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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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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규전 작성일 2018-01-11 10:47 댓글 0건 조회 72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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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랑말랑


   교실수업에도 감동이 묻어나는 시대에 들어가고 있다. 혹자는 수업이 무엇이길래 감동까지 가미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의아심을 가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과거 압축성장이 일어나던 시대에는 단시간에 많은 사람을 일사분란하게 키우는 것이 최선이었다. 목표점이 설정되면 거기에 맞는 인재를 기계적으로 찍어 내듯 만들던 시절이 있었다. 좌고우면 할 겨를도 없이 붕어빵 식의 교육이 학교 현장에서 이루어졌다. 지금도 대학진학이라는 절대절명의 목표에 초점을 두고 오로지 점수 높이는 기계식의 교육이 자행됨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리라 본다.

 

   인간이 인간다운 교육을 받아야 인간냄새가 나는 인생을 살 수 있을 터인데 우리의 교육은 그 근본취지는 잘 알고 있으나 현실은 그와 한참 동떨어져 있지 않나 싶다. 시험 잘 보는 학생이 최선의 학생으로 인식되어 지는 작금의 세상에서 그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단의 영역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국영수사과 같은 과목에 시험을 잘 보는 학생이 최선이라면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학생의 갈 길은 막연하기만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육이 왜 이렇게 왜곡되어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으리라 본다. 소위 도구과목 성적이 처지는 학생은 학교에서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면서 변두리 학생으로 치부되는 한 더 이상의 교육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본다. 미래를 열어가는 모든 학생들이 만족할 수 있는 교육의 현장이 아니라 도구과목의 성적이 높은 몇 명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교육을 국가에서 통제하고자 하는 그릇된 정책에서 나오지 않았나 싶다. 과거 군사문화나 유신시절에 어떻게 하면 국민들을 통제하여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만들 것인가에 대해서 혈안이었던 시절의 문화가 그대로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수업이 이루어지는 물리적 형태는 또 어떤가? 수업이 이루어지는 학교현장은 그야말로 일제잔재와 군사문화가 그대로 보존된 모습이다. 학교 현장에 물리적인 환경은 천편일률적으로 유사하다고 본다. 교실에 태극기를 중심을 교훈과 급훈이 나란히 걸려있고 그 밑에 칠판이 달려있다. 그 밑에 교단이 있고 교단 앞에 교탁이 놓이게 된다. 학생들의 책상배열은 56열 따위로 반듯하게 배치되어져 있다. 칠판을 마주하는 뒷면은 게시판이라 하여 어느 학교나 비슷하게 판을 붙혀놓고 환경정리랍씨고 오만가지를 다 걸어 놓는다. 환경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논리가 고스란히 볼 수 있는 곳이 학교 현장인 것이다. 이렇게 획일화되고 딱딱한 분위기에서 말랑말랑한 인재가 나온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타성에 젖으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문제의 더미에 살면서도 그 자체가 문제로 보이지 않는 현상이 더 심각한 것이다. 교육이 미래인 시대에 살고 있다고 외치지만 그 안에 들어가 보면 내 아이가 도구과목 성적이 우수하면 그것으로 만족스러운 교육이 되는 줄 아는 것이 우리의 딱한 현실이 아닐까 생각된다. 남의 아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내 자식이 국영수 만 잘 하면 그것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한 우리의 교육은 지금의 처지에서 한 발짝국도 더 나가기 어려우리라 본다. 양식이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정도라 보면 대다수의 보통사람들은 오죽하겠는가? 사람이 사회에 나가서 멋있고 재미있게 살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주는 곳이 학교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아이들에게 얼마나 부드러운 교육을 제공해 주었는가에 대해서 자성을 해 볼 시점도 되었으리라 본다. 학교 현장은 거의 군대식이나 마찬가지라 본다. 우리가 군사문화에 젖어 살다보니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문화에 젖어서 교육에서도 엄격한 틀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연 교육의 현장이 군사훈련처럼 그렇게 엄격하고 일사분란해야 할 이유가 있는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우리의 교육현장이 일제 강점기에 황국신민을 만드는 일제의 강압적인 교육의 틀을 그대로 전수 받은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리라 본다.

