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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정답만을 찾는 이상한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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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정답만을 찾는 이상한 나라
정답 찾기에 달인이 된 사람들이 누군지 아시나요? 인구는 많고 선호하는 학교나 직장은 한정되어 있는 나라에서 사람을 선발하는 객관적인 방법으로 가장 좋은 것이 시험이라 인식되어져 왔다고 본다. 모든 것에서 시험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필요한 사람을 뽑는 방법에 우리는 젖어 왔다는 것이다. 여기 봐도 시험, 저기 봐도 시험 오로지 시험을 통하여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나라의 대명사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나라에서 인간대접을 제대로 받고 살기 위해서는 싫던 좋던 시험에 강해져야지만 가능한 일이라 생각된다.
가진 자원이라곤 인간밖에 없는 국가에서 인재의 양성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잘 못살던 시절에서 입에 풀칠을 할 정도까지 경제성장이 되는 과정에서 교육의 역할은 무진장 컸다고 본다. 경제성장 초기에 교육은 산업사회가 필요한 인간을 기계적으로 뽑아내는 치중되었다고 본다. 실제 이렇게 양산된 인재들이 일사분란하게 매사를 헤치고 나가면서 급성장의 발판을 만들어 놓지 않았나 싶다. 많은 인간을 단시간에 교육하는 방법으로 일제식만한 것도 없으리라 보며 그 효과도 놀라울 정도로 대단했다.
한때 좁은 교실에 60~70명씩 넣고 가르쳤다. 꾸역꾸역 몰려드는 학생들로 인하여 초등학교 저학년 같은 경우 하루에 두 번 등교하는 2부제 수업도 등장하게 된다. 지금 학부모들이 자신들의 자녀에 대하여 2부제 수업을 한다면 엄청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지만 당시에는 자연스럽게 통용되었다고 본다. 이렇게 많은 학생을 단시간에 어느 정도의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교육법이 자연스럽게 각광을 받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 많은 학생들이 각계각층의 산업역군으로 보내지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4지선다의 객관식 평가를 한 후 줄 세우기를 통하여 두부모 자르듯 자른 후 적재적소에 배치되게 된다. 선택되어진 산업현장에서 큰 불평불만 없이 묵묵하게 황소처럼 일만 해 왔다. 베이비 붐 시대에 태어났던 사람들의 청장년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다.
그 세대는 이제 이 사회에서 은퇴의 길을 걷고 있다. 오로지 뼈 빠지게 일에만 치중하다보니 정작 자신의 인생을 반추해 볼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뒤돌아보면 남은 것이라곤 나이와 이마에 주름살, 그리고 흰 머리카락과 애물단지의 자식들 밖에 없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열심히만 일하면 된다는 강압된 신념이 세뇌화되면서 그런 식의 인생으로 엮여졌는데 그 결과 열심히 일 한 추억이외에는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인생장사가 속빈강정처럼 실속이 없었다는 반증으로 다가온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교육은 그야말로 단순 그 자체였다. 옷도 교복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면 안 되었다. 머리도 군대식으로 짧게 깎아야 하고 신발도 반드시 운동화를 신고 다녀야 한다. 심지어 신발의 색깔까지도 엄격하게 따졌던 시대도 있었다. 배우는 것도 서울이나 강원도나 제주도나 똑 같은 교과서를 가지고 똑 같은 진도를 빼면서 거의 유사한 방식으로 배웠다. 시험도 거의 획일적이었다. 대학입학을 위한 수능은 전국적으로 동시에 똑 같은 시험문제를 가지고 동일한 조건에서 실력을 겨루어야 했다. 모든 것이 획일화 그 자체였다. 달리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뿐 더러 달리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는 학교의 이단자로 몰려 불량학생 또는 문제 학생으로 낙인찍히기 일쑤였다. 오로지 교과서에 나온 내용을 잘 외우고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잘 따르는 학생이 우수한 학생으로 인정을 받는 시대에 살아왔다. 지금의 기성세대에서는 그것이 당연시 된다고 철석처럼 믿고 있을 것이다.
평가는 어땠는가? 모든 잣대를 국가에서 인정하는 기준에 의해서 그 범주를 벗어나면 안 되었다. 시험은 오로지 교과서에서만 출제가 되어야 한다. 혹 참고서에서 참조할라치면 난리가 날 정도이다. 선생님이 독창적으로 출제를 해도 안 된다. 객관적인 근거는 오로지 교과서를 기준으로 한다는 것이 거의 불문율이나 마찬가지인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평가는 오로지 정답을 찾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고 본다. 4지선다던 5지선다던 간에 정답을 잘 찍는 자가 우수한 성적을 올리고 그런 학생이 우대받는 세상에 살았다고 본다. 초중고등학교 교육과정은 오로지 정답찾기에 달인을 만드는 교육을 받았다고 본다. 청소년시절에 다양한 생각이나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어도 신통치 않은 판에 오로지 정답찾기에만 혈안이 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자연스럽게 경직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고의 방식이 다양화되고 유연화 될 수 있는 교육은 원초적으로 시켜주지도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지구상에 통용되는 교육 중에서 세뇌교육이라고 있다. 되지도 않은 논리를 주구장창 억압적으로 반복학습을 시키면 마치 그것이 정상적인 논리인양 인식되어지는 교육의 한 방법이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 세뇌교육을 받았는지 스스로 생각해 보면 기억이 떠오르리라 본다. 세뇌교육을 받은 기억이 없다고 생각되는 독자들은 그야말로 완벽한 세뇌교육을 받았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교육이 오로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충성하고 분골쇄신해야 한다는 식으로 이루어진 시대에 태어났던 사람들이 주로 살고 있는 한반도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안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 본다. 생각의 영역을 외통수로 만들어 놓은 곳에서 배운 사람이 획기적인 발상과 연구를 통하여 새로운 세계를 열 수 없는 것은 당연하리라 본다. 혹자는 국가와 민족이 없는데 개인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반문을 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본다. 그런 사람은 경기도에 안산이나 반월 등 큰 공단지역을 한 번 가 보길 권한다. 민족이나 국가를 우선하는 것은 좋지만 현재와 미래의 세계는 그런 잣대를 가지고는 살아가기 어려운 사회라 본다.
우리는 너무 정답에만 연연하면서 교육을 받아 왔다고 본다. 무슨 일을 하던 정답부터 먼저 찾다보니 융통성도 없고 주변머리도 없는 사람으로 전락하게 된다. 순진하게 학교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사회에 나와 거친 환경에 빠지게 되면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경우가 생길 것이다. 사회가 학교처럼 정답으로 이루어지는 공간이 아닌 만큼 충실하게 정답만 추구하던 사람들은 적응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일 것이다. 설사 적응이 된다하여도 젊은 날에 각인된 정답타령에 인생 자체를 유연하게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가 된 상태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본다. 없기에 망정이지 있었다면 정답찾기에 능력이 부족했던 사람들은 사회에서 죄다 뒤처지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다행인지는 모르지만 학교에서 정답을 잘 찾던 사람들이 일부 잘 되는 경우도 있지만 정답찾기에 무뎠던 사람도 사회생활을 잘 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결국 학교현장에서 횡행하는 정답찾기가 사회생활을 하는데 얼마나 도움을 줄 것인가는 재삼 생각을 해 봐야 할 문제라 본다. 물론 가고 싶은 대학이나 직장은 한정되어 있는데 가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을 경우 선발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될 수는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 선발 기준이 정답찾기에 달인에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 사회의 다양성과 창의성은 그만큼 줄어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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