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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숭아 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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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숭아 학당
무질서 속에 질서가 더 엄하다 했던가? 우리는 개콘이라는 코메디 프로그램을 중에서 학교 교실에서 벌어질 수 있는 무질서의 끝판 왕을 보는 듯 한 코너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봉숭아학당이 아닐까 생각된다. 학당이의 사전적 의미를 ‘배움이 일어나는 어떤 장소’ 정로도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장면은 한마디로 혼을 쏙 빼는 수업시간이 거의 압권 수준이다. 그런 수업을 한 시간만 하다보면 선생이나 학생이나 저절로 진이 빠지고 혼이 나가리라 본다.
우리는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저런 곳도 학당이냐라고 반문을 하면서 보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 수업을 학교 현장에서 해 적도 없고 들어 본 적도 없었으니 그런 장면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필자도 과거에는 봉숭아학당 프로그램을 보면서 저렇게 수업을 하면 개판이 될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었는데 최근에서야 그 가치를 조금을 알 것 같다. 그 프로그램을 통하여 수업은 저렇게 하면 안 된다는 반면교사의 역할을 했는데 실제 그 틀을 잘 들여다보면 진정한 수업이 그 안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교사가 아니라 실제 훌륭한 교사와 교실이 될 수 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수업시간이 조용해야만 하는 것으로 각인이 되어 있다고 본다. 학교에 다니던 시절 선생님께 가장 많이 듣던 이야기가 “야! 조용히 해.”가 아닐까 생각된다. 필자가 대학 1학년 때 생물이라는 과목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배웠던 생물학 이론이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그 교수님의 말씀 중에 지금까지 기억이 남는 멘트 하나가 있다. 예나 지금이나 많이 배우고 학식이 높으신 분의 강의는 지극히 이론적으로 흐른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일 것이다. 듣는 학생의 입장으로 보았을 때 아무리 고상하다해도 재미가 없는 관계로 자연스럽게 옆 친구와 많이 떠들거나 수업에 소홀할 수 밖에 없는 환경에 처하게 된다. 당시에 그 교수님 말씀 “야! 이게 강의실이냐 돗대기 시장이냐?”라고 일갈을 했던 기억이 또렷이 남아있다. 명색이 앞뒤를 가린다는 대학생들 정도면 유명한 교수님의 강의에 귀를 기울리고 잘 들어야 하는데 수업분위기가 엉망이 되면서 그 교수님의 엄한 꾸지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우리나라에서 명 수업이 되기 위해서 일단 교실이 조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실이 조용하다는 것은 선생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려 잘 듣고 그 내용을 새겨서 머릿속에 집어넣으라는 이야기인데 그 방법은 지극히 고전적인 스타일의 공부법이라 생각된다. 옛날 서당이나 향교 시절에 훈장의 말씀은 곧 진리이자 법이었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군사부일체라는 이야기가 나왔겠는가? 임금과 아버지와 스승이 이야기하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이 고분고분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론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전통이 지금의 교실에도 여전히 통용된다는 것이다. 난공불락의 교실환경을 극적으로 반전시키고 있는 코너가 바로 봉숭아학당인 것이다. 절간 같은 교실이 돗대기 시장으로 변했을 때 어떻게 되겠는가를 그 프로그램에서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 프로그램에서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어림잡아 유추해 보는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시나리오 작가는 우리의 고정적인 관념을 과감하게 혁파하여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교실 분위기의 반전을 있는 대로 끌어내 보자는 의도도 엿 보였다. 물론 개그프로인 만큼 많은 사람들로부터 웃음을 살 수 있는 방향에서 원고를 쓰고 거기에 따라서 연기를 하겠지만 그 이면에는 왜 이런 프로그램을 보고 많은 사람이 웃는 것도 모자라 공감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한다.
자유스러운 토론환경이 설정된 나라에서는 이런 프로그램은 발 붙이지 못하리라 본다. 우리처럼 유교적인 관념에 젖어서 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카타르시스를 일으킬 정도가 되리라 본다. 하지만 그런 형태의 프로그램이 웃음의 소재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교육현장이 경직되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경직되면 될수록 그런 프로그램은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웃음을 이끌어 낼 수 있으리라 본다.
역으로 우리의 교육현장 자체가 봉숭아 학당처럼 시끌시끌하다고 보면 어떤 교실 개그프로그램이 나올 것인가에 대해서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유머의 특징 중 하나인 반전을 주축으로 한다면 선생님은 입에 거품을 물고 강의를 하고 학생들의 절반은 엎드려 자고 나머지 중 절반은 자빠져 자는 모습으로 그려지리라 본다. 원래 유머의 특징은 예기치 않은 반전에서 나옴으로 현실과 반대의 현상이 나오면 웃기게 돼 있다는 것이다. 개콘에서 나오는 봉숭아학당을 보면서 웃음이 나오는 것은 우리 교실 현장이 그 학당과는 완전히 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
세상에서 바뀌기 어려운 집단이 법조계와 교육계라고 한다. 그와 상응해서 비즈니스계가 가장 현실에 빨리 적응하면서 바뀌어 간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교육계가 변화에 무디게 대응되는가? 그리고 왜 변화를 하지 않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원인 중 하나가 굳이 변화를 하지 않아도 수요자는 늘 대기하고 있음은 물론 가르치는 영역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자신들이 하는 방식이 최고라는 일종에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변화를 하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지장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굳이 험한 격랑의 변화쪽으로 갈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억지로 변화를 시킨다 하여도 어느새 보면 변화 이전의 모습으로 환원되어 있다는 것이다.
봉숭아학당에서도 많은 코너가 소개되는데 그 중에서 비뚤이의 수업장면이 나온다. 학교 현장에서 보면 가장 골 아픈 스타일의 학생 유형이라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성실한 학생인데 이 코너에 보면 정상적으로 시키는 것도 그와 반대의 방향으로 행동을 하는 그야말로 골치 아픈 학생의 표본으로 나오게 된다. 그런데 그 코너에 선생님은 화도 내지 않고 그 학생을 바른 길로 안내하기 위하여 색다른 교육방법을 구사하고 있다. 필자처럼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는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 선생님의 교육방법도 나쁘지만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뚤게 나가는 학생은 그 길로 갔을 때 혹독한 결과를 경험하면서 정상적인 사고방식의 세계로 유도하는 선생님의 교육방법이 눈에 확연히 띈다. 비따하게 나가는 학생을 나무라는 것만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은연중에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본다. 그 프로그램을 보는 비뚤이의 심사를 가진 사람들도 자신의 일이라 생각하기에 앞서 그냥 웃기자고 한 정도로 받아들인다면 그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은 살짝 슬퍼지지 않을까 싶다.
봉숭아학당 프로그램이 리바이블 된 것도 교육적인 측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썩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라 본다. 미래지향적인 교육이 되기 위해서는 교육현장이 봉숭아학당보다 더 리얼하게 학생 스스로가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와 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도 대부분의 우리나라 학교는 절간처럼 조용한 것이 교실현장의 덕목으로 아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조용한 교실은 조선시대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군사문화 시절에 통제와 억압이 덕목이던 시절에나 통하던 방법이 아닐까 싶다. 미래를 열어가는 학생들에게 절간 같이 조용한 교실수업으로는 그들의 원만한 미래를 열어줄지 저의기 의심이 먼저 간다. 우리의 교육현실이 너무 고전적이고 전 근대적이기에 봉숭아학당이 재조명을 받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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