 

   과거의 관습을 깨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교육현장에서 보는 것이다. 학교라는 공간이 인간의 사고방식을 유연하게 해 주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집에서 아무리 즐거운 마음으로 떠났다 해도 학교 정문을 들어서는 순간 그 부드럽던 마음이 한 순간에 싹 가시게 되는 것을 종종 경험했으리라 본다. 농공고에 다니던 학창시절을 떠 올려보자. 학교라는 곳이 어떤 곳이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진하게 각인하고 졸업을 하지 않았나 싶다.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학교의 분위기는 왠지 딱딱하고 경직되고 획일화 된 공간으로 비쳐지기 쉽다는 것이다.

 

   학교가 부드러워지기 위해서는 부드러운 선생님과 학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일 것이다. 하지만 학교 현장은 험악한 선생과 그보다 더 험악한 학생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 현실인지 모른다. 학생은 학생이 원하는 방향으로 튕겨져 나가고 선생님은 그 학생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훈계를 하는 식으로 운영되는 것이다. 진정으로 학문이 일어날 수 있는 구조와는 멀게만 느껴지는 현실이다.

 

   어떻게 하면 학생과 선생님이 만족할 수 있는 교육현장을 만들 것인가가 우리가 풀어야 할 난제가 아닐까 싶다. 학생들은 힘은 넘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은 무진장 많으리라 본다. 넘치는 힘으로 많은 일을 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통제를 가하면 그들은 그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반항이라는 것을 하게끔 되어 있다. 역으로 생각한다면 학생들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넘치는 힘을 엉뚱한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가치가 있는 곳으로 사용하게 하자는 것이다.

 

   옛날 농고는 힘으로 농사를 짓는데 주력을 했다고 본다. 그 자체를 우리는 농업교육이라고 말했다. 당시에 하루 종일 삽질을 하고 우사에서 쇠똥을 치워도 뭐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 당시에는 그런 실습을 하는 자체가 현재와 미래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기에 군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지금은 어떤 시대인가? 로켓을 타고 달나라에 가는 세상에 삽질로 미래를 꿈꾼다는 것은 시대와 떨어진 사고방식이 될 것이다. 물론 가치 있는 삽질도 있지만 그것도 교육적으로 인정될 수 있을때 비로소 빛이 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치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가 선행과제가 될 것이다. 서두에서 언급된 경직된 교실문화도 필요할 때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일상화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돈과 시간과 열정을 투자하면 그 이상에 가치가 발현되도록 하는 것이 양식 있는 사람들이 취해야 할 행동이라 본다.

 

   미래의 시대는 감성이 주류를 이루게 될 것이다. 중후장대한 모습도 필요하겠지만 그 속에서 어떤 감동을 이끌어 낼 것인가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고심을 하는 세상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배만 부르면 만족하던 시절에서 어떤 과정을 밥을 먹어야 배도 부르고 감동도 받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는 세상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교육만큼 감동의 요소를 많이 가지는 곳도 없다고 본다.

 

   감동이라는 과목을 넣어서 직접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공간이 학교인 것이다. 이처럼 인간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곳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교육이 이루어지는 현장에서 미래를 멋있게 엮어갈 학생들에게 더 매력적인 학교가 되기 위해서 기성세대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많은 고심이 따라야 할 것이다.

