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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의 소설 '그 여자네 집'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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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집
-- 김용택의 시 '그 여자네 집'에서 --
<등장 인물>
만득 - 곱단이 오빠의 친구이자 같은 마을 곱단이에게 각별한 감정을 갖지고 있는 만학의 중학생. 순수한 마음씨를 지니고 있었지만 자신의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곱단이와 결혼하지 않는다.
일제 치하에서 징집되면서 곱단이와 헤어지고 6.25동란 후 고향이 북한 땅이 되면서 곱단이를 만날 수 없게 되고 마을 처녀인 순애와 결혼한다. 헌신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지만, 두 차례의 민족적 수난을 겪으면서 그 시련과 고통을 호소하는 중심 인물이다.
곱단 - 아들이 넷이나 되는 집의 외동딸이자 막내딸로 같은 마을의 만득이와 각별한 사이였지만, 정신대에 보내지 않으려는 곱단이 가족에 의해 만득이가 아닌 다른 사람(낯선 중년 남자)과 원치 않는 결혼을 한다. 분단 후 신의주에서 살아간다.
순애 - 만득이의 아내로, 표면적으로 금슬 좋게 살아가나 남편이 곱단이를 못 잊어 한다고 오해하여 만득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이로 인해 곱단이에 대한 질투심이 심하다. 남편에 대한 회상담을 들려줌으로써 그 동안 만득이가 곱단이를 얼마나 그리워했었는가를 알려 준다. 곱단이를 보이지 않는 연적으로 여기다가 후에 고혈압으로 죽는다.
그' 여자네 집' 줄거리1
일제 시대 행촌리 마을에서 만득이와 곱단이는 마을 사람들의 기대를 등에 업은 채 서로 사랑을 확인하고 각별한 사이로 발전한다. 그즈음 일제의 강제 징병과 정신대 징발 정책이 집행되고 만득이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곱단이와 혼인하기를 거부한 채 징집되어 곱단이와 이별한다. 곱단이는 정신대 징발을 피하기 위해 낯선 중년 남자와 결혼하여 신의주로 간다. 해방 이후 돌아온 만득이는 이북에 있는 곱단이를 만나지 못하고 순애와 결혼한다.
6·25 동란 이후 행촌리마저 북한 땅에 속하게 되고, 만득이와 순애는 서울로 와서 세간을 낸다. 서울에서 열린 고향 군민회 자리에서 다시 만난 순애는 `나`에게 아직도 곱단이를 잊지 못하는 만득이의 일화를 들려 주면서 만득이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드러낸다. 그 후 순애는 고혈압으로 죽고, 만득이에 대한 원망을 털어 놓는 `나`에게 만득은 자신의 삶이 일제의 수탈 정책, 국토의 분단이라는 민족적 수난으로 인한 시련과 고통으로 점철되었음을 강조한다.
'그 여자네 집' 줄거리 2
동네 노인들은 만득이가 곱단이의 신랑이 되리라는 걸 온 동네가 다 공공연하게 인정하고 있었다. 곱단이와 만득이 그 둘 사이는 그들보다 어린 우리 또래들 사이에도 선망의 대상이었다.
곱단이하고 만득이가 좋아하는 것을 바람났다고 말하지 않고 연애 건다고 말한 것은 그런 스캔들과 차별 짓고 싶은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로서는 일종의 애정이요 동경이었다.
만득이와 곱단이는 마을 사람들의 꿈을 배반하지 않았다. 곱단이가 만득이만 보면 유난히 부끄럼을 타기 시작한 게 그 증거였다. 하지만 만득이가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징병으로 끌려나갔다. 며칠간의 여유는 있었고, 양가에서는 그 사이에 혼사를 치르려고 했다. 연애 못 걸어 본 총각도 씨라도 남기려고 서둘러 혼처를 구해 혼사를 치르는 일이 흔할 때였다. 더군다나 만득이는 외아들이었고, 사주단자는 건네지 않았어도 서로 연애 건다는 걸 온 동네가 다 아는 각싯감이 있다. 그러나 그는 한사코 혼사 치르기를 거부했다. 그건 그의 사랑 법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만득이는 징병을 가게 되었고 여자들도 정신대에 끌려가기 시작했다.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곱단이는 오빠가 데리고 내려온 측량 기사로 있는, 한 번 장가갔던 남자와 혼사를 치르게 되었다. 만득이가 살아서 돌아왔을 때에는 곱단이는 마을에 없었다. 우리 고장은 아슬아슬하게 38 이남이 되어 북조선의 신의주와는 길이 막히고 말았다. 만득이가 살아서 돌아온뒤 행촌리 처녀인 순애와 혼사를 치렀고 6.25 전쟁 때 마을 사람들과 헤어지게 되었다.만득이가 서울로 내려간 사이에 휴전선이 마을을 이북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만득이를 서울에서 다시 만난 지는 채 십년도 안 된다. 삼촌이 우리 고향 군민회에 가 보고 싶다고 하셔서 모시고 간 자리에서였다. 그 곳에서 만득이와 순애를 만났고 만득씨가 아직도 곱단이를 못 잊고 있다는 순애의 하소연을 들었다. 순애가 죽고 문상을 가서 그 여자의 영정 사진을 보고 섬뜩했다. 이십대 후반으로밖에 안 보이는 사진이었다. 그 여자가 죽고 나서 만득이를 따로 만날 일이 있을 리 없었다.
그를 우연히 만난 것은 그가 상처하고 나서도 이삼년 후 엉뚱하게 정신대 할머니를 돕기 위한 모임에서였다. 뜻밖이었지만, 생전의 그의 아내로부터 귀에 못이 박이게 주입된 선입관이 있는지라 그가 그 모임에 나타난 것도 곱단이 하고 연결지어서 생각되는 걸 어쩔수가 없었고, 만득이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왜요? 곱단이를 못 잊어서요? 여긴 왜 왔어요? 정신대에 그렇게 한이 맺혔어요? 고작 한 여자 때문에. 정신대만 아니었으면 둘이서 혼인했을 텐데 하구요? 참 대단하십니다. 내 퍼붓는 말에 그는 대답 대신 앞장서서 근처 찻집으로 갔다. 그가 나직나직 말했다.
"내가 곱단이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는건 순전히 우리 집사람이 지어낸 생각이라고 자신은 지금 곱단이 얼굴도 생각이 안난다고, 내가 유람선 위에서 운 것도 저게 정말 북한 땅일까? 남의 나라에서 바라보니 이렇게 지척인데 내 나라에선 왜 그렇게 멀었을까? 그게 서럽고 부끄러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복받친거지, 거기가 신의주라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요." 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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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석연2님의 댓글
김석연2 작성일
지척거리 신의주에 살고 있을 사랑하던 사람을 바라보는 만득이의 가슴은 어땠을까?
석달 열흘 펑펑 울어도 풀리지 않을 가슴은 죽어서도 가라앉지 않을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