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리듬/1990/72 x 90/장지, 수묵채색/작가소장
옥처럼 티없이 맑고 청아한 우상기의 화면은 인간 우상기의 절대적인 반영이다.
예술이 인간을 반영한다는 것은 대부분 감성과 이성, 직관과 논리에서 어느 한쪽 면이다.
그러나 화면의 맑음이 바로 인간의 맑음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만큼 작품과 인간이 동일시되기는 쉽지 않다.
또한 스타일이나 형식에서 인간의 형질, 혹은
원형적인 정서가 바로 작품으로 나타난다는 류의 등식은 희귀하기까지 하다.
신록/1993/45 x 53/장지, 수묵채색
우상기에게 화면은 그의 인생을 걸고 매달려야 하는 지극히 성실한 세계이다.
예술은 고뇌를 통해 승화되는 정신의 세계이기도 하고 풍부한 인생의 체험에서 우러나는 정신의 분비물이기도 하다.
그의 초창기 작품들은 이러한 그의 성실에 대한 신념과 인생 경험에 대한 신념과 인생 경험에 대한 신념을 반영하고 있다.
80년의 전남 해남의 대흥사를 그린 극사실 작품, 83년도의 공사장 작업 풍경은
전천후적인 품격의 그림을 위한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이 보인다.
사실 이러한 집념은 그림에 모든 것을 걸고 평생을 매진하련다는 의지가 없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노란나무/1993/73 x 61/화선지, 수묵채색/프로암안과 소장
84년의 작품을 사람들은 「언덕 위의 집」이라 불렀다. 그래서 그는 「언덕 위의 집의 작가」가 되었다.
실증적인 인생 체험과 그림을 하나로 만들어 나가는 인간적인 성실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풀의 가장 풀다운 모습을 찾아내기 위해 그는 슬라이드를 찍어 환등기로 비치면서
객관적이고 중성적인 개념의 세계를 추구하는 하이퍼 리얼리스트들 (Hyper Realists)처럼 파고들었다.
중앙 미전 특선 작품서부터 풀 그림은 많은 작가들에게 하나의 획기적인 형식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기법과 형식의 문제에서 그가 만족할 수 있는 체질은 아니었다. 극사실의 기법은
그가 바라는 정신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단서였다. 곧 풍경의 일부분은 극도의 정밀 묘사로,
나머지 부분은 몽롱하게 처리하는 기법이 개발된다.
풍경 94_10/1994/68 x 126/장지, 수묵채색
그래서 화면은 인공과 절제의 긴장 관계를 극대화한다.
극도의 정밀 묘사와 최소한의 붓자국이 화면에서 만나는 것이다.
이 만남은 곧 음과 양의 조화로 비쳐진다. 먹은 음이고 색은 양이다.
그것의 조화가 사랑이라고 그는 느낀다.
조화가 아름다움으로 느껴질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사랑을 만들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알고 보면 그 조화와 사랑이 바로 원형 회귀의 정신이었다.
그의 그림은 사랑스럽고 푸근한 정감을 준다. 그러나 그것은 감상적인 정감이 아니라
극도의 음과 양이 하나의 화면에서 대립과 공존을 거쳐 만들어 내는 사랑의 하모니이다.
먼저 화면은 강함과 부드러움, 조밀함과 흐릿함의 공존이다. 강한 것은 갈필(渴筆)과 강렬한 윤곽선,
예고 없이 화면을 강타하는 색면의 공습이다.
부드러움은 때로 청록이나 선염의 색면으로 때로 안개낀 풍광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조밀함은 우상기의 화면에서 세부의 묘사가 아니라 화면의 짜임새로 나타난다.
산의 조형/1994/72 x 60/장지, 수묵채색/작가 소장
그리하여 우상기의 화면은 극도의 이지와 물을 머금은 듯한 정감이 자리를 함께 한다.
서사시적 대관(大觀)산수에 서정시적 임천(林泉)의 산수가 공존하는 듯한 화면이다.
대관은 옆으로 넓게 펼쳐 그리는 산수화의 한 유형이며, 임천은 세속을 초월한
고답적 풍광을 다루어 마음을 상쾌하게 하는 산수를 의미한다.
대조적인 화면의 공존을 위해 우상기는 백묘(白描)나 습필(濕筆) 그리고 선염(渲染)이나 발묵(潑墨),
청록과 수묵, 극단의 수평준에 상승하는 수직준을 적이 깔아나간다. 백묘는 먹을 금처럼 아끼라던
이성(李成)의 충고처럼 극히 제한된 부분에 목마른 갈필처럼 그려진다.