 

   감동이나 감성은 인간의 내면에 깊숙이 숨어있는 존재라 본다. 강압적이고 획일적인 공간에서는 좀해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습성이 있다고 본다. 이것을 교육적으로 이끌어 내 보자는 것이 미래의 교육에 기치가 아닐까 싶다. 감성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통제적 분위기부터 걷어내야 할 것이다. 깊숙한 관행과 전통을 하루아침에 걷어 낸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정책적으로나 제도적으로 걷어 낸다면 좋겠지만 그 또한 이해관계가 다른 경우 도입하기가 용이하지 않을 것이다. 외국에서 성공한 사례라 하더라고 우리의 현실에 접목시키기가 용이하지 않다는 것은 과거의 경험에서 우리는 똑똑히 보아왔다.

 

   교육만큼 과거로 회귀가 빠른 분야도 없으리라 본다. 다른 분야는 대부분 새로운 세계로 가면 그 다음 세계를 향하고 있는데 교육 분야는 새로운 세계로 갔다가도 이내 과거로 회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지금 우리의 교육에서도 소위 진보교육감이 있는 곳은 개혁의 기치를 올리고 있지만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보수 쪽에서는 과거의 향수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들은 아이들을 들들 볶아서 공부하는 기계로 만드는 것이 교육의 최선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우선 평준화를 반대하는 세력들일 것이다. 이들은 무한경쟁을 시켜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한껏 끌어 올리는 것이 교육의 지상목표로 생각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국영수를 잘 하고 시험을 잘 보는 자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 간다고 믿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들이 추구하는 학교는 특목고, 자사고, 과고, 외고 등 우수 집단의 학교를 최우선의 학교로 인정하고, 나머지 학교들도 그런 무한경쟁의 대열에 합류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기득권층이 두터운 이상 그들이 교육의 헤게모니를 잡는 순간 우리의 교육은 무한경쟁의 세계로 또 빠져야 하는 상황을 맞이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경쟁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경쟁의 대상을 국영수의 과목에다 한정시켜 놓고 그 대열에서 시험을 잘 보는 학생이 최선의 학생으로 인정하는 세계에서 창의성이나 다양성 교육을 바라는 것은 연목구어가 아닐까 생각된다. 시험 잘 보는 일부 학생들만을 위한 교육이 이어지는 한 우리의 미래는 그야말로 획일적인 사회로 전환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시험 잘 보는 사람만이 인간대접을 받는 나라가 된다면 그렇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라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고민을 해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지금까지 우리의 교육은 획일화와 규격화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고 본다. 다양한 생각이나 행동을 하는 학생은 학교사회에서 이단아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고 본다. 하지만 세상은 국영수로 밥 먹는 경우는 극히 드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로지 국영수 타령만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딱할 뿐이다.

 

   조선시대 우리의 교육은 오로지 공맹자를 중심으로 한 주입식의 단조로운 패턴이었다. 하늘천 따지에서 논어 맹자 대학만 줄줄 외고 쓸 줄 알면 양식있는 사람으로 대접을 받던 시절이었다. 실제 논어 맹자가 밥 먹여 주는 세상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조선 오백년 동안 줄기차게 공맹자만 쓰고 외웠다. 그들의 사상이 현실에 맞던 안 맞던 간에 맹목적으로 추종을 했다고 본다. 그런 교육법으로 조선 사회가 버텨 왔다는 것은 대단하다고 생각될 수 있으나 그 이면에 오백년 역사에서 남은 것이 무엇이 있었는가에 대해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게 과연 몇 개나 있겠는가? 우리가 내 세울 수 있는 독창적인 문화라곤 그래도 한글이라도 있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내 세울 수 있는 문화라곤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된 기저에는 교육의 잘못도 있었다고 본다. 막말로 하늘천 따지가 밥먹여 주지 않는다는 것쯤은 익히 알고 살았으면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도 있었을 것이다.

