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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뿔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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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뿔싸
아뿔싸를 영어로 표현한다면 “Oh my God!” 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엉뚱한 일이 벌어졌을 때 한글표현보다 영어로 된 표현을 더 많이 쓰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상당히 합리적이라 보는데 그들도 우리와 별반 차이가 없는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게 엿보인다. 아마 그들은 자신을 지켜주는 신이 항상 자신의 주위에 있는 것으로 인식했던 모양이다. 예기치 않았던 불길한 일이 발생되었다는 것은 나의 신이 자리를 잠시 비웠다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해 봄직하다. “오 마이 갓”의 숨은 뜻을 보면 “오! 나의 신이여, 나를 왜 이렇게”라는 뉘앙스가 풍기는 문장이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아뿔싸라는 단어도 상당히 친숙하였는데 많이 쓰지 않다보니 서먹서먹하게 되었을 뿐이라 본다. 그와 상응한 영어의 표현은 젊은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구사되면서 익살스럽고 친근감 있게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데. 당장이라도 딱한 사정이 코앞에 다가왔을 때 영어표현이 먼저 나올까 아니면 한국말의 아뿔싸가 먼저 나올까에 대해서 우리 스스로 유추해 보자.
살아가면서 ‘아뿔싸’라는 상황을 덜 맞이하고 살아감이 어떨는지요? 하는 일 마다 아뿔싸를 외친다면 삶 자체가 엄청 힘들어지리라 본다. 아뿔싸를 외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만 찾는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본다. 뻔히 알면서도 우리는 이런 단어에서 자유스러울 수 없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뿔싸가 발생되는 원인 중 가장 큰 것은 자신의 판단이 정교하지 못했을 때 주로 나오게 된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그럴싸하게 출발하였는데 중간이나 결말에 가다보면 자신이 생각하던 방향과는 다르게 엉뚱하게 나가는 경우가 가장 많으리라 본다. 더 쉽게 표현하면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지는 경우인 것이다. 참고로 삼천포시라는 지명은 공식적으로 사천시로 통합되었다고 한다. 지명 자체가 갖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인하여 사용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 논리라면 프랑스의 수도 ‘파리’도 개명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우리는 끊임없이 판단하고 일하고 결과를 바라보는 과정을 통하여 인생이 엮여진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철들면서부터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운전을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운전이 서툰 사람은 부모나 지인들로부터 조력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자신의 인생 운전대는 스스로 잡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인생의 운전에서 탄탄대로만 가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실제로 핸들을 잡아보면 샛길이나 수렁 같은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결국 더 이상 핸들을 틀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입에서 장탄식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의 잘못으로 인하여 아뿔싸의 경지까지 간다면 스스로에게 책임을 지워주면 될 것이다. 물론 골도 아프고 가슴도 아프겠지만 어찌하겠는가. 본인이 엎지른 물 일터이니까, 그런데 본이 아니게 발생된 피치 못 할 사정이 벌어졌을 때에는 누구에겐가에 대하여 그 책임을 뒤집어 씌워야 하는데 그것이 마땅찮았을 때 자연스럽게 내 밷어지는 말이 아뿔싸일 것이다. 타인에 의해서 발생되는 이런 현상도 결국은 자신이 엎질렀기에 어디 가서 하소연 할 수 도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뿔사의 결과만큼 책임이 본인에게 돌아오는 것도 없을 것이다. 타인에 의해서 발생되는 아뿔싸도 있을 것이다. 이는 본인의 귀책사유에 의해서 타인이 생각지도 않은 변을 당했을 경우에도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딴에는 긍정적인 일이라고 동조를 해 주었는데 나온 결과가 엉뚱했을 때 난처한 상황에서 맨 먼저 튀어나올 수 있는 언어라는 것이다.
