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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지식은 창밖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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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규전 작성일 2017-11-15 08:48 댓글 0건 조회 67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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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지식은 창밖에 있을까?

   지식을 갈구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밖에 있는 것을 안으로 끌어 들이는 방법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안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지식이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동양에서는 지식을 습득하는 차원에서 교육이 이루어졌고, 안에 있다고 생각한 서양에서는 내면의 지식을 끌어내는 방법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을 해 왔다고 본다.

 

   끄집어내는 것이 더 효율적인가 아니면 외부에서 가져와 집어넣는 것이 더 효율적인가에 대해서 정답은 없다고 본다. 집어넣지 않은 빈 뇌에서 좋은 지식이 나올 리 없을 것이고, 집어넣은 지식을 꺼내 쓰는 방법이 미숙하면 뇌 속에 지식은 무용지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집어넣는 것과 끄집어내는 것이 적적히 조화를 이루면 좋은 교육이 될 수 있겠지만 우리의 현실은 한쪽으로 편중 된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두뇌를 컴퓨터의 CPU로 비유한다면 동양에서는 외부에 많은 자료를 입력하는데 주안점을 두는 형태이고 서양식으로 한다면 그 안에 든 자료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끌어내서 유용하게 사용할 것인가에 주안점을 두는 형태일 것이다. 인간의 두뇌에 아무리 많은 지식이나 식견이 있다하여도 그것이 밖으로 표출이 제대로 안된다면 그 가치는 반감이 되리라 본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에는 겸손의 미덕이라는 것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 아는 체하면 경망스럽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아무리 좋은 식견이나 능력이 있다하여도 들어내지 않은 관계로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그래도 식견이 풍부했던 사람들은 책을 통하여 기록을 남겨 후세 사람들이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와중에도 자신의 지식을 조금이나마 풀어 줄 수 있는 기회를 준 곳이 서원이 아니었을까 싶다. 서원에서는 주로 중국의 사상가의 사상을 가르쳐 주는 곳이다. 소위 성현이라는 사람들의 사상을 주입시키면서 쓰고 외우게 한 후 그대로 행동에 옮길 것을 요구했다고 본다. 그 결과가 일상생활에도 일부 녹아 들어갔겠지만 주된 목적은 과거시험 응시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교육은 사대부들의 전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글을 읽고 쓰는 것은 양반계층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 일반 백성들에게는 그림의 떡 정도로 인식되어졌을 것이다. 그 내면에는 아는 사람들이 많으면 자신들의 기득권이 위태로워 진다는 고약한 심리가 저변에 깔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백성이 똑똑하면 자신들의 말을 잘 듣지 않음은 물론 백성을 쥐어짜는데 지장이 있다고 생각했을는지도 모른다. 지식을 독점하는 체제로 교육이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시대상황에서 많은 백성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을 뿐더러 기득권층에 철저한 하수인 역할밖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반면 서양에서의 교육은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토론하는 아고라 형태의 지식교환 광장이 있었다. 여기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남의 생각에 대해서 반론하면서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겪었다. 소크라테스의 산파법 같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 발달을 했다고 본다. 토론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이나 식견을 타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엮어내는 과정인 것이다. 타당성과 논리성을 갖추어 자신의 생각을 표출하기 위해서 스스로 노력도 함은 물론 타인과의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부족한 부분을 채웠다고 본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민주주의 정신이 도출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우리의 교육은 어떤가? 학교에 가면 교과서와 선생님이라는 두 개의 엄격한 도구가 존재한다. 이 두 가지는 학생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영역으로 군림을 하게 된다. 마치 유교의 경전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듯 교사와 교과서는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영역을 만들고 있다고 본다. 교사는 교과서의 내용을 학생들의 머릿속에 꾸겨 넣는 것이 최대의 미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어떻게 하면 교과서의 내용을 학생들의 머릿속에 제대로 넣을 것인가에 대하여 교사는 늘 고민하는 공간이 바로 학교인 것이다. 교과서가 바이블이고 교사는 그 바이블을 전도하는 성직자이나 마찬가지인 곳이 학교가 아닐까 싶다.

   교과서의 내용을 아무런 비판도 없이 학생들의 머릿속에 꾸겨 넣은 다음 대입수능에서 한 번 써 먹는 것으로 족한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대입수능이 공부의 전부라 생각하는 이런 교육체계에서 교육의 숭고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교육현장은 교수방법이 수동형 그 자체이다. 공부를 하는 목적이 자신의 미래의 삶을 사는데 기본 바탕을 깔아준다고 했을 시 그 접근법부터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수동형의 인간이 이 세상을 리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학교현장을 스케치해 보자. 교사는 학생들에게 어떻게 한든지 교과서의 내용을 집어넣어 주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다. 외부에서 보았을 경우 교사집단은 상당히 능동형이다. 학생이 수용해야한다로 판단하는 지식을 강압식과 일제식을 통하여 단시간에 많은 학생들에게 꾸역꾸역 넣어 주기 위해서 무진장 애를 쓰는 사람들로 인식되어 진다. 극히 일부 학생들은 교사의 뜻에 부응하여 학습을 하려고 하지만 나머지 대다수의 학생들은 교사가 모든 것을 다 해주어야 하는 전형적인 수동형 모드로 바뀌게 된다. 시키면 시키는 일 이외에는 실행은 커녕 생각조차 하지 않는 방향으로 변하는 것이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런 교육의 병폐에 결정판이 지난번 세월호 사건 때 고스란히 나타나지 않았나 싶다.

 

   교육의 가치는 커 나가는 학생들의 미래에 시행착오를 덜 겪고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해 주는데 두어야 한다고 본다. 교과서와 참고서를 달달 외워서 수능시험 한번 보고 그 결과가 인생의 향방을 결정짓는 구조에서 좋은 인재가 나온다는 것은 용이치 않을 것이다. 사회의 통념상 선호대학이 곧 선호직장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곧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너무 단순한 인생경로가 아닐까 싶다. 물론 양지로만 다니면서 살아가는 것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현재와 같은 구조에서 자신이 가지는 천부적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다는 것이 안스러울 뿐이다.

 

   우리의 교육은 오로지 집어넣는데 올인을 하고 있다고 본다. 끄집어 내 쓰는 경우는 바로 앞에서 언급했듯이 대입수능에 딱 한번이다. 이를 위해서 12년 동안을 오로지 교과서 내용을 머릿속에 다 집어 넣다보니 학교 현장의 가치가 반감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수능을 잘 보기 위해서는 학교보다 학원에서 가서 족집게 과외를 받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간다. 학교가 가지는 본연의 모습을 찾기 위해서 자유학기제 같은 제도를 도입하고 있지만 종국에 대입수능이 버티고 있는 한 그 효과는 미미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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