 

   과거를 알면 현재를 읽을 수 있고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면 미래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의 교육을 가지고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모든 사람들의 관심은 누가 국영수를 더 잘 해서 시험을 잘 보고 내신을 잘 받아 사대문 안에 있는 대학에 많이 집어넣느냐가 지상최대의 목적이 된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인 것이다. 아니 사대문 안에 들어간 아이들이 우리나라를 이끌어 간다는 보장도 없는데 주구장창 사대문만 고집하는 사고방식에서 우리의 미래가 좁아 보이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이었으면 좋을 것 같다. 그 잘난 사대문 안에 든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은 만족스러운 대학생활을 하고 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목표점이 사대문 안에 들어가는 것인데 그들은 기성세대가 정해준 목표점에 이미 도달했다고 인지할 것이다. 그 다음의 도전거리가 별로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학문을 고차원적인 세계를 열어가는 수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취업을 하는 하나의 도구 정도로 본다는 것이다. 대학에서 토익점수를 높이고 학점을 잘 받아 좋은 직장에 취업을 하는 것이 소박한 목표인 것이다. 그 목표를 향해서 경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좋은 직장에서 안정되게 생활하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어렵게 공부를 해서 직장에 입성하는 것에 목표를 둔다면 그 또한 낭비가 아니겠는가? 직장생활이 목표 달성점이라면 그 사람은 직장을 구하는 순간 다음 목표점을 잃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할 것이다.

 

   인간은 희망을 먹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오늘이 비록 험하다 할지라도 내일에 부드러운 인생이 올 수 있다면 충분히 참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남자들의 군대생활을 생각해 보자. 통제된 사회에서 군 복무 기간 동안 버틴다고 생각하면 앞이 캄캄할는지 모르지만 제대하고 멋있는 인생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군 생활을 할 수 있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배움이라는 것을 통하여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공부의 끈을 놓지 않는 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발로일 것이다. 내일에 대한 희망이 없는 자가 오늘에 무엇을 투자한들 재미가 있겠는가? 중세시대에 네델란드의 유명한 철학자 스피노자는 비록 내일에 지구에 종말이 온다하여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어록을 남겼다. 그 말에 심오한 뜻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내일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말자는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내일의 희망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방법론은 많이 있을 것이다. 수많은 방법 중에 가장 보편적이고 가치가 있고 광범위하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이 공부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공부가 무엇이길래 미래의 마법사처럼 보여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흔히 생각하는 공부를 국영수에 국한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상당히 편협되었다고 본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좀 더 풍성하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영역을 체계적으로 엮어가는 것이 공부가 아닐까 생각된다. 영어 단어 하나 더 외우고 수학 문제 하나 더 푸는 것도 미래를 밝게 해 줄 수 있다. 이는 수험생들에게 주효한 방법이라 보면 될 것이고, 성인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경우 내 자신이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보완하는 작업이 공부라 생각된다. 평생학습이라는 말은 낯익은 표현이 된지도 오래 되었다. 평생학습을 하는 곳에서 제도권의 학교처럼 국영수 위주로 가르쳐주는 곳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가르치고 배우는 것도 이제는 과거의 관행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본다. 가르치는 사람은 자신의 지식이나 식견을 배우는 자들의 머릿속에 각인 시켜야 자기 몫을 다 했다고 생각하고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의 지식을 자신의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이 최종 목적이라 생각하는 것부터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철학자 공자는 일찍이 배움이라는 것을 기쁨으로 승화를 시킨 인물이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고 말했다. 학교에서 그 문장을 배울 때는 익혀서 시험에 대비하기 위한 방책으로 접근했는데 지금와 다시 되새겨 보니 그 말이야 말로 음미를 하면서 배워야 했던 구절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는 배움 자체를 오로지 시험 잘 보기 위한 수단으로 접근을 했기에 학교와 배움은 그저 경직된 영역과 공간으로 낙인을 찍어 버렸다. 누구나 가고 싶은 곳이 아니라 누구나 가기 싫은 곳으로 전락이 되었다는 것이다. 미래에 원대한 꿈을 실현시켜 주는 유일한 영역이 모든 사람들이 기피하는 공간으로 변했다는 것은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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