풍경 95_4/1995/61 x 73/장지, 수묵채색/최은영내과 소장
습필은 오대의 형호(荊浩)가 말했듯 '붓끝이 겨울나무처럼 가늘고 물기를 머금은 먹은
엷기가 들판의 구름처럼 가볍다'라는 경개이다. 선염은 청록과 먹을 중심으로 장지에 스미듯 깔린다.
발묵은 청대의 심종건(沈宗騫)이 개주학화편(芥舟學畵編)에서 밝힌 것처럼 그림 속의 기운(氣韻)을 피우는 먹의 조화이다.
먹은 발묵, 산색은 발취(潑翠), 풀색은 발록(潑錄)이다. 이들이 경이적인 화면을 일구어 나간다.
그 중에서도 선염은 그의 그림이 풍기는 안개낀 듯한 즉 운연(雲煙)의 흐릿한 정경에서
정일(靜逸)과 풍만의 느낌을 풍겨 주는 언어의 기본소(基本素)이다. 선염의 위에 청아한 느낌의 색면이 조화된다.
청록과 녹색을 주조로 하는 자연의 풍광에 스며들 듯 내뿜는 차분한 발묵이 자리잡는다.
다른 채묵의 작품에도 그 차분하고 청아한 느낌은 그대로 전달된다. 약간 과장에서 말하자면
'조용한 아침의 나라'의 차분함을 연상케 한다.
그 정밀(靜謐)의 세계는 우리에게 체질적인 것을 넘어 원형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상기가 그림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원형은 어린 시절 즐겨 뛰어 놀았던 외가의 추억에서 비롯한다.
논두렁을 뛰어다니던 어린 날의 추억에서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본다.
자연 풍경의 오묘함에서 경이의 세계를 느낀다. 그것은 결코 인간의 구조물인 도시에서 발견되지 못할 것이다.
풍경 95_6/1995/53 x 46/장지, 수묵채색/작가 소장
그것은 농경 민족의 두레와 동아리 의식 같은 것이었다.
두레란 노동을 위한 협동의 형태에서, 동아리는 부락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인화에서 농경사회의 두 벼리였다.
벼리란 그물코를 꿰는 큰 밧줄을 말한다.
그것을 잡아당기면 그물이 당겨져 온다. 벼리는 원형적 정신을 이끄는 우상기의 의식이기도 하다.
원형적 사고는 형질과 혈통의 문제이다.
그 바탕 위에서 그림이란 의식의 끝없는 모험이다. 작가가 원하는 세계를 위한 투쟁이다.
원형적 의식을 끌어내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 우상기는 안료와 색채를 그의 통제하에 두고자 한다.
여러 가지의 색채들과 물감을 그 성질과 그 특성에 맞는 곳에 사용하는 것이 그의 작업이다.
여름 95_10/1995/73 x 61/장지, 수묵채색
이를테면 아크릴 칼라는 착색이 좋으나 방수막을 형성한다. 그래서 먹으로 눌러지지 않는다.
그래서 아크릴 칼라는 주로 착색용으로 쓴다. 그것이 양적인 색채의 세계이다.
음적인 분체(粉體)안료는 가루는 좋으나 접착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이들을 결합하여 화면에서 조화를 이룬다.
그 조화는 조용한 중용의 세계이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 감도는 숨막히도록 평안한 화면이다.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무위의 위(無爲之爲)가 이루어지는 자연의 섭리를 닮았다.
도시적 정감의 아크릴 칼라를 피하는 심리 역시 민족적 원형의 범주이다.
원형 회귀의 화면은 종이다. 종이는 체질적 체험에 의해 선별된다. 화선지나 화지 등의 매끈한 면과
화사한 색면에서 그는 눈을 돌린다. 장지였다. 한민족의 원형적 사고방식의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장지의 세계는 바로 노자가 말하는 무위자연의 세계였다. 곡신(谷神)의 세계였다.
가을 95_19/1995/127 x 161/장지, 수묵채색/작가 소장
"곡신은 죽지 않는다. 현빈(玄牝)의 문이다. 현빈의 문은 천지의 뿌리이다. 끊임없이 삶은 이어진다.
사용하여 다함이 없다"라고 노자는 도덕경에서 읊었다.
곡신은 골짜기의 신이다. 현빈은 검은 암컷이다. 자궁을 의미한다.
골짜기는 자궁과 같다. 모든 생명이 그 안에서 만들어지고 커 나간다.
