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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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마을 어귀에 어김없이 성황당이 있었다.
어렸을 때를 연상해 보면 그 성황당이 귀신의 소굴처럼 느껴졌다.
지금처럼 가로등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 성황당은 그리 유쾌한 곳은 아니었다고 본다.
거기에다가 곳집(마을의 공동 상여를 보관하던 창고)이라도 근처에 있으면 이 또한 꺼림직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하였다.
비라도 부슬부슬 내리는 심야에 곳집이나 성황당 근처를 가자면 저절로 머리털이 빳빳 치 솟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히 난다.
요즘은 곳집이 거의 사라졌지만 당시에는 가장 중요한 마을의 공동 시설물이었을 것이다.
시대가 변함으로서 없어진 문화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닐까 싶다.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곳집을 이야기하면 알아차리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아니 본 적이 없으니까 모르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성황당은 아직까지 남아 있는 곳이 엄청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신흥종교가 들어오면서도 우리의 전통 신을 모시는 성황당만큼 유지되는 것이 아이러니컬하다.
성황당이 마을의 귀신을 모셔놓은 것인지 아니면 잡귀를 쫒으려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명천지에 그대로 존속된다는 것은 뭔가 거기에도 매력이 있는 부분이 존재하지 않을까 싶다.
구정리 입구에 가면 성황당이 잘 정비되어 있다.
고색창연한 담장에서부터 아담한 성황당 신각(맞는 표현인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주변에 고목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어찌보면 가장 촌스러우면서도 가장 자랑스럽게 내 세울 수 있는 마을의 상징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아니 구정리에 역사를 담고 있는 상징물인지도 모른다.
구정리 성황당에 상징은 물론 신각이겠지만 그보다 주변에 있는 고목들이 아닐까 싶다.
몇 백 년 된 거목의 소나무가 있었다.
이름하여 방구소나무였다.
왜 방구소나무인지는 잘 모르지만 우리는 그렇게 불렀다.
이 방구소나무가 어느 해인가 벼락을 맞아 죽어버렸다.
아까운 유산 하나가 그냥 날아간 셈이다.
그럴 줄 알았으면 나무 꼭대기에 피뢰침이라도 걸어 놓았으면 좋았을 터인데 죽고 나니 아쉽기 그지없다.
그 죽은 그루터기가 아직까지 우람하게 버티고 서 있다.
언젠가는 썩어서 주저앉겠지만 현재까지는 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는 모습에서 불현 듯 옛날 생각이 떠오른다.
방구소나무가 살아 있을 때 모습은 그야말로 품격이 그대로 살아난 모습이었다.
속리산에 정2품종 뺨치게 격이 있는 자태를 자랑했었다.
그렇게 장대하고 아름다웠던 방구소나무가 죽은데 대하여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자연의 섭리에 의하여 명을 달리한 방구소나무의 그루터기를 여러분들께 사진으로 안내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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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남철님의 댓글
김남철 작성일
클럽장님의 방구소나무 이야기를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성황당 이야기를 통해 아이디어 하나를 얻었습니다.
" gnng 게시판에서 각 동네 성황당 고사 실태를 모아보면 좋겠구나."
우리 동네는 반상회 토론 끝에 대폭 약식으로 지내기로 결정했습니다.
나름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설 전후에 설문글을 올릴까 하오니 협조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