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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기 [re] 월남 패망이 우리에게 주는 생생한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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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요거사 작성일 2012-03-20 11:14 댓글 0건 조회 57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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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로 사용되던 이곳은 1868년 프랑스에 의해 세워졌으며 '노로돔궁(Nordom Palace)'
이라 불렀다. 구 월남정부 대통령궁이였던 이곳은 현재 독립궁이라는 이름으로
통일베트남의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월남 마지막 대통령이던 '두웅 반민'이 항복문서에 서명했던곳으로 항복하던 당시의 사진,
소련제 탱크가 철문을 부수는 장면등 흑백사진 30여장이 보관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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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은 이렇게 패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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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4월 30일 오전 11시-
남베트남 수도인 사이공의 대통령궁을 향하여 북베트남의 소련제 T-34 탱크 한대가
담장을 부수고 돌진했다.
그리고, 계양돼 있던 남베트남 국기를 끌어내고 '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 의
붉은 깃발을 올렸다.
사이공 함락의 선봉으로 나선 월맹군 제203기갑여단과 304보병사단이
궁에 진입한지 45분뒤에 일이였다.
이로서 1955년에 건설된 베트남공화국(Republic of Vietnam)은 20년만에
역사의 무대에서 영원히 살아졌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 1961년 개입이래 12년동안
연병력 300백만,1,600억 달러의 비용을 쏟아부으면서 도운 남베트남의 최후는
이토록 허무한 것이였다.
이 기간증 미국은 2차대전중 사용한 량의 3배가 넘는 785만톤의 폭탄과
적의 은거지를 없애기 위해 7,500만 리터의 엄청난 고엽제를 사용했다.

우리 한국군도 1965년 주월한국군사령부가 창설된후 7년동안 연35만명이
참전했고 15,922명의 사상자(사망 4,960명)를 냈으며,
고엽제 피해및 후유증 환자도 12,300여명에 이른다(보훈처에 등록된 숫자)

이토록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월남이
빈곤한 물자와 낙후된 화력을 가진 월맹에게 왜 그토록 하루아침에 패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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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4월30일 사이공 대통령궁 함락


자유 월남을 패망시킨 주역은 월맹군과 베트콩의 게릴라작전 때문이 아니였다.
'호치민'이 1930년 창당한 베트남 공산당원과 민족해방전선의 '웬후토'가 양성해서
침투시킨 5만여명의 비밀조직원 때문이였다.
전체 인구의 0.5%를 차지한 이 간첩들은 민족주의자,평화주의자,인도주의자로
위장한채 시민,종교단체는 물론 대통령비서실장과 장관,도지사등 권력핵심부에
침투하여 반미,반전 데모를 주동하는 선동전략을 펼쳤던 것이다.
거기에다, 부패한 월남인의 관료의식도 패망의 원인제공에 빼놓을수 없다.
당시 월남정규군은 55만이였는데 이중 10만명 이상이 뇌물을 주고
비공식 장기휴가를 받아 대학에 다니거나 취업을 했다.
심지어는 장군들이 운영하는 사(私)기업에 파견되어 무보수로 일하는 사례까지
있었다.
이처럼 이름만 있고 실체는 없는 군인들을 가르켜 '유령군인' '꽃군인' 이라 불렀다.
사태가 이럴진대 군의 사기는 어떻했겠는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것이며,
이런 군대를 가지고 어떻게 이념무장으로 철벽된 적과의 싸움에서 승리할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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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망한 조국을 버리고 필사의 탈출을 시도하는 월남인들-우리는 이들을 '보트피풀'
이라는 새로운 신조어로 불렀다)
전쟁에 패망한 국가의 참혹함을 월남은 단적으로 보여줬다.
150만에 이르는 공무원들과 동조자들은 지방으로 강제이주 되고,
군인,경찰,반체제인사,브르조아등 30만-50만명이 즉결처분되었으며,
고위직 인사와 군간부등 20만명이 재교육장에 수감되었다.
또한, 패망되던 한해만도 소형선박에 목슴을 걸고 필사적으로 조국을 탈출한
보트피풀(Boat people)이 23만명에 달했다.
이같은 비극적인 탈출은 통일베트남 정부가 '도이머이(쇄신)정책'을 채택한
1986년 이후에도 멈추어지지않고 계속되어 1992년까지 필리핀,한국,인도네시아,미국
등으로 탈출에 성공한 사람들은 무려 79만명이 넘었다.
각국에 도착한 보트피플들은 난민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다시 제3국으로 이주되었는데
우리나라도 부산에 있던 수용소에서 마지막 남은 160명의 난민들을
뉴질랜드에 보낸후 이를 페쇄했다.
나라를 잃은 국민들의 참담한을 어찌 필설로 다할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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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망한 바다 한가운데데 정처없이 떠돌던 이들이 갈곳은 과연 어디일까?
어쩌다 근처를 지나가는 헬기를 향하여 손을 흔들어 보지만 냉정한 국제현실은
이들에게 발붙일 단 한뼘의 땅도 제공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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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공 함락과 한국교민의 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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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4월9일-
봄날의 엷은 안개가 끼어있는 부산항 중앙부두를 해군수송선(LST) 제815함(북한함:
함장 이윤도 중령)과 810함(계봉함:함장 박인석 중령) 두척이 소리없이 뻐져나간다.
장병들에게 알려진 출항목적은 '남지나해 훈련'
그러나,실제로는 풍전등화같은 베트남에 남겨진 10여명의 한국공관원과 1,136명
(실제로는 더 많음)의 교민들을 철수하기위해 발진하는 대탈출극의 시작이였다.
이른바, '십자성 작전' -

