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자유 게시판
나는 왜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페이지 정보
본문
나는 왜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생각은 어디서 나오는가? 아주 유치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생각이 발에서 나오거나 가슴에서 나온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일 것이다. 당연히 머리에서 나오게 돼 있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은 어떤 경우에 잘 나오겠는가에 대해서 고민을 해 본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는지도 의문이 간다. 영양가 있는 생각이 잘 나오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고 본다.
우리는 생각의 영역을 넓히는데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학교 공부가 가장 효율적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소년기와 청소년기에 처한 많은 사람들이 학교로 몰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 학교에서 지식을 쌓고 새로운 학문을 배우고 익히게 된다. 이들이 그 재미없는 학교로 달려가는 궁극적인 이유는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생각의 영역을 넓히는 중요한 공간일 것이라는 이유일 것이다.
예전에 우리 선조들이 공부했던 공간은 주로 서당이나 서원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알고 있다. 그곳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훈장이 가르치는 한문의 영역을 외고 쓰고 일고 또 외고 쓰면서 배워온 것으로 알고 있다. 교과서는 유교와 관련된 지식이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고, 배우고 가르치는 방식도 유교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군사부일체라고 임금과 스승과 부모를 동일한 선상에 놓고 배워왔다고 본다. 경직될 만큼 경직된 유교적 사고방식의 틀에다 맞춘 교육의 결과는 사람들의 의식세계를 더더욱 한정시켰다고 본다. 보통 사람들은 교육의 근처에 갈 수도 없는 세상임으로 대부분은 까막눈이었을 것이고, 글깨나 배운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그야말로 유교경전을 벗어나지 못했으리라 본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의 교육은 식민지 스타일로 덧씌우기가 일어난다. 그러지 않아도 교육으로 경직된 민족에다 일제 앞잡이 들이 가르치는 교육은 그들의 식민사관을 불어 넣으면서 한국 국민이란 의식을 말살시키는 방향으로 교육이 이루어졌다. 창씨개명이니 황국민 정책이니, 한글말살 정책 등 말이 교육이지 일본 놈들의 똘마니를 만드는데 급급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경직된 교육을 받은 사람들 머리에서 유연한 사고가 남아 있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 이후 6.25가 나면서 교육의 황폐화는 극에 달했다고 본다. 정치적 불안의 과정에서도 교육은 당시 기득권을 옹호하는데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이 되었을 것이다. 그 이후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교육도 억압과 통제 그리고 기득권층의 입맛에 맞춘 교육이 자행되었다. 오로지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미명하게 그들의 속내는 기득권을 영속시키고자 하는 방향으로 운영되었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일 것이다. 교육을 자신들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이용하였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학생에 대한 통제와 억압 그리고 독재자를 찬양하는 교묘한 세뇌교육에 열을 올렸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에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이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상당한 불편이 있었던 사람도 있었고, 그 교육에 순응했던 사람들은 밥 먹고 살게 해 주었다는 생각에 긍정적으로 판단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예전에 교육은 밥 먹고 사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좋은 대학에 나와 좋은 직장을 얻어 많은 급료를 타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최선이었었다. 교육이 국가에 종속이 되었던 말 던 간에 자신만 잘 되면 그것으로 만족하였고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기득권층이 되면서 자신들의 잣대를 들이대고 교육을 하는 바람에 우리의 교육은 그야말로 그들만의 리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글자 그대로 조지면 되는 교육으로 점철이 되었음을 지난 정권의 “역사교과서 국정화”에서 우리는 똑똑히 보아 왔다. 아직도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기득권층이 있다는 것과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우리의 교육체계나 의식이 얼마나 허접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금의 교육도 경직된 것은 예나 마찬가지라 본다. 경직된 교육을 받은 교사들이 유연하고 미래지향적인 교육을 할 수 없지 않은가? 엄한 시어미를 모시던 며느리가 엄한 시어미가 되고, 폭력을 휘두르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가 나중에 폭력 부모가 되는 것과 유사한 사례라고 보면 될 것이다. 말로는 창의성 교육을 부르짖지만 실제 교실현장에 가보면 창의성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일제식, 주입식, 획일화 교육에 여념이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경직된 교육을 받은 사람이 사회에 주류를 이루는 경우 그 사회가 건전하게 유지 발전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얼마나 우리 사회가 썪어 문들어 졌으면 ‘헬 조선’이라는 이야기가 나왔겠는가? 배부른 기득권층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놈들 아직 배고픔을 덜 맛봐서 그런 헛소리를 하는 구먼.”하는 정도로 이야기 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기득권층은 일반 백성들을 개 돼지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기득권층이 많다는 것은 일반 백성들과 그들과의 괴리가 점점 커져 간다는 반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을 통하여 사회의 불공평을 타파하고자 만든 정책이 평준화인 것으로 알고 있다. 평준화 반대론자는 그 지역에 기득권을 틀어쥐고 있는 토호세력이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인지되고 있다. 지금도 일부 기득권층은 평준화로 인하여 학력이 떨어졌느니 좋은 아이들이 객지로 다 빠져나갔느니 하면서 이 제도를 폄훼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오로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겠다는 고약한 일념하나고 뭉쳐진 사람들이라 보면 될 것이다. 문제는 쥐뿔도 없는 사람들이 그런 기득권층을 옹호하고 지지하는데서 발생되는 것이다. 이렇게 된 것도 기득권층의 교육 독과점에서 나온 병폐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우리의 교육은 비판은 절대로 용납이 안 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예전에 말이 많으면 공산당이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흘러 나왔었다. 말이 많다는 것은 비판을 할 요소가 많다는 것으로 인식하였던지라 아예 말 자체를 못하게 하는 도구로 공산당을 팔아먹은 것이다. 그 여파가 아직까지 학교 현장에는 고스란히 살아있다. 교실에서 떠드는 학생들을 용납 못하는 것이 우리의 학교 현장인 것이다. 교실에서 떠든다는 표현조차 잘못되었다고 본다. 학생들 상호간에 의견 교환과 함께 대화를 하는 것을 보통사람들은 떠든다고 격하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공간에서 어떻게 잘 된 교육이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해서 이제는 제대로 된 생각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학생들이 그들 상호간에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을 한낱 떠는다는 식으로 몰아가면서 억압을 하고 통제를 하는 것은 과거 군홧발 시절과 다른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세월은 많이 흐르고 있지만 교육현장은 예나 달라진 것이 크게 없다고 판단된다. 달라졌다면 빔 프로젝트와 스크린이 교실에 매 달려 있다는 물리적 환경의 일부 변화를 제외하고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교사의 생각도 예전에 우리가 배울 때 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통의 교사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학생상은 우선 성실하고, 말 잘 듣고, 떠들지 않고, 조용하고, 질문하지 않고, 나대지 않고, 비판하지 않으며, 고분고분하고, 대들지 않고, 엎드려 자지 않고, 얌전하면서도 공과금 제때 잘 내는 학생으로 기준을 삼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 기준에 벗어나면 엄한 자신의 잣대로 교실에 이단자로 몰아세우기 시작한다. 교사 자신이 배웠던 억압과 통제를 학생들에게 여지없이 써 먹는 것이다. 이렇게 배운 학생이 미래 사회를 이끌어 갈 경우 현재의 상태보다 더 나아질 날은 요원하지 않을까 싶다.
