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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냐 자신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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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냐 자신이냐
자식과 자신은 몇 촌간일까요? 우리는 혈연관계를 촌수로 따지길 좋아한 민족 중에 하나라 본다. 촌수가 가까울수록 혈연이 가깝다는 개념으로 만든 혈연 관계도라 보면 될 것이다. 유전적으로 얼마만큼의 유전인자가 섞였느냐를 알아보면 더더욱 실감나리라 본다. 우리는 부와 모의 유전자가 각각 50%씩 섞여서 만들어진 피조물이라 보면 될 것이다. 인간의 혈연관계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가 바로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라는 것이다. 혈연으로 보았을 때 이보다 더 가까운 사이는 없으리라 본다. 굳이 촌수로 따진다면 1촌의 관계를 가진다고 보면 될 것이다. 혈연이 먼 관계를 통상적으로 열촌 넘었다고 표현되는 것으로 보았을 때 1촌의 관계라는 것은 부모의 피가 그대로 전수되어 섞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라 보면 될 것이다.
혈연이 가깝다는 것은 피를 나눈 관계라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그냥 인간관계가 아니라 생명을 직접 나눈 관계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회적인 인간관계의 차원이 아니라 혈육의 관계인 것이다. 혈연이 가까울수록 무한책임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자식은 부모에게 부모는 자식에게 의존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것을 도덕으로 표현한다면 부모는 자식을 무한한 사랑으로 대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무한의 효도를 해야 하는 것으로 정립을 시켜 놓았다. 이렇게 설정해 놓은 관계는 옛날 농경시대에는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고 보나 현대사회에서는 뭔가 아귀가 안 맞는 경우도 발생됨을 종종 볼 수 있다.
피임이 라는 개념이 없었을 시절에는 자연이 점지한 대로 애를 낳았다. 자연이 점지를 해 주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삼신할미가 점지를 해 주었다고 보면 좀 더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싶다. 그러던 것이 과학이란 개념이 도입되면서 아이를 낳는 것도 과학의 품으로 들어오게 된다. 윤리와 도덕으로 지탱하던 자식 부모의 관계가 과학과 사회의 틀로 들어오게 된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하면서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는 과거의 도덕과 윤리적 잣대로 정립하기가 좀 어려운 시대로 오지 않았나 싶다.
과거에는 자식농사가 일생에서 엄청 중요한 일 중에 하나였다. 아니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자식도 그냥 자식이 아니라 대를 이어줄 남자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관념에 사로잡혔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느 때 부터인가 이런 관념이 점점 엷어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아이를 낳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닌 결혼의 여부를 저울질 하면서 살아가는 시대에 들어왔다고 본다. 결혼을 하지 않는데 아이를 어떻게 낳겠는가? 아이의 의미가 상실되어 가는 시대로 들어왔다는 시그날인지도 모른다.
어렵게 결혼을 했다하여도 자식에 대해서는 현대적이고 실질적인 사고방식으로 접근하는 사례를 볼 수 있다. 결혼은 했지만 자식을 가지는데 대해서 선뜻 나서지 못하는 부부도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보고 있다. 설사 자식을 낳는다 하여도 한두 명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옛날처럼 자식을 많이 낳아야 그 중 몇 명이 살아서 나중에 부모를 공경도 해야 하고, 또 몇 명은 국가를 위하여 전쟁터에 나가서 희생을 해야 한다는 관념 따위는 사라졌다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무자식상팔자라는 복고풍의 이야기가 이제 현실화 되고 있지 않나 싶을 정도이다.
우리처럼 유교사상에 쩔어 사는 민족에게 자식은 나의 종족을 연결시켜주는 연결고리였다고 본다. 대가 끊기면 조상을 별 면목이 없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혈연이 붙어있는 친족을 데려다 양자라도 앉혀 놓아야 했었다. 그래도 내 혈연으로 종족을 유지해야 한다는 일념은 결국 다산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애를 놓는 과정에서 아들을 낳으면 좋으련만 딸만 죽죽 낳는 경우에는 아들을 낳을 때 까지 낳아야 한다는 생각에 가임 여성들의 아들 생산에 관한 중압감은 상상을 초월했으리라 본다. 남아선호 사상이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난공불락의 성벽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자식은 부모에게 어떤 존재일까? 과거에는 자식이 세 가지 정도의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나는 농업 인력의 배출구로서 또 하나는 선대와 후대를 연결시켜주는 대 이음의 절대적 수단으로 여겨져 왔다고 본다. 나머지 하나는 부모의 노후를 책임져 주는 보험의 역할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런 측면에서 자식은 그야말로 어떤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것이 현대에 들어와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가 생각해 보자. 먼저 언급했던 세 가지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모두가 퇴색되어 가는 것은 누구나 다 인식할 것이다. 농업 인력의 역할은 외국인 노동자가 꿰차고 있고, 선대와 후대를 연결시켜주는 것은 다국적 결혼이나 아예 결혼을 하지 않음으로서 그 의미가 쇠락해 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자식이 부모의 노후를 책임져 주는 일은 그와 반대의 현상이 발생되고 있다. 오히려 부모가 죽을 때 까지 자식을 책임져 줘야하는 시대에 들어온 것이다.
예전에는 자식에게 투자하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 해도 큰 무리가 없었다. 어차피 혈육으로 이어지는 사회에서 자식에게 무한투자는 결국 그 열매가 자신에게 온다는 것을 사회가 보장해 주었다고 본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과연 자식에게 투자한 가치가 부모에게 돌아올 확률은 얼마가 될는지 주판알을 튕겨봐야 알 정도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투자의 여력을 어디에다 집중시켜야 할 것인가가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닐까 싶다. 예전처럼 자식에게 몰빵을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시절에는 정교한 판단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자식에게 투자를 할 것인가 자신에게 투자를 할 것인가가 이 시대가 우리에게 던져준 준엄한 화두인지도 모른다. 추석연휴가 시작되고 있다. 모처럼 가족과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본다. 무한 투자와 무한 사랑의 가족관계에서 선별적 투자와 사랑이 스물스물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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