그러나 이 작전은 교민들의 비협조로 난항을 겪는다.
이미 1973년에 체결된 '파리평화협정'으로 그해 3월29일 미국은 전투병력을 완전 철수햇고
한국군도 그보다 앞서 3월23일 철군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인데도 베트남에 있는 교민들은 선듯 자국의 철수명령을 받아드리려 하지 않았다.
비록 한,미 병력이 철수했다하더라도 50만의 병력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월남이
그리쉽게 무너지리라고는 믿지 않은것이다.

월남 패망의 '그날' 시나리오를 쓴것은 미국이였다.
미국은 정해진 시간에 �기듯 우방인 한국의 다수 공관원과 교민들,수많은 난민을
버려둔채 서둘러 월남의 막을 내리고 있었다.
한가지 분명한것은 우방이자 혈맹이며 같은 월남전 피를 뿌리며 싸운 한국이
미국이 정한 '그날'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대사관측의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민들은 LST라는 절호의 피난수단을 기피
하다가 패망 마지막 날인 4월29일과 30일 지옥같은 혼란을 겪게된다.
월맹군의 사이공함락이 사실로 나타나고 지척에서 적군이 조여오는 절박한 가운데
최후의 유일한 탈출구인 미국대사관 옥상에서 뜨는 헬리콥터를 타기위해서
무려 수백명의 교민들이 몰려들었던 것이다.
아수라장의 그 현장을 외신은 이렇게 전했다.
-승리는 어떤경우던 쟁취하고 봐야 한다-

결국 '이대용' 공사를 위시한 몇몇 공관원과 수많은 교민들이 탈출에 성공하지 못하고
공산치하에서 지옥같은 곤란을 당해야 했지만.
(이대용 공사는 5년동안 베트남 감옥에 영어 되었다가 1980년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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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대사관 옥상에 있는 마지막 헬기를 타기위하여 사생결단을 벌리는 피난행열)

월남패망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수많은 우리의 젊은이가 고귀한 생명을 바친 결과는 과연 무엇인가?

전쟁에서의 승자와 패자-
극명한 역사의 이 교훈을 보며 문득 전쟁중에 국립묘지에 들려 희생된 영령앞에서
눈믈을 흘린 '장군의 눈물'사진으로 유명한 초대 주월한국군사령관이 였던
'채명신'장군이 한 말이 떠오른다.
-우리의 지금 상황이 베트남 패망 직전과 흡사하다는 우려가 높다.
베트남 패망의 교훈을 명심하여 남북문제,통일문제에 현명하게 대비해야 할것이다-

30년전 월남패망은 이렇듯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값진 교흔을 던져주고 있다.
우리 모두 국론분열을 극복하고 민족통일 이전에 평화정착을 앞당기는 최선의 방안이
무엇인가 냉철히 뒤돌아보고 행동해야 할 단계인듯 하다.

역사는
반듯이 되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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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호치민시(구 월남 수도인 사이공)의 야경 - 저곳 어디엔가 우리 따이한의


자취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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