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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기 중국 시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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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bs 작성일 2012-04-10 06:27 댓글 0건 조회 44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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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시안

시안 공항에 내리는 사진부터 시내 호텔에서 자고 공항으로 나오면서 달리는 차에서 찍은 사진이다.

시안 하면 진시왕릉에서 병사, 말 등 토용들을 보고와야 하는데,,, 거리가 멀고 시간이 모자라 이를 보지 못하고 왔으니, 사실 중국 시안 다녀 왔다는 소리 할 자격이 없다.


중국 산시 성[陝西省]의 성도(省都).

웨이허 강[渭河]의 황투[黃土] 고원에 있다. 예로부터 여러 왕조의 수도였고 매매와 교역의 중심지이며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다. BC 11세기부터 이 지역에 도시가 형성되었다. 전한(前漢)의 수도였던 장안성(長安城)은 당시 전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가운데 하나로 BC 202년 지금의 시안 바로 북서쪽에 세워졌다. 왕망(王莽)의 난(9~23)에 뒤이은 혼란의 와중에 장안 성이 크게 파괴되었으므로 23년에 세워진 후한(後漢)은 뤄양[洛陽]을 수도로 정했다.

서북 변방의 이민족들을 방어하기에 유리한 전략적 요충지이며, 6세기에 서위(西魏)와 북주(北周)가 단기간이나마 수도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장안은 수세기에 걸쳐 쇠퇴했다. 그러다가 수(隋 : 581~618)가 장안을 수도로 정하자 이곳은 다시 번성했다. 수에 이어 당(唐 : 618~907)의 수도가 된 장안은 크게 팽창하여 세 구역으로 나뉘었다. 즉 궁성(宮城), 관리들이 거처하면서 집무했던 황성(皇城), 장인(匠人)과 상인들의 활동무대였던 외곽성이 바로 그것으로, 장안은 세계에서 가장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도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당이 몰락한 후 장안은 상업 중심지이며 중앙 아시아와의 무역중개지로서 그 기능을 계속 유지했으나 점차 쇠락했다.

13세기에 중국에 왔던 마르코 폴로는 이 도시를 번창하는 교역 중심지라고 묘사했다. 현재 널리 통용되는 이름인 시안은 명대(明代 : 1368~1644) 이후에 정해졌다. 얼마 후 서경(西京)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나, 1943년에 다시 시안으로 복귀되었다. 1920년대부터 이 도시는 소련으로부터 공산주의 이론을 받아들이는 주요창구 역할을 했다. 또한 1936년 12월의 시안 사건이 발생한 곳이다. 이 사건으로 항일국공합작(抗日國共合作)이 시작되어, 동남 아시아에서 영국·프랑스·네덜란드의 제국주의가 최후를 맞게 됨을 예고해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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