아무 것도 없는 듯 한 곳에서 꾸준히 생명이 나와 아무리 많은 생명이 그 안에서 나와도 골짜기는 마르지 않는다.
그것이 곡신의 사상이다.
장지가 곡신의 사상을 담고 있다는 것은 그 수더분함에서 온다.
모든 것을 만들어 내고 받아들이는 겸허함에 있다. 기댈 수 있는 편안함, 공기가 통하는 삶의 향취,
허허롭지만 자연스런 짜임새가 그들의 운치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한민족의 원형적 정신이다.
우상기의 그림이 그토록 웅숭깊은 깊이나 편안함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이러한 원형적인 것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옥(玉)과 분청의 수더분하고 편안함, 고귀한 운치이기도 하다. 옥은 우상기에게 이상의 세계이다.
가을 95_62/1995/46 x 53/장지, 수묵채색
장지는 원체 중국인도 탐내던 조선의 종이였다.
분청은 일본인이 그토록 눈독을 들였던 조선의 정신이었다.
중국의 상고 시대에서 옥은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움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신석기시대에 이미 옥으로 동물 모양의 장신구나 사람 형태의 목걸이를 만들었다. 상나라(17-11 B.C.)에서는 옥으로 음양상이라든가 황옥으로 봉황을 만들었다.
이것은 중국의 이야기가 아닌가.
한국인은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상당수 양식 있는 중국의 학자들은 그렇게 생각지 아니한다.
한국인은 철저히 왜곡된 역사 속에서 살아왔다. 최초에 화하족(華夏族=漢族)에 의해 역사는 왜곡되었다.
반도의 사대주의자들에 의해 축소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뿌리가 잘려 나갔다.
식민 사관에 젖은 한국의 사학자들에 의해 철저히 짓이겨진 치욕의 역사로 기록되었다.
설경/1996/45 x 53/장지, 수묵채색
그래서 우리의 역사 속에 자랑스레 기록되어야 할 동이족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가 되고 말았다.
따는 그렇게 해서라도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 수난으로 점철되었던 한국의 지나간 세월이었다.
동이란 어휘도 중국인에 의해 폄하된 이름이다.
동이족은 중국 상고 시대를 지배한 종족이었다.
그 결정적인 단서는 상나라에 있다. 상나라는 일만 개의 부족으로 이루어졌다. 그 중 구천 개 부족이 동이족이었다.
그러니까 동이족의 나라였던 것이다.
상고 시대 부족 집단에서 구천 개 부족이 결집될 수 있었던 것은 상나라에서 비롯된 일은 아닐 것이다.
상나라 이전, 그러니까 기원전 17세기 이전 문화, 즉 앙소문화나 용산문화의 대부분이
동이족이라 부르는 민족의 것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계곡/1996/45 x 53/장지, 수묵채색
중국의 학자들은 요임금, 순임금이 동이족이라 증언한다.
요순이라면 공자가 최고의 성인으로 추앙하는 제왕이었다. 요순시절이 태평성대였다.
그렇다면 유교의 이상이 동이족에서 나온 것이 된다. 산해경이 동이족의 경전이라 한다.
산해경은 고대 신화의 원형이자 신선 사상 도교사상의 원전이다. 초나라 굴원이 썼다는 초사는
산해경의 집대성이다. 그 초나라에서 노자는 도덕경을 썼다.
초나라는 상나라의 제사를 지냈다. 태양신과 조상신이었다.
오늘날 동이족이라 부르는 상족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 나라에서 노자의 도덕경이 쓰여졌다는 사실은
왜 우리의 감수성이 옥이나 장지, 분청 등에서 원형을 찾는지 극명하게 설명해 준다.
또한 도덕경의 곡신이 왜 한국인 우상기의 그림에서 원형적인 것으로 해명되는지 미루어 짐작이 갈 일이다.
풍경/1996/35 x 53/장지, 수묵채색/작가 소장
그 원형의 위에서 우상기는 확실하게 회화의 정수를 끄집어낸다. 우상기에게 표현이라는 것은 언어와 같다.
그 언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테크닉이다.
그러니까 확실한 테크닉의 바탕 위에 표현이 가능하고 그 표현의 위에 정신이 반영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리고서 그 테크닉은 버려질 것이다.
왜냐하면 우상기는 삼병(三病)이 그의 원형을 훼손한다는 것을 잘 아는 한국의 작가이기 때문이다.
삼병은 중국인 곽약허가 중국인 화가에게 내리는 응급 처방이다.
우상기는 밑그림 즉 하도(下圖)를 그리지 않는다.
그것은 하도를 베낄 때 생생한 감정이 걸러질 뿐 아니라 운필이 안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신선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체질이었다.