필자의 전공은 원예와 조경 쪽이다. 이 분야를 전공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많은 식물들과 만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많은 식물과 씨름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람들의 성격이 다 다르듯 식물도 가지고 있는 성격이 천양지차로 나타난다. 어떤 식물은 물이 많아야 잘 살고 또 어떤 식물은 물이 많으면 죽어버리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같은 식물도 자라는 시기에 따라 물이 많이 필요한 타이밍이 있고 또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식물이 자라는데 물만 있어서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알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교과서에서 배우기로는 식물이 최소한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요소는 햇볕, 공기, 물, 비료 정도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네 가지 요소 정도만 있으면 식물을 키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을 할 것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어쩌다 귀한 식물을 구입한다거나 선물을 받아 왔는데 너무 애지중지하다보니 어느 날 시름시름 앓다가 죽여 버린 경험도 있으리라 본다. 필자 역시 작년 겨울을 나면서 귀중한 식물을 많이 죽였다. 내가 죽인 것이 아니라 자연이 죽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핑계지만, 자연이 왜 멀쩡한 식물을 죽였겠는가? 당연히 필자의 관리 소홀이나 관리 미숙으로 인해서 발생된 인재라 생각된다. 모든 것은 결과가 있으면 그 이면에는 원인이 존재하리라 본다. 원인만 잘 찾으면 적어도 다음에는 그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시골집에 귀한 품종의 동백을 수십 종 구입하여 재배를 하고 있다. 올해 모두 죽여 버렸다. 내 불찰인지 자연의 심술인지는 모르지만 모두 바싹 말라 비틀어져있다. 게다가 이웃에서 키우는 염소가 습격하여 붙어 있던 푸르스름한 동백 잎을 죄다 따먹어 버렸다. 그간에 들이 정성에 대한 댓가가 와르르 문어진 것도 가슴이 아팠지만 거기에 들어간 비용도 만만찮았던 것을 생각하면 머리마저 아팠다. 봄이 온다하여도 새싹이 틀 가망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한마디로 ‘아뿔싸’가 뇌리를 스친다. 한 순간에 ‘아뿔싸’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골을 패는 식으로 이어질 것 같다. 좋게 말하면 비싼 수업료를 냈다고 보면 될 것 같으나 내년에 이런 일이 또 발생하지 말라는 법도 없는 것이다.
게다가 어렵게 종자를 구하여 재배하고 있는 ‘팜파스그라스’가 월동 중에 모두 얼어 죽은 것이다. 그야 말로 신주 핼애비 모시듯 정성을 기우렸는데 엊그제 옮겨심기 위하여 피복물을 걷고 굴취를 하는 과정에서 맛이 갔다는 것을 인지하였다. 이 풀은 억새나 갈대 비슷한 것으로 뿌리가 엄청 단단하기에 굴취하기 어렵다고 판단되었는데 의외로 쉽게 파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과는 딴 판의 상황이 벌어지면서 먼저 파낸 포기를 찬찬히 들여다보니 이미 뿌리 목 부분은 완전히 상해 있었다. ‘아뿔싸’ 내가 뭔가 잘못해도 한참 잘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번뜩 들어간다. 월동하는 과정에서 그 식물이 감내하기 어려운 것을 내가 제공했던가 아니면 자연이 제공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간다. 물론 그 식물이 사망을 한 원인의 주범은 동해였다. 추위에 약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월동준비는 해 주었는데 그 과정 중에 워밍업이 제대로 안되었는지 아니면 원초적으로 너무 소홀하게 월동장구를 씌워주었는지는 확실히 알 방법이 없다.
봄이 되었으면 새로운 활력이 돋아야 하는데 그 활력의 주체가 죽어버렸으니 딱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서 새로 시작해야 할 입장이다. 나이를 먹으면 귀신처럼 더 잘 알고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끊임없는 시행착오에 시달리고 있으니 한심하다는 말 이외에는 달리 쓸 말이 없을 것 같다. 젊은 날에는 ‘아뿔싸’를 치료할 물리적인 시간이라도 많이 있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찾아 온 ‘아뿔싸’는 우리 자신의 인생을 더 김새게 만드는 주범일지도 모른다. 맥이 풀리는 일인 것이다. 밥을 먹는 과정에서 어린 아이의 볼테기에 붙은 밥풀은 엄청 귀엽게 느껴지지만 낫살이나 먹은 사람의 볼에 붙은 밥풀떼기는 보기가 영 껄끄럽다는 것이다. 그런 것도 일종에 소소한 ‘아뿔싸’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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