교육이 인생을 전부 책임질 수는 없다고 본다. 그렇지만 인생에서 교육이 차지하는 비율은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크다고 본다. 원만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 교육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것이다. 기왕 교육을 받았으면 그 결실을 사회에 나가서 써 먹을 수 있도록 해 주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 우리의 교육은 오로지 시험을 잘 보는 사람을 양성하는 것 정도로 여겨지고 있는 모습이다. 학교를 들어가는 것도 시험, 다니는 과정에서도 시험, 졸업하고 나와서도 시험에서 벗어날 날이 없는 것이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이 겪어야 할 숙명이 아닐까 싶다.
교육현장에서 가장 큰 맹점은 오로지 정답을 찾는데 만 몰골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정답이 있는 문제는 그 정답만 찾으면 되는데 이런 정답은 사이버상의 무수한 자료나 시중에 잘 다듬어진 참고서에서 다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정답이 없는 것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거의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본다. 몇 년 전 교육과 관련하여 한국사회를 슬프게 만들었던 세월호 사건이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 교육의 민낯이 그대로 들어난 사건이었다.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학생들의 판단은 거의 없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야말로 누군가가 그 당시에 처한 상황에서 정답을 내려 주기만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당시 운항을 관리했던 책임자들은 학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학생들은 배가 뒤집히는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판단을 한 번 써 먹어볼 기회조차 갖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교육의 맹점을 한껏 보여준 치욕적인 사례라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정답이라는 것은 거의 없다고 본다. 최선책을 찾는 과정이 우리의 생에 존재할 뿐이다. 학교에서 정답 찾기에만 골몰을 하던 학생들이 정답이 없는 사회생활을 하자니 그만큼 힘들 수 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 교육 자체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정답이 없어도 최선의 길을 찾을 수 있는 혜안을 가르쳐주어야 하는데 우리 교육은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가 볼 엄두조차 못 내고 있는 것이다. 당장 점수 올리는데 만 급급한 나머지 정작 인간의 생활에 필요한 지혜를 찾는 영역에는 소홀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필자 역시 주입식, 강압식, 일제식의 획일화 된 교육을 받은 대표적인 세대라 보고 있다. 시키면 시키는 하라면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정상적이고 성실한 학생으로 인정받던 시대에 교육을 받았다. 선생님의 말씀이 곧 정답이고 최선이라고만 알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선생님이 말씀하지 않은 부분이 훨씬 많다는 것을 사회에 나와서 알게 되었다. 배우지 않았으니 못하고, 교과서에 나오지 않았으니 모르는 삶을 살게 한 것이 다름 아닌 학교라는 것이다. 이렇게 기계적이고 경직된 인간을 양성하며서 창의성을 부르짖는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되어도 한참 더 나간 현상이 아닐까 생각된다. 나이를 먹은 이 시점에서도 누군가가 시켜야지만 할 수 있는 아주 수동적인 인간으로 고착이 되다 시피 한 것이다. 능동적인 사고방식과 자기주도적인 인생을 사는데 도움을 주어야 할 학교가 그와는 거리가 먼 쪽에서 교육을 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본 모습인 것이다.
머리가 말랑말랑할 때 유연한 사고방식을 갖는 교육을 배웠어야 되는데 그와 역방향의 교육을 받다보니 머리 자체가 경직될 대로 경직되었다고 본다. 그저 누군가가 시키거나 명령을 하면 움직이는 그야말로 인간 로봇이 된 듯 한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일전에 필자가 상상하지도 못한 일을 누군가가 제안해 왔다. 그 일 자체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라 판단되었는데 왜 필자의 머리에서는 그것이 떠오르지 않았나 생각해 보았을 때 나의 머리가 그만큼 유연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 하나의 사례라 본다. 창의적인 인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창의성을 갖도록 교육을 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일 것이다. 창의성을 구호로만 부르짖기에 앞서 창의성이 우러나오는 교육을 해야 하는 것이 우리 기성세대가 인식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싶다.
- 이전글면접 17.11.02
- 다음글재경동문님들께 드리는 제언 17.10.2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