하도를 보고서 베끼려 하면 운필이 되지 않는 체질, 그것이 이른바 기운생동의 세계일 것이다.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것이 아니기에 이상으로 삼았던 기운의 세계는 한국인에게 체질 그것이었다.
언덕Ⅰ/1996/61 x 73/장지, 수묵채색/정병호치과 소장
또한 흉중구학(胸中邱壑)과 서권기(書卷氣)라는 문인화적인 정신에 의해 돌아가야 하는 선비 정신이
그의 청아한 화면의 비결이다. 흉중구학이란 마음속에 담아 응축시킨 산수들, 서권기는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 둔 문리와 철리를 일컫는다. 이들이 화면 위에서 펼쳐진다는 것이다.
한국인은 산수 속에서 노닌다. 초월적 명상이 체질이다.
그래서 그는 스케치들의 단편을 모아만 둔다. 흰 화면에서 상상력을 발휘해서 스케치를 떠올린다.
그것은 스케치라는 단편의 재현이거나 사실의 묘사보다 본질적인 속성을 파악하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산을 그리되 산의 구도가 아니라 본질을 파 온다. 그것이 우상기가 스케치를 하는 목적이라면 목적인 셈이다.
그래서 산의 본질을 파악했으면 산은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가을/1996/45 x 53/장지, 수묵채색/전주 우제태 소장
그 본질을 궁구하기 위해 그는 개자원화전을 익힌다.
그리고 그것을 버린다. 개자원화보는 1679년 청초에 발간된 중국화 실기의 집대성이다.
명말기의 화가 이유방(李流芳)이 옛 명화들을 모아 「산수화보(山水畵譜)」를 만들고 왕보(王槪)가 증보 편집했다.
산수 인물 누각 사군자 초충 영모의 묘법을 비롯하여 화사 화론 화가 화인 채색 등
중국화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개자원화보를 우상기는 자신이 한국판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야심도 이만저만한 야심이 아니다.
그러나 역시 그 야심은 개자원화보가 자신을 포함한 화가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원이라는 인식에서 우러나온다.
사실 개자원화보에서 읽었던 삼병(三病)은 그의 그림 뿐 아니라 인생의 지침이 되었던 화론이었다.
봄/1998/72 x 60/장지, 수묵석채/익산 이창수 세무사 소장
삼병은 송의 곽약허(郭若虛)의 이론이다.
그림에 세 가지 병이 있는데 다 붓놀림과 관계가 있다. 첫째 병은 평판(平板)에 흐르는 일이다.
붓자국이라 할 수 있을 준( )이 얇은 병이다. 평판에 흐르면 팔의 힘이 약해서 붓이 잘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려야 할 것과 그릴 필요가 없는 것과의 취사를 그르친다.
입체적이지 않으니 그려진 것이 천박해서 원혼(圓渾)한 맛이 없다.
둘째 병은 각박(刻薄)한 것이다. 너무 모가 나게 붓을 대고 떼는 병이다.
각박할 때는 붓놀림이 중간에서 지체되어 뜻대로 그려지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마당에 임하여
공연히 내면적인 분규를 경험하게 된다.
하얀 마음/1996/46 x 53/장지, 수묵채색/그린치과 이명재원장 소장
셋째 병은 성급한 일(結) 이다.
성급할 때에는 나가려 해도 나갈 수가 없고 흩어져야 할 경우에도 흩어질 수 없으며
무엇인가가 있어서 방해되는 것 같아서 마음놓고 붓을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그 삼병은 그러므로 각지지 않고 모나지 않고 성급하지 말라는 충간을 담고 있다.
사실 그러한 충고야 자신이 언어와 어법을 찾지 못한 초심자의 것이거나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중국인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닐까. 우상기에게 그 삼병은 중국의 화론과 마찬가지로 배우고서 버려질 것이었다.
생명력/1998/72 x 90/장지, 수묵채색/작가 소장
결국 우상기가 일찍이 하나의 일가를 이루었으면서도 이토록 본격적인 전시를 미룬 것은
그 삼병에 그림과 인간이 물들까 저어해서일 것이다. 그 병에 물들지 않는 것이란 묵묵히 그림을 그리는 일,
자신의 세계를 다지는 일이라 그는 생각한다.
그것은 역시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작가가 닦을 수 있는 은근한 심성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세계에 그토록 은근한 옥의 향기, 동이족의 영광과 마음이 담기어 있을 것이다.
조화와 사랑으로 회귀하는 원형의 세